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들이 사는 세상>(이하 그사세)이 하지 않는다. 당신이 관심을 흘기던 사이 지난주에 이미 끝나버렸다. 마지막 회의 시청률은 7.7%였다고 한다. 뭐랄까, <노희경(작가)-표민수(연출)> ‘콤비’의 진가는 입증되었고 또 동시에 그 ‘콤비네이션’의 명백한 한계 역시 확인됐다고 할까. 지난주 같은 날 방송된 <에덴의 동쪽>(이하 에동)은 출생의 비밀이 본격적 갈등의 촉발제로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서울/수도권 기준 시청률 30%를 돌파했다. 시청률이 드라마 인기의 ‘절대치’라고 한다면, <그사세>는 1분1초도 <에동>의 적수가 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인터넷의 분위기는 시청률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12월15일(월)부터 17일(수)까지 <그사세>는 항상 드라마 검색어 순위 3위권 이내를 유지했다(15일 3위, 16일 1위, 17일 2위). 반면, <에동>은 15일 6위, 16일 4위, 17일 6위였다. 멀찍했다고까지 하긴 어렵겠지만, 확실히 인터넷에선 <그사세>가 더 뜨거웠다. 뉴스 검색을 해보면 결과는 좀 더 분명해진다. 12월15일(월)부터 19일(목)까지 <그사세>로 뉴스 검색을 해보면 9페이지가 넘는 기사가 뜬다. 같은 기간 <에동>은 앙드레김을 카메오 출연시키고, 촬영 현장을 공개하는 속보이는 노림수를 사용하며 일정한 기사를 만들어냈지만, 그 만들어진 기사들을 포함해도 <그사세>에 미치지는 못한다. 대중의 관심이 확실히 <그사세>에 몰렸었단 말이다.

▲ ⓒ'그들이 사는 세상' 홈페이지
물론, 검색어 순위의 사소한 차이와 인터넷에 널부러져 있는 기사들을 절대반지 삼아 ‘<그사세>가 <에동>보다 이만큼 저만큼 훌륭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전에,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사세>를 뭐라 떳떳하게 평할 만큼 열심히 보진 못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디어스> 지면을 통해 <에동>에 너무 빨리 호응했던 철부지 시절의 상처가 여전히 낯뜨거울 뿐이다.

그저 다만 <그사세>가 끝나고 <꽃보다 남자>를 기다리는 볼거리 없는 시간에도 <에동>은 여전히 계속될 뿐이고, 이 교차의 자리 밑에는 반드시 더듬어봐야 할 몇가지 흥미로운 질문들이 복선으로 깔려 있는 것 아니겠는가, 뭐 이런 얘기이다. 말하자면, 이 글은 <에동>이라는 ‘새로운 진부함’이 밟고 지나간 월화 미니시리즈 자리에서도 기어이 죽지 않은 <그사세>의 ‘아햏햏’한 생명력에 대한 뒤늦은 탐구생활이다.

대개가 그렇듯, ‘시청률’은 미국에서 수입해왔다.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청자 집단 가운데 하나는 ‘카우치 포테이토’(couchpotato)족이라 불리는 이들이다. 문맥 그대로,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며 감자 칩을 먹는 사람들이다. 미국에선 매일 할 일 없이 집안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미국 시청자의 TV 수용 행태가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름을 시사하는 말로 읽혀야 한다.

미국에서 TV란 그 강력한 영향력과 절대치에도 불구하고 문화연구의 입장에선 여전히 고독한 ‘수행’이고, 때때로 조롱받는 ‘취미’이기도 하다. 미국 TV는 그 ‘수행’과 ‘고독’의 양면성을 줄타기하며 시청률을 추출해낸다. 고로, TV는 완전한 개인들을 향한 ‘마사지’가 된다. 과연, 우리의 TV도 그러한가? 아니다. 얼핏 생각해봐도 우리에게 TV는 미국과는 전혀 다른 매체, 공동체적 무엇이다. 한국에서 TV는 각개로 쪼개진 개인들을 거실로 불러 모으는 공간의 정치를 창출해내는 매개물이다.

