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연의 정체성을 그대 인간의 잣대로 재단하려 들지 말고, 그대 인간의 탐욕적인 판단으로 바꾸려 하지 마시오!”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다. 강을 품어 만생명을 거두어 함께 살아가는 대자연의 목소리다.

작금에 일고 있는 한반도 대운하 계획이나 그것으로 포장된 4대강 정비사업에서 말 못하는 강이, 강물이 하늘을 통해 자신의 시름을 토해내고 있다. 늘 그래왔듯이 강은 만생물과 더불어 인간과 함께 살아왔다. 자연이 강을 만들고 강은 인간을 품고 억겁세월을 살아오면서 하늘은 그것들의 먹이사슬·생명사슬을 지켜주기 위해 비를 뿌려주고 물을 만들어 주었다. 인간이 강에게 물어보아야 하고 강은 하늘에게 여쭙는 순환의 질서에서 인간은 그 스스로가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이 섭리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강의 자연스런 활동을 힘들어 할 때 그것을 올바로 찾아 도와주는 것이어야지, 그것을 빌미로 함부로 뜯어 고치고, 있던 곳을 함부로 없애는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인간이 자연을 품어 사는 일이 되기 때문에 세상은 그렇지 않음을 모두 다 알고 있는 상식이지 않은가. 여태까지 살아왔고 또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간세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안목과 덕목과 그것으로부터의 절제를 지켜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세세년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다른 곳에 있지 않음이기 때문이다.

4대강 정비사업이나 한반도 대운하를 말하면서 ‘강을 살리는 일’이라는 화법은, 몇몇 인간들의 이야기이지 결코 전체 인간의 생각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참 다행이라 생각된다. 몇몇 사람들의 계획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살면서 배우고 깨우친 학문이나 종교는 그것으로부터 우러나온 경계의식이 있을 것이고 절제심이나 책임감이 있어 공존의 생명미학을 자연으로부터 새삼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2)

4대강 정비사업을 주창하는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다. 4대강 정비든 한반도 대운하든 그 과정과 목적이 무엇이 되든 결코 강을 살리는 일이 아님을! 그 일은 단지 인간이 만드는 인간의 일일 뿐이지 강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30여년간 강의 발품지기로서 말씀드리고 싶다. 이 일들이 만약에 실제로 시작된다면 바로 그 시간부터 우리에게 연결되어 있는 자연과의 왕래도, 소통도, 상생도 끝나는 것이며 사랑하는 후손들에게 감당 못할 압박과 부담을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로 말씀드린다. 첫째, 강은 우리 국토의 신경계이자 혈관이다.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움직임을 엮어 그 특성들이 제각각 나름대로의 살림살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율계의 중심자리로서, 우리 인간으로 치면 몸의 신경조직이며 혈관이 된다.

필자가 요즘 겪고 있는 고통 중에 ‘말초동맥질환’ 같은 병이 있어, 걸을 때마다 불편함에 시달린다. 한 곳이 아프니까 다른 부위가 또 아파온다. 내 몸 같지 않으면 좋겠지만 30여년 현장을 지켜본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우리의 강과 하천에도 나 같은 증상의 자리가 엄연히 존재하고 (그것으로) 그 곳을 둘러싼 자연계가 부자연스러울 때가 많다.

강의 생긴 모습이 인간에 의해 탈바꿈된다면, 예를 들어 강폭이 인위적으로 펼쳐지고 줄어든다면, 오래 전부터 길들어진 자연의 움직임에서 물은 물대로, 모래는 모래대로 반발하면서 제 자리 제 방식을 고집할 것이다.

일정 기간에는 인간의 잣대로 요구한 기대감에 만족을 줄진 몰라도 언젠가는 인간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이럴 때 마다 토목기술은 또 다른 방속의 토목기술을 요구하는 악순환이 우리의 강속에 혈전처럼 들어붙을 것이다. 4대강 정비사업이든 대운하든 강의 신경계를 건드리면서 신경계 고리를 해체시키는 일이 될 것이기에, 아무리 좋은 기술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결코 오래 갈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둘째, 강은 하천망으로 존재한다. 산은 국토 안에 버텨선 공간의 골격이지만 강은 한시도 쉼없이 움직이는 시간의 자궁같은 곳이다. 끊임없이 흐르면서 생명의 순환과 인연을 만드는 자리에서 그 강이 지는 하천망의 내용은 참으로 다기다양하다. 물로서 소통하고 물 속에 품은 내용물로 생성시키는 생태는, 그 깊이나 넓이에서 인간이, 사회가, 국가가 함부로 만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4대강 정비사업은 본류 중심으로 짜여진 계획이지만, 눈을 씻고 보아도 주요 대지류별 하천망에 대한 인식이나 고려가 하나도 없다. 인간으로 치면 사람마다 집안이 있고 족보가 있고 내력들이 있듯이, 강과 하천도 마찬가지다. 집안에 호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강의 단위조직에는 도랑부터 본류까지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집수역이 있고, 집수역들은 최종 본류의 대유역과 생태적으로 유기되어 있고 연기되어 있다. 연기와 연동의 주요 요소로서 강수량, 표고, 경사도, 하상계수 같은 것들이 상호작용으로 물과 소통하며 생명의 흐름을 만들고 있다.

아무리 토목기술이 좋다 하더라도 강 정비사업을 한다면, 이들이 과연 연기와 연동의 자연성을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렇지 못해 물로 인한 어떤 피해가 발생한다면, 강과 더불어 살아가는 유역 주민의 삶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예를 들어, 본류의 특정 지점 정비를 위해 3m 깊이로 준설한다고 볼 때, 그 지점과 연결된 특정 대지류의 본류 합수지에서 요구하는 안정적인 하천간 경사도가 1m 정도라면, 대지류는 합수지로부터 일정한 거리까지 2m 차이의 하상 경사도 유지를 위해 준설이 뒤따라야 하며, 그곳의 기준에 맞추는 제방 사업이 함께 이뤄져야 될 것이다.

