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들의 몸무게를 공개하고, 망가지는 모습을 슬로우 모션까지 동원해 보여주며 웃고 떠드는 방송이 KBS2에서 설 특집으로 방송되었다. 여자 아이돌 멤버들이 갖춰야 하는 덕목이라는 것이 너무 황당할 정도다. <본분 금메달>은 지상파의 막장화가 얼마나 다양하게 가속화되고 있는지를 보여준 프로그램이었다.

걸그룹 멤버들에 대한 저급한 품평회, 무엇을 위한 설 특집인가?

드라마는 막장만이 버티고 있고, 예능 역시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는 지상파 방송이 그 끝을 잠시 보여주었다. 설 특집으로 준비된 <본분 금메달>의 원 명칭은 <본분 올림픽>이었다. 금메달이라는 급조된 명칭은 평창올림픽 측에서 명칭 사용과 관련한 문제제기를 했기 때문이란다. 제목이 바뀌는 과정에서 보여준 황당한 상황만큼이나 <본분 금메달>의 내용 역시 경악스럽다.

<사장님이 보고있다>의 짧은 기획안 속 내용은 그럴 듯해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급조되어 어떻게 아이돌을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도 없는 제작은 모두에게 민폐로 다가올 수밖에는 없다.

▲ KBS 2TV 설 특집 예능 파일럿 <본분금메달>

아이돌들은 어떻게든 방송에 나와 얼굴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고, 기획사 사장들 역시 소속 연예인들을 노출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점에서 출연을 마다할 명분운 없다. 신인이거나 상대적으로 약한 기획사들이 출연하고 사장들 역시 유명 기획사는 대리 출석 등으로 채워 넣은 이 방송은 저급했다.

<본분 금메달>은 <사장님이 보고싶다>가 그래도 좋은 프로그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였다. 앞서 방송된 <사장님이 보고있다>는 중소 기획사 소속 아이돌들을 방송에 출연시키는 긍정적인 의미라도 담고 있었지만, <본분 금메달>은 그런 가치조차 만들어내지 못한 저급한 방송의 끝판왕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형식은 무척 단순하다. 걸그룹 멤버들을 모아놓고 다양한 게임을 하며 그 안에서 제작진의 다른 의도를 통해 재미를 느끼게 한다는 방식이다. 방송사에서 다시 꺼내든 '몰래 카메라'의 새로운 변주 정도로 볼 수 있는 이 프로그램은 그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했다.

아이돌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본분을 지켜야만 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망가지지 않는 걸그룹을 1등으로 뽑아 상을 주는 이들의 주관적인 줄 세우기는 시청자들을 멘붕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늦은 시간까지 방송을 본 많은 시청자들이 해당 방송 게시판을 찾아가 분노를 토해내는 것을 보면 이 방송이 얼마나 큰 문제를 품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논란의 <본분 금메달>은 김구라와 전현무, 그리고 개그맨 김준현이 MC로 나서고, 신봉선과 윤정수가 보조 MC로 합류했다. 그리고 걸그룹 EXID 하니와 솔지, AOA 지민, 애프터스쿨 리지, 여자친구 유주, 트와이스 다현, 정연, 피에스타 차오루, 헬로비너스 나라, 박보람, 베스티 혜연, 앤씨아, 허영지, 나인뮤지스 경리 등이 스튜디오에 출연했다.

▲ KBS 2TV 설 특집 예능 파일럿 <본분금메달>

제법 많은 수의 걸그룹들이 참여한 이 방송은 여자 아이돌들이 비주얼 유지, 상식, 섹시, 개인기, 집중력 테스트 등 다양한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반전 속내를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그저 글로 보면 별다를 것 없는 그럴 듯한 내용이다. 문제는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이냐이다.

체력을 검증하는 과정은 '비주얼 유지 테스트'라는 이름의 몰래 카메라였다. 제작진의 요구에 따라 그들이 철봉 매달리기를 하는 모습을 슬로우 모션으로 담아 망가지는 모습을 공개하며 희열을 느끼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얼마나 망가지느냐에 따라 다른 평가가 나온다는 점에서 가학적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걸그룹의 본분인 외모를 지키면 금메달을 주는 형식이다.

가학을 통해 재미를 이끌어내는 것은 막장이다. 드라마가 그럴 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노력을 방기하고, 극단적인 이야기 구조를 통해 시청자를 바보로 만들며 돈벌이에만 급급한 것과 유사하다. 걸그룹 멤버들의 인권은 의미가 없다. 그저 1등하면 홍보할 수 있는 노래를 잠깐 틀어주고 최종 우승을 하면 한우 세트를 준다는 게 전부다.

걸그룹 멤버들을 몰래 카메라로 놀리며 이를 대가라고 내민 것은 전형적인 갑질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갑질이 가능한 것은 구조적으로 여전히 방송사들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방송에 등장한 걸그룹 멤버들 중 FNC와 JYP도 참여하기는 했지만, SM이나 YG 등 강력한 기획사는 참여조차 하지 않았다. 아이돌이 나오는 예능에 그들이 이미 손을 뗀 지 오래라 이상할 것도 아니지만 이는 방송사와 아이돌 기획사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 KBS 2TV 설 특집 예능 파일럿 <본분금메달>

막장급 몰카가 아니라면 의외로 재미있는 구성일 수도 있었다. 정상에 올라선 이들보다는 신인이거나 더 노력해야만 하는 이들이 모였다는 점에서 그들은 간절했다. 그들은 제작진의 요구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간절함에 그 어떤 상황도 받아들이며 노력한 걸그룹들의 모습이 안쓰럽게 다가올 정도였다.

영하 13도가 넘게 떨어진 날씨에 옥상에서 섹시 댄스를 추라는 요구도 황당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이 여자 아이돌들의 몸무게를 공개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키와 몸무게를 공개하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아무런 동의도 얻지 않은 채 그저 자신들의 재미를 위해 이런 식의 방송을 하는 것이 과연 공영방송에서 할 일인가?

장난이라고는 하지만 퀴즈를 맞히는 자리에서 바퀴벌레 모형을 아이돌에게 슬쩍 내밀어 놀라게 하고 이를 슬로우 모션으로 잡아 공개하며 웃으라 강요하는 것은 가학이다. 그것도 여러 번 되풀이하며 그럴 듯한 CG와 BGM까지 깔며 포장하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은 그들의 상식이 어느 수준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어린 여자 아이돌들을 가학적으로 괴롭히며 즐기는 형식의 <본분 금메달>은 최악이다. 일본의 저급한 예능을 비난하던 이들은 이제 국내에서도 그런 방송을 다른 날도 아닌 설 특집에서 보게 되었다. 케이블 방송도 아닌 공영방송이라는 곳에서 민족의 명절이라는 설에 이런 특집을 방송하는 것은 최악이다.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 더욱 상대적으로 권력 순위에서 낮은 곳에 있는 어린 여성들을 하나의 상품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그대로 담고 있으면서도 이를 웃음으로 포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게 다가온다. 여전히 우리 사회가 많이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본분 금메달>은 명확하게 보여준 셈이다.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재미없게 글을 쓰는 '자이미'라는 이름과는 달리 유쾌한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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