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은 가장 급격한 위상의 변화를 맞이한 세대이다. 지속된 경제성장이 본격적인 사회문화적 변화로 나타나며, 언뜻 청소년의 삶의 질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된 듯 보인다. 그러나 최근 ‘청소년기본법 전부개정법률안’ 입법예고 등 법제도적 흐름을 보면 여전히 청소년을 보는 사회적 시각과 주체로서 청소년간의 사회적 긴장은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청소년보호위원회는 대중가요에 잇따라 청소년유해매체 판정을 내리며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청소년에 대한 미디어의 입장은 무엇이어야 할까? 여전히, 청소년은 어른이 판정해주는 유해매체로부터 차단되어야 할 존재일 뿐인가? 청소년은 미디어에게도 매우 중요하고 가장 뜨거운 세대이다. <미디어스>와 <문화사회연구소>는 청소년보호법의 문화적 함의를 살피고 청소년의 문화적 권리와 청보법의 관계, 그리고 표현의 자유와 청보법의 관계를 세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1997년의 산물

청소년보호법은 1997년 7월에 제정되었다. 1997년은 지금 돌아볼 때 상당히 의미 있는 한 해이자 ‘어떤’ 분기점이라 할 수 있는 시기이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까지 이어지는 ‘군대에 기반한 권력’의 시기에서 국민의 정부로 넘어가는 과도기로써 김영삼 문민정부 말기였다. 경제적으로는 어떤가. 97년 말 IMF 경제위기를 앞둔 한국 경제는 뒤숭숭했다. 김영삼 정부 시기는 80년대 호황의 끝물이었다(실제 김영삼 정부 때를 기점으로 이후 정부의 각종 경제지표는 뒷걸음질치게 된다). 신자유주의 경제 위기는 김영삼 정부 경제정책의 무능에 더해 한국 경제를 엄습하고 있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1997년은, 90년대 초반부터 제기된 각종 세대담론의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이른바 ‘신세대’가 본격적으로 기성세대와 충돌하게 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세대담론은 기성세대들에게는 ‘오렌지족’과 연계되어 인식될 뿐이었다. 즉 기성세대에게 1997년은 ‘버릇없는 젋은이’, ‘통제 안 되는 젊은층’이 대거 사회로 쏟아져 나오는 시기이기도 했고, 그런 면에서 당시 기성세대들은 나름의 불안감, 불편함을 겪고 있기도 했다.

1997년, 한국 사회는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90년대의 사회문화적 변화를 겪으며 분명 이전(군사독재 시절)과는 다른 사회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권력의 측면에서 이는 자칫 위기로 전환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국가보안법만으로는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 영역에서 분출되는 새로운 에너지를 적절하게 통제할 수없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통제불가능성’의 위험요소를 줄이고 관리, 규제하는 체계의 마련이 요구되었다. 청소년보호법은 이러한 요구의 산물이었다.

새로운 통제수단

청소년보호법이 사회문화적 변화에 대한 국가권력의 대응 - 새로운 통제수단의 마련 - 이라는 사실은, 청소년보호법 제정 직후 이 법이 적용되었던 사례를 보면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청소년보호법은 국가보안법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청소년과 시민의 머릿속마저도 훈육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글에서 주되게 다뤄야할 내용은 아니지만 청소년보호법 제정 직후 발생한 사례만 언급해보자.

우선 청소년보호법 제정 직후 최초로 실시된 매체물에 대한 유해판정(1997.7.15)으로 1700여 종에 달하는 만화가 ‘청소년 유해매체’로 판정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1998년 말부터 1999년 초까지 두 달 동안 시행된 단속에서는 4만명의 사람들이 청소년보호법 위반사범 및 ‘비행청소년’으로 적발되어 구속, 불구속입건, 즉심, 보호자 인계 등의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가수 유승준의 음반 <웨스트 사이드>가 청소년보호위원회의 심의를 거치면서 가사 부분삭제가 이루어졌고(1997.10), 1999년 3월에는 가수 조PD의 노래 ‘브레이크 프리’가 청소년유해매체로 지정되면서 음반 판매금지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1997년 8월 간행물윤리위원회는 ‘서울민주청년단체협의회’가 발행하는 계간 소식지 <서울청년> 8호를 ‘청소년유해매체물’로 고시하기도 했다. 이는 청소년보호법의 적용이 단지 문화적 표현물과 청소년 관련 매체에 대한 탄압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보운동과 인문사회 출판물에까지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통제가 몰려온다

▲ 영화 <트랜스포머> 포스터
1997년에 비견될 만한 현재의 정치, 경제, 문화적 환경 변화에 발맞춰 청소년보호법이 다시 활개치고 있다. 최근 보건복지가족부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연일 대중문화에 대한 청소년유해매체 지정을 하고 나선 것이다. 1997년의 경제위기가 그 폭과 수위를 더해 지금 반복되는 것처럼, 1997년에 만들어진 청소년보호법의 독소조항들이 이명박 정부의 출현과 함께 규제와 탄압의 논리로 증폭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서슬 퍼렇던 국가보안법이 그 색채를 잃어가고 있는 지금, 새로운 사회문화적 환경 변화에 걸맞은 형태의 통제와 규제 장치로써 청소년보호법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청소년보호법이 전면에 등장한 배경에는 2008년을 뜨겁게 달군 촛불집회와 같이 이전과는 다른 시민 저항이 존재한다. 2008년의 촛불집회를 돌아보자. 촛불집회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시민 저항이었다. 물대포에 맞선 비장한 상황에서도 “온수, 온수”를 외치는 위트가 있었고, 손팻말의 기발한 문구와 경찰버스를 덮어버린 ‘불법주차 스티커’는 함께 거리에 선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아고라’는 여론 형성을 주도하였고, 집회 현장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많은 개인들에 의해 생중계되었다.