강의 하천망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때, 본류의 어떤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최소의 사업은 도랑부터 시작하여 소하천-대지류-본류로 나아가야 될 것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4대강 정비사업은 거꾸로 계획된 점에서도 결코 강을 살리는 일이 될 수 없다.

셋째, 최소한 강의 자연활동을 배려하는, ‘강은 강이어야 한다.’ 강의 자연활동에서 최선의 가치는 ‘흐름’이며 최대의 효과는 ‘상생’이다. 흐름과 상생의 주체는 ‘물’이다. 물로써 흐름을 이루고 물로써 생명을 생성시킨다. 이러한 물이 강을 만났을 때 반응하는 생태적 활동은 수평적으로 집수역과 민감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수직적으로 강수량과 표고와 하상계수 등으로 관계한다. ‘강은 강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수평적 의미에서 집수역과 교류하면서 나타나는 오염의 정도를 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수직적 의미에서 물의 많고 적음(홍수, 가뭄, 범람, 한해)을 거역하지 않으며, 강의 넓고 깊음을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강은 땅의 가장 얕은 곳에 내려앉아 적시고 흘러드는 물을 모으고, 그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하는 자연활동의 근원지이지만 우리의 강은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25년을 거치면서, 유역상황의 변화로 인해 어떤 곳은 갈기갈기 찢겨져 버렸고, 또 어떤 곳은 줄기찬 오염 공세에 밀려 호흡조차 힘겨워하고 있다.

우리의 본분은 군데군데 찢긴 곳을 꿰메어주고 막힌 곳을 뚫어줌으로써, 최소한의 자연스러운 기운을 되찾아주는 일이다. 이 문제는 일시적 판단으로 단기처방하는 방식이 아닌, 새로운 미래를 향한 의지이어야 한다.

예컨대, 국운 융성이라는 크고 긴 화두에서 생각할 때도, 단기처방은 그 약효가 금세 없어지고, 결국은 국토의 누더기 현상을 일으킬 것이다. 누더기가 되어버린 국토의 속살에서 국운이 융성될 리 없다. 천덕꾸러기 같은 국토의 신경계는 헝클어질대로 어지럽게 해체돼, 강에서 국민의 미래를 기약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4대강 정비 사업보다는 강의 자연성을 회복해주고, 회복된 자연능력에 맞추는 국민의 저력을 만드는 일이 필요한 때이다. 강이 강다워야 사람이 사람답고 나라가 나라다워지는 것 아니겠는가.

홍수와 범람은 자연으로부터 일어나는 수재다. 이 수재에서 인간과 사회의 피해가 크다면 이를 방어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지혜 속에서 제방을 쌓고 높이고 하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생존의 방식이다. 100년 주기 범람이든, 50년 주기 범람이든 간에, 적정한 기준이 필요한 것은 국민의 뜻이며 정치의 몫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만을, 사회가 사회만을 위하는 어떤 사업을 강구하기 위하여, 그 사업의 필요와 목적에 맞춘 논리적 판단은 옳지 않다고 본다. 본디 제방은 물론 모든 높이 쌓은 것이 무너질 땐 그 높이 만큼 상처나 피해가 배가 되기 마련이다. 있는 만큼, 있는 그대로를 지키고 살쪄가는 지혜를 찾는 것이 최상책이다.

올해만 해도 비가 오지 않아 여기저기 피해가 보인다. 낙동강의 경우 소하천, 대지류에 물이 강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전국 1만8천여개의 저수지도 메말라 버렸다. 내년 3월까지 비가, 그것도 큰비가 오지 않으면 생태도, 생활도, 민심도 흉흉해질 것이다. 비가 오지 않는 것은 강이 강다움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강에 정량 수량의 물이 없으니 각종 오염물질이 강 곁에서 바싹 달라붙어 비가 올 때를 기다린다.

2008년 11월까지 낙동강 평균 강수량이 780mm에 머물고, 영산강은 900mm대에 머물렀다. 낙동강의 경우 50년 평균 강수량이 1181mm인데, 12월에 비가 많이 온다 치더라도 절대적 가뭄기를 넘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내년 봄에 나타난다. 큰비가 내려 비록 범람을 하더라도 비가 왔어야 했다. 홍수와 범람의 순기능도 있다. 강을 씻어주고 쌓여있는 오염물질들을 담아 실어 바다로 옮겨주어야 했다. 그럼에도 올해는 그런 기회가 없었다. 잘 되기를 바라지만 내년이 진정 걱정스럽다.

#3)

논리가 현장의 사실들을 함부로 지배하려 하지 말라. 4대강 정비사업의 ‘강도 고치고 경제도 살리겠다’는 말, 절대로 두 가지를 함께 이룰 수 없다. 강은 경제를 끌어안고 키울 수 있지만, 경제는 강을 안을 수 없다.

경제란 강을 해칠 대상이지 결코 강의 자연성을 구제할 수 없다. 단기부양이라는 필요에서 일순간의 경제적 만족도를 얻을 수는 있겠으나, 그 만족도는 경제를 통해 불거져 나오는 강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과연 지속적인 부담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강을 통해 민심을 모으고, 그 민심으로 국민적 동력을 모으는 방법이 낫다. 그야말로 강도 살리고 경제도 살리는 일일 것이다.

2009년은 ‘운하, 4대강 정비사업’이라는 화약고에서 빠져 나왔으면 한다. 오히려 그 화약고를 해체하는 국민합의가 필요하다. 이를 이끌어내는 정치지도자의 새로운 리더십을 국민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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