그 중에서도 월/화요일 밤 10시를 생각해보자. 그 시/공간은 가족이라는 치열한 정치적 산수의 절정체이다. 주말 동안 거의 잤고, 월요일부터 술을 걸치면 일주일이 피곤하다는 진리를 오랜만에 실천한 아빠는 낯섦으로 아이들이 학원에서 돌아오길 기다린다. 이번 주말 친구들과 약속을 보다 ‘풍요’롭게 맞고 싶은 욕망에 가득찬 아이들은 월요일에는 학원이 끝나자마자 일단 집으로 돌아오는 성의를 보인다. 주말 내내 가족들의 평화를 위한 중재에 나섰고, 그 결과로 월요병에 시달렸던 엄마는 일찍 귀가한 아빠와 이러저러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어서 아이가 돌아와 직접적 분쟁의 대상들이 한 마디라도 더 나눠보길 희망한다. 뉘엿뉘엿 뉴스가 끝나갈 즈음, 초인종이 울리고, 후다닥 가방이 던져지고, 마지못해 컴퓨터를 피하고…. 그렇게 온 가족이 거실에 둘러앉는다. 그럼 이제 무얼 해야 할까? 하긴, 뭘 하나. 일단 TV나 봐야지, 뭐. 익숙하게 <에동>을 본다.

▲ ⓒ'에덴의 동쪽' 홈페이지
아이의 입장에선 묻진 않았지만, 친구들도 비슷한 이유에서 <에동>을 보니까. 송승헌, 연정훈, 이다해, 한지혜 정도가 나오면 그럭저럭 할 얘기는 있으니까. 아빠 입장에선 조민기, 유동근, 이미숙의 연기도 훌륭하고 몇 주를 안 보다 봐도 이해할 수 있는 익숙한 이야기이니까. 엄마의 입장에선 그 둘이 그걸 보니까. 가끔식 너무 진부한 클리셰(cliche)가 우습기도 하지만, 그 촌스러움은 익숙한 것이기도 하니까.

말하자면, 그 시간은 주말 오후 혹은 메인 스포츠 이벤트와 케이블 하이라이트가 겹치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시간의 리모컨 쟁투가 벌어지는 때가 아니다. 가족이 제가끔의 이유들로 평화로운 합의와 조정에 이르는 시간이다. 기대했던 별스런 말들은 오가지는 않지만, TV는 나름의 역할을 해낸다. 그래서 생겨났다. 닥치고 본방 사수.

이제 시청률이란 잣대는 너무 낡고 지나치게 보편적이다. 그 잣대는 매우 새롭고 지나치게 특수한 한국인의 TV 시청 문화를 설명하기엔 너무 일방적인 기준이다. 우리에게 TV는 집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점하고 있는 값비싼 최첨단의 기계 장치이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위계와 권력의 대리물인 동시에 급격한 세대간 단절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물건이란 말이다.

TV를 시청하는 행태 역시 케이블의 보편화, 다시 보기의 일상화, 만연한 다운로드 등 너무 다양해졌다. 따라서 본방 ‘시청률’이라는 잣대의 보편성에 의존하여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이미 너무 제한적이다. 그렇게 복잡한 문화정치와 다양한 욕망의 실천으로 <에동>과 <그사세>의 시청률은 엇갈렸다. 여전히, <에동>은 성공했고 <그사세>는 실패했다고 할 텐가. 글쎄, 낡음을 쫒는 시대적 흐름에 안주하는 관습법스러움을 ‘실용’ 혹은 ‘경제 살리기’라고 하기도 하니 뭐 할 말은 없다만.

<덧붙임>

노희경 드라마의 독특한 위상과 의미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진 않으련다. 그건 이미 충분한 얘기이고 오히려 그 말들이 그녀의 드라마를 더욱 고립시키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한 마디만 보태자면, 노희경이란 ‘기호’(sign)의 현재적 의미이다. 노희경은 드라마도 질적 비평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각케하는 ‘기표’(signifier)이고, 좋은 드라마의 완성적 개념을 상상케하는 ‘기의’(signfied)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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