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프전 당시, 이라크 국영 텔레비전에 출연한 미 조종사.
걸프전이 한창이던 지난 1991년 1월, 폭격 임무를 수행하다 이라크군에 포로로 잡힌 미군 조종사 7명이 이라크 국영 텔레비전에 출연했다. 이들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말을 더듬거리면서 이라크 공중폭격에 대한 잘못을 시인하고 이라크와 사담 후세인을 찬미하는 내용의 인터뷰가 방영되자, 미국 내에서 반 이라크 감정이 비등하고 전쟁 지지 여론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시청자들은 화면에 비친 조종사들의 얼굴에 난 상처와 두려움에 굳어진 표정을 이라크에 의한 ‘구타’나 ‘잔혹한 고문’의 결과로 여겼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이 인터뷰가 ‘연기’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조종사들의 얼굴에 난 상처는 폭격기가 추락할 당시에 생긴 것이었고, 심지어 구타를 당한 것처럼 보이려고 얼굴에 일부러 상처를 낸 사람도 있었다. 공포에 휩싸인 모습으로 말을 더듬은 것도 이라크와 사담 후세인에 대한 찬양을 강요당한 것처럼 보이기 위한 ‘연기’였다.

▲ 1990년 10월 10일, 미 하원에서 이라크군의 만행을 증언하는 한 쿠웨이트 소녀. 후에 ‘조작극’이었음이 판명됐다.
이보다 앞서 1990년 10월10일, 한 쿠웨이트 소녀가 미국 하원 인권위원회에서 이라크군의 만행을 증언했다. 이라크 침공 직후 쿠웨이트를 탈출했다는 이 소녀는 이라크군이 병원에 난입해 보육기에서 자고 있던 아기를 바닥에 내던져 죽였다고 말했다. 문제의 병원에서 근무했다는 의사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같은 사실을 확인해줌으로써 소녀의 증언을 뒷받침했다. 눈물을 흘리며 이라크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15살 소녀의 말에 미국의 시청자들은 분노했고, 이 증언을 계기로 미국 내 여론은 걸프전 참전 지지로 돌아서게 된다. 하지만 이 역시 철저한 ‘조작극’이었음이 훗날 판명된다. 이 소녀는 미국에 주재하고 있던 쿠웨이트 대사의 딸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당시 쿠웨이트에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라크군이 아기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죽인 일도 거짓이었고, 유엔 안보리에서 증언한 의사 역시 걸프전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었다.

반전 분위기를 돌려세우기 위한 아버지 부시 행정부의 여론 조작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미국 국민들의 80% 이상이 당시 자기 정부를 지지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영상 미디어가 가진 위력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이후 이라크를 재차 침공한 아들 부시의 행정부도 전쟁지지 여론을 만들어내기 위해 마찬가지 조작극을 획책했다. 2003년 4월10일, 해방된 이라크인들이 혐오하던 권력자의 상징인 후세인 동상을 끌어내리고 미군이 이를 돕는 모습 역시 연출된 쇼였고, 2003년 3월23일, 이라크군에 억류돼 있던 제시카 린치 일병이 미 특공대에 구출되는 장면도 그저 미리 짜여본 각본에 따른 ‘연극’에 지나지 않았다. 뒤늦게 밝혀진 진실은 그러나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비난받아야 할 것은 화면에 비친 이미지에 울고 웃는 시청자가 아니었다. 비난은 마땅히 여론 조작에 동원된 미디어와 국민을 속인 정부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 영상 미디어와 보도(이마무라 요이치 지음, 김이랑 옮김, 눈빛 1998)
174쪽에 불과한 이 자그마한 책은 ‘영상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기록되는 역사’에 물음표를 던진다. “미디어는 사실을 영상화해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영상을 사용해서 사실을 만들고, 역사를 창조해가는 것이다.” 영상을 업으로 가진 나로서도 영상 미디어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심정은 썩 유쾌하지 않다. 조작된 이미지가 횡행하는 현실에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어떻게 판별할 수 있을 것인가. 제1세계가 만들어낸 영상을 대부분 검증이나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의 경우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다. 어떤 영상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찍힌 내용물의 진실성과 더불어 ‘그 영상이 성립되고 있는 상황’ 또한 설득력을 지녀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중대한 역사적 현장을 기록하고 전하는 미디어가 특정 이념의 포로가 돼버린 작금의 상황에서 시청자가 미디어를 통해 사실과 진실에 접근하는 일은 갈수록 요원해지고 있다.

지난 1989년에 일어난 7일 간의 루마니아 혁명 과정을 생생하게 비디오카메라에 담은 주인공들은 전문 방송인이 아니었다. 루마니아가 새롭게 태어나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귀중한 영상으로 기록한 것은 스필 제레슈와 단 초바누라는 평범한 두 시민이었다. 인류의 역사를 영상에 담아내는 일이 특정 전문가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자, 이른바 ‘주류’ 미디어의 편향적 여론 조작은 시간이 갈수록 그 정체를 더 쉽게 들키게 됐다. 비전문가인 그들은 주류 미디어의 침묵과 소극적 자세를 비웃으며, 급기야 24시간 현장 생중계라는 영상 문화의 새 풍속도를 만들어냈다. 촛불 중계가 단적인 예다. “텔레비전은 전체 그림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는 불만은 ‘돌발영상’이라는 새로운 상품의 탄생으로도 이어졌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장과 사실, 보이는 것의 이면에 숨겨진 더 생생한 진실을 드러냈다. 더 나아가 주류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조작된 영상과 이미지의 함정을 파헤치자는 언론 스스로의 자성은 갖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주류 미디어인 지상파 방송이 매체 비평을 시도할 수 있게 한 힘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돌발영상과 ‘유의미한’ 매체 비평 프로그램이 텔레비전 화면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조직적 탄압’의 결과로 번져가는 후유증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인류의 역사를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한 회화의 시대에서 출발해 로버트 카파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에드워드 머로와 몰리 세이퍼, CNN과 유선방송, 그리고 오늘날 인터넷 방송과 포토샵의 시대를 거치면서 영상 세대인 내가, 우리가 경험하고 깨달은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영상 미디어가 가진 가공할 위력이다. 저자는 묻는다. “훗날 여기에 기록되는 것은 인류의 행복한 모습일까, 그렇지 않으면 파멸로 향한 노정일까.” 저자는 더 나아가 우리 시대를 “영상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가상현실이 세계 인류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결정해 버리는 영상의 시대”로 규정한다. 그래서였을까. 영상 미디어를 체제나 이념을 선전하는 도구로 간주하는 풍토는 동서 냉전이 이미 오래 전에 종식된 뒤로도 사라지지 않는 망령처럼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있다. ‘장악’을 향한 집요한 기도를 ‘그들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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