“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라고들 하는데, “역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의 16일 국회 연설은 예상 그대로였고 개성공단의 사실상 폐쇄 이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답답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 연설은 사실상 임기 내에 대북관계 개선 의사가 더 이상 없다는 점에 쐐기를 박은 것이어서 더욱 뼈아프다. ‘퍼주기’라는 표현도 오랜만에 등장했다. 사실상의 ‘박근혜 정권 대북정책 파산’ 선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규정한 상황은 이렇다. 박근혜 정권은 평화의 정착과 통일기반 구축을 목표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등의 정책을 추진해왔는데, 돌아온 것은 핵과 미사일 뿐 이었다. 그러므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더 이상 대화는 필요치 않고 국제사회와 공조한 강력한 압박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16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북한의 4차 핵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인한 안보위기 등과 관련해 '국정에 관한 국회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표면적으로 보면 맞는 얘기다. 그러나 맥락을 잘 따져야 한다. 대표적으로는 ‘평화의 정착’과 ‘통일기반 구축’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초기 이 정권에서 남북관계의 진전이 있을 수 있다는 관측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이뤄졌다. 첫 번째는 비핵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런 협력도 할 수 없다는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에 비해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정치적 문제와 별개로 협력을 진행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실제로 대북정책의 담당자들이 이명박 정권의 그것보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인사들로 평가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보수 정권이 제기하는 ‘온건한 대북정책’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다. 이른바 ‘최대석 미스테리’로 불리는 인수위에서부터의 잡음은 이후 상황에 대한 불안을 예고했다. 해석이 여러모로 분분하지만 최대석 인수위원의 갑작스런 사퇴는 자체적인 대북접촉이 발단이 됐다는 해석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대통령이 드레스덴 선언은 당시 남재준 국정원장이 송년회 자리에서 독립군가인 ‘양양가’를 부르는 등 기이한 분위기 속에서 제기됐다. 잘 알려져 있듯 양양가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할 때 불렀던 노래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의 전임인 류길재 전 통일부 장관은 ‘대북특사’를 자임했다가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발설한 죄로 교체됐다는 게 나름의 정설이다. 당시 한국일보 보도에 의하면 류길재 전 장관은 퇴임을 앞두고 사석에서 “솔직히 통일부 장관은 아무나 와도 되는 자리 같다”고 발언했다. 이 자리에서 류길재 전 장관은 대북라인 중 거의 유일한 민간인 출신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느껴진다는 취지의 발언도 한 걸로 알려졌다. 개성공단과 같은 대북경협을 총괄하고 북한과의 대화 창구로서 기능해야 할 통일부가 사실상 국정원의 하부조직과 비슷한 처지가 돼버렸다는 한탄이 나오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모든 맥락의 배후에 ‘북한붕괴론’이 있다는 건 그간 꾸준히 지적돼온 바다. 여기에 따르면 단지 북한과 잘해보자는 차원의 주장이나 행동은 안 된다. 위에서 열거한 대북라인의 연이은 혼란은 이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의 극단적인 대북정책 역시 북한 체제가 붕괴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는 인식에서 나왔다. “통일은 도둑처럼 온다”면서 ‘통일세’를 걷자고 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와 비교하자면 박근혜 정권의 대북정책은 다소 이중적이다. 남북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당위 속에 일종의 ‘동상이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남북의 관계가 좋아서 나쁠 건 없다는 온건론과 북한 체제가 붕괴된 이후 인프라 격차를 우려하는 일종의 선행투자론이 공조한 형태가 아니었나 싶다는 얘기다. 그리고 개성공단 폐쇄는 후자를 주장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키워줬고, 이들이 더 이상 북한과의 협력이나 지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전환점이 되고 있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지난 며칠 동안 횡설수설한 것은 이런 맥락에 따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연설은 합리적인 학자 출신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가 왜 무리한 주장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면 박근혜 대통령은 이렇게 연설했다. “ 우리가 지급한 달러 대부분이 북한 주민들의 생활 향상에 쓰이지 않고 핵과 미사일 개발을 책임지고 있는 노동당 지도부에 전달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북한 정권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사실상 지원하게 되는 이런 상황을 그대로 지속되게 할 수는 없다”. 홍용표 장관이 여러 난감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증거 있다’고 했다가 이를 철회하며 스타일을 구긴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현재 북한의 체제가 영원할 거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극소수다. 체제 자체의 문제를 봐도 그렇고 국제관계의 흐름을 봐도 그렇다. 그러나 어찌됐건 진지한 정책의 파트너를 대상으로 체제의 붕괴를 공언하는 게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자각해야 한다. 북한 대외정책의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성향을 고려해야겠지만 그들이 박근혜 정부의 선의(?)를 믿기 보다는 드레스덴 선언이나 통일대박론에 반발해온 것 역시 이런 맥락이 작용한 걸로 볼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주장하였으나 ‘평화의 정착’과 ‘통일기반 구축’이 사실은 ‘체제의 붕괴’와 ‘붕괴 이후 관리와 개발 대비’를 시사하는 한에는 노력이 결실을 거두는 일은 애초에 기대할 수 없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 연설에서도 “지금부터 정부는 북한 정권이 핵개발로는 생존할 수 없으며 오히려 체제 붕괴를 재촉할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스스로 변화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보다 강력하고 실효적인 조치들을 취해나갈 것”이라고 발언했다. 남은 임기 동안 관계 개선은 없고 오로지 대결적 성격의 정책만 추진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문제 해결은 북한이 ‘백기항복’을 하거나 체제 붕괴의 수순으로 들어갈 때만 가능해진다. 즉, 박근혜 정권의 대북정책은 이제 이명박 시대와 다를 게 없어졌다. 보수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보아도 지난 3년을 허송세월 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의 핵실험에 큰 배신이라도 당한 듯 말하고 있으나 그들이 원래 그렇다는 걸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아마추어’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 윤병세 외교부 장관(왼쪽)과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16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에 관한 국회 연설'에 앞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 고로, 통일부의 수모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이날 류길재 전 장관은 동아일보에 현재 상황에 대한 나름의 진단을 담은 글을 기고하였다. 그는 개성공단 가동 전면 중단은 불가피했고 이제부터 새로운 대북패러다임이 필요하다면서도 “당장 어떤 방책을 제시하기보다는 방책을 만들 논의의 틀을 구축해야 한다”는 애매한 대안을 언급하고 있다. “민간 전문가들로도 TF를 구성해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어떤 슬픔도 느껴진다. 류길재 전 장관은 중국과 완전히 관계가 틀어져서는 안 되고 국민여론을 통합시켜야 하며 개성공단 철수 기업들에 대한 특별한 고려가 필요하다고도 언급했다.

박근혜 대통령 국회 연설 수위와 비교하자면 이 글은 대통령의 일방적 질주에 대한 일종의 ‘브레이크’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읽힌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과정으로 볼 때 그 브레이크가 동작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대북 및 외교안보라인은 군 출신의 북한붕괴론자들이 우위를 잡고 있다. 아마 류길재 전 장관과 비슷한 입장을 갖고 있을 걸로 예상되는 홍용표 장관의 총알받이 노릇도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차라리 사퇴를 선택하는 게 명예로운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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