정부와 경찰의 입장에서 볼 빼, 촛불은 당장에 거리에 선 시민들을 해산시킨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결국 그들이 뽑아든 것은 ‘국가보안법식’의 빨갱이, 배후세력 운운하는 논리에다 보수언론을 동원하는 이전 정권의 행태와 다를 바 없었지만, 더 이상 이와 같은 방식만으로는 2008년 촛불집회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시민 저항을 잠재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들도 분명히 인식했을 터이다. 결국 국가권력은 ‘다시’ 시민들의 일상적 행동과 생각, 문화적 표현물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필요로 했고, 청소년보호법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청소년보호법 날개 달다

최근의 상황이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청소년보호법의 규제 대상과 내용, 수위 등이 전면적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최근 ‘청소년보호법 전부개정법률안’을 준비하면서 청소년보호법의 적용대상과 내용, 권한 등의 대폭적인 확대를 꾀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입법예고 사전 단계로 부처 간 조정 및 의견 수렴 단계에 있는 ‘청소년보호법 전부개정법률안’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청소년보호법의 적용 대상을 사회 전반의 영역으로까지 확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선 법의 적용 대상에 ‘정보통신망을 통한 정보’를 포함시켰고, 기존의 법률이 대상으로 하지 않던 영화, 게임, 인터넷 멀티미디어 방송콘텐츠 등도 포함시켰다. 그리고 법률이 다루는 ‘유통’의 개념을 ‘매개’하는 행위까지로 확대하여 사실상 정보통신, 언론, 방송, 스포츠까지 청소년보호법의 규제가 미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또한 다른 심의기관이 있는 영역의 콘텐츠의 경우에도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유해매체로 지정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기까지 했다. 결국 이번 개정안은 청소년보호법과 청소년보호위원회를 ‘법 위의 법, 기관 위의 기관’으로 군림할 수 있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이번 개정안의 의도는 분명하다. 이명박 정부는 청소년보호법에 날개를 달아줌으로써 과거 국가보안법을 통했던 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를 부활시키려 하고 있다. 언론과 정보통신, 문화콘텐츠 등의 사회적 역할이 커진 현실을 고려하여, 시민들에 대한 규제와 통제를 ‘보호와 규제의 대상으로서 청소년’이라는 인식의 약한 고리를 통해 확산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반복과 후퇴에 맞서라

청소년보호법은, 정작 보호해야 할 청소년 인권은 보호하지 못한 채 청소년과 시민에 대한 통제, 그리고 매체에 대한 규제만 강화할 뿐이다. 청소년보호법에 정작 ‘청소년’은 없고, 규제와 통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연일 청소년유해매체가 발표되고 이에 대한 사회적 저항(과 비용)이 발생하고는 있지만, 정작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줄어들지 않고 청소년 복지 또한 개선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청소년보호법의 현재 위치를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청소년보호법을 ‘청소년인권보호법’으로 바꾸는 것을 기본으로 한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 청소년 인권보호와 복지 강화, 교육현장 개선 및 청소년의 자율 강화를 축으로 청소년기본법과 청소년인권보호법의 틀을 마련하고, 기존 매체에 대한 심의 기능은 없애버리는 것이 타당하다. 매체 심의 기능의 경우, 이미 매체의 종류별, 기관별로 심의체계가 구축되어 있기에 청소년보호법의 심의 기능은 중복일 뿐이다. 청소년보호론자들이 주장하는 청소년 관련 범죄의 창궐의 문제는 현행 법률로도 충분이 처벌과 규제가 가능하다.

최근의 상황과 1997년을 비교하면, 역사가 반복(혹은 오히려 후퇴)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1997년과 마찬가지로 2008년 이명박 정부는 통치의 위기와 경제 위기, 급변하는 사회문화적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유효한 통제 수단을 만들려고 한다. 다만 그 폭과 수위는 다를 수밖에 없는데, 1997년의 그것이 국가보안법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청소년보호법을 도입함으로써 매체에 대한 통제의 길을 열어놓은 수준이라면, 2008년 오늘의 그것은 국가보안법을 ‘뛰어넘어’ 청소년보호법을 중심으로 매체 및 사회활동 전반,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규제 및 탄압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지금의 청소년보호법을 둘러싼 상황에 대한 개입과 운동은 청소년단체나 문화예술단체 뿐 아니라 시민사회운동 전반에 걸쳐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 모두의 각별한 관심과 주의, 개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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