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선에 계시는 학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강의를 마치고 몇몇 선생님들과 말씀을 나누던 도중 낯익은, 하지만 예전과 다르게 많이 늙으신 남자 한 분이 인사를 건네시더군요. 누군지 기억나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는 찰나 갑자기 제 손을 꼭 잡으며 하시는 한마디.

“네가 참 자랑스럽구나.”

순간 그 남자분이 고등학교 때 선생님 중 한 분이란 것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제 이름을 기억하시는 선생님과 달리 저는 선생님 성함은커녕 담당 과목도 떠오르지 않더군요. 그렇게 멍해 있는 찰나 선생님은 조용히 강의실을 빠져나가셨습니다.

담임선생님도 아니셨고, 제 기억엔 직접 수업을 들은 기억도 별로 없는데 저를 기억하셨던 거죠. 저는 그 순간 선생님에겐 자랑스러운 제자인 동시에 감사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한 부끄러운 제자가 돼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선생님 성함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지요.

학생은 선생님을 잊어도 선생님은 학생을 잊지 못한다는 내용의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랜만에 충동적으로 선생님을 찾아간 주인공은 선생님이 너무나 자세하게 자신의 학창시절을 기억하는 걸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졸업 이후 자신은 물론 당시 제자였던 많은 이들의 소식을 꼼꼼하게 스크랩하고 있는 선생님을 보면서 어떻게 선생님은 그처럼 제자들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당황스러워 합니다.

▲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부당 중징계 처분'을 받은 초등학교 교사가 부당함을 호소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당황스럽기는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생님도 그저 사람일 뿐인데 그저 제자라고 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그러니까 제자는 선생님의 얼굴도 이름도 가물가물 다 잊어버리고 있음에도 기억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답은 엉뚱한 사건을 통해 찾게 되었습니다. 다름 아닌 해직을 당하신 7분의 선생님 덕이죠. 사실 답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질문 자체가 우문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애초에 선생님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이죠. 해직을 당하더라도 꼭 지켜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선생님인 거죠. 남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거죠. 일제고사 하루 안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지만 선생님 입장에선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닌 거죠. 왜냐구요? ‘선생님’이니까요.

자신을 거쳐간 제자의 삶은 자신이 가르친 삶이고 따라서 제자가 졸업했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졸업 후에라도 혹시나 제자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것이 바로 선생님일 테니까요. 누군가의 인생은 물건처럼 A/S할 수도, 반품을 할 수도, 환불을 받을 수도 없으니까요.

해직당하신 7분의 선생님도 같은 마음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옆 학우를 꺾어야만 살아남는 정글과도 같은 교육 현실에서 아이들의 삶이 굴곡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으셨겠죠. 그렇게 한 해 한 해 커가면서 웃음을 잃고 입시에 찌들어 가게 될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죄책감에 너무나 괴로울 테니까요. 아무리 현실이 그럴 수밖에 없으니 본인의 책임이 아니라고 합리화하려 애써도 마음 한켠에 저려오는 무언가는 외면할 수 없기에 일제고사라는 것에 아이들을 덜렁 두고 모른 척 뒤돌아설 수 없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을 붙잡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도 선생님이 조금씩 흐릿해질 거라는 생각에 안타깝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선생님은 아이들을 결코 잊지 않으시겠죠.

또 선생님을 응원하는 많은 사람들과 반대로 손가락질 하는 많은 사람들, 선생님을 해직한 사람들, 그런 선생님들을 침묵으로 지켜보는 많은 이들, 하여간 모든 이들이 다 잊어도 7분의 선생님들은 똘망똘망 쳐다보던 아이들의 눈길 하나하나를 언제까지나 기억하시겠죠.

제가 만든 지식채널e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편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루이스 칸’이란 편입니다. 건축가인 루이스 칸이 남긴 말이 마지막에 나오는데요, 그 말은 건축가에게 보다는 선생님에게 더욱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싶어 제가 약간 수정해서 마지막으로 남깁니다. 7분의 ‘선생님’들에게 글을 드릴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가르친다는 건 말이지
어떤 인생을 만들어내는 일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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