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두고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특유의 화법에 대한 조롱이나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을 미리 정해두고 답변했다는 부분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언론의 자유가 과연 있는지 의문이 드는 상황에서 이런 비판은 아주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그럼에도 박근혜 대통령이 일국의 대통령인 이상, 기자회견에 실린 메시지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지금 상황을 돌아보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13일 신년 기자회견 내용의 핵심은 ‘안보와 경제가 모두 비상상황’이라는 정세 규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안보와 관련해서 가장 큰 문제는 북한의 4차 핵실험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확성기 방송을 대표적으로 언급하며 강력한 제재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북한에 대한 강력한 제재 조치는 중국의 협력 없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과 이후 이어진 질의응답 과정에서 중국의 협력 여부가 무게감 있게 다뤄졌다.

그러나 중국이 대북 제재에 어느 수준까지 나설 것인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중국이 북한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영향력 발휘를 최소화함으로써 오히려 외교적 지렛대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 정권이 붕괴하기라도 하면 중국이 갖게 되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배증하기 때문에 중국 정부로서는 북한에 대한 최소한의 제재조치만 시행하자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특히 그간 동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이 미국·일본과 대립해왔고 이후 중국을 향한 미일의 압박이 거세져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북핵 제재와 관련한 국면이 자신들을 향한 위협으로 다가오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한일 위안부 협의가 타결되면서 한미일 삼각동맹의 부활이 목전에 다가왔다는 점은 이런 위협을 더 강화시킨다.

▲ 박근혜 대통령이 13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 브리핑룸에서 열린 대국민 담화 및 기자회견에서 다양한 액션으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에 대해서는 같은 날 오바마 미 대통령의 마지막 국정연설 내용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중국, 동유럽과 중동 등지에서의 러시아와의 패권 경쟁 등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여전히 세계 최강은 미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동맹국들에 대한 공격을 가만히 보고 있지만 않겠다는 말도 덧붙여졌다. 강대국들 간의 외교적 마찰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 반영된 부분이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그러면서도 북한 핵실험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언론은 이를 의도적 무시 전략으로 보고 있으나 보는 관점에 따라서 북한 핵문제를 대중압박용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함으로써 중국이 대북제재에 나설 수 있는 일정한 명분을 제공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어쨌든 박근혜 대통령 기자회견의 메시지는 이런 큰 틀 안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협상 결과에 대한 설명도 해석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고령이 돼가고 있고 일부가 사망한 상태에서 하루라도 빨리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고 주어진 외교적 여건 하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설명을 내놨다. 이는 일각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한미관계 개선을 위해 위안부 문제를 성급하고 무성의하게 해결했다는 비판을 최대한 피해갈 만한 답변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런 의도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협상 결과가 한미관계에 영향을 받았느냐는 조선일보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잘 짜인 무대에서 오간 질문과 답변의 와중에도 박근혜 대통령이 모든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답을 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사전 유출된 질의응답 시나리오에 조선일보는 위와 같은 내용의 질의를 하도록 정해져 있었는지는 애매하다. 쉽게 말하면 유출된 버전에 따라 다르다. 어쨌든 박근혜 대통령이 굳이 답변을 피해갔다는 걸 보면 부담스럽거나 준비가 되지 않은 질문으로 작용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유사한 현상은 한국일보 기자의 질문에서도 나타났다. ‘반기문 대망론’에 대한 질문에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느냐’는 식의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 사전에 정해놓은 대본(?)을 보면 한국일보 기자는 정치권의 개헌론에 대해 질문하도록 돼있다. 개헌에 대한 입장을 묻는 대목에서 ‘반기문 대망론’을 꺼낸 것은 다소 뜬금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개헌과 반기문 대망론은 연계돼있는 질문이다. 일부 언론이 ‘친박계발 개헌론’의 정체에 대해 ‘분권형 개헌을 통해 외치는 반기문 대통령이 책임지고 내치는 친박 총리가 맡는다’는 식의 해석을 덧붙인 바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질문에 박근혜 대통령이 “반기문 유엔총장은 뚜렷한 외교적 비전을 갖고 있으며 퇴임 이후에도 우리나라를 잘 이끌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는 식의 답변을 했다면 개헌론에 다시 불이 붙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박근혜 대통령은 ‘입장 없다’는 취지의 답변을 한 것이다.

이런 상황을 다시 조선일보의 질문에 적용할 수 있다. 조선일보는 그간 박근혜 정부가 한미일 삼각동맹의 의의를 과소평가하고 과도한 친중노선을 걸어왔다고 평가해왔다. 또, 조선일보는 그렇게 무리한 친중행보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실험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외교라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까지 내놓은 바 있다. 이런 맥락을 보면 조선일보가 위안부 협상에 미국의 입장이 영향을 얼마나 미쳤느냐고 묻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어떤 설명을 요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한미일 동맹을 어느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신앙고백(?)을 해달라는 취지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결국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들 하지만 나름대로는 국내정치적 측면에서 노림수들이 오고 간 정황 역시 찾아볼 수 있다는 결론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날 기자회견문에는 국내정치라는 차원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을 찾아볼 수 있다. 대통령이 이른바 노동개혁 5법에서 기간제법을 중장기적 과제로 놓고 나머지 4개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직접 국회에 제안한 것이다.

그간 노동개혁 5법과 관련해서는 기간제법과 파견법을 문제 삼는 야당과 5개 법안의 패키지 처리를 요구하는 여당의 구도로 상황이 교착돼왔다. 우리가 상상하는 국회의 일반적 문법은 여당이 청와대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야당과의 협상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결단을 해 기간제법을 제외한 나머지를 처리하는 것이다. 즉, 교과서적인 정치원리를 말하자면 여야 협상의 주도권은 어찌됐든 당이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양보’를 새누리당이 아닌 대통령이 함으로써 여전히 정국 주도권은 청와대가 갖고 있다는 게 드러났다. 김무성 대표는 대통령의 입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며 포기하는 게 아니라 추후에 계속 논의한다는 것이라면 거기에 맞게 협상을 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즉, 여당 대표는 청와대의 하수인에 불과한 것이다.

김무성 대표나 원유철 원내대표의 입장에선 어떤 불쾌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표출할 수 없는 처지일 수밖에 없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한 발만 잘못 나갔다가는 ‘배신의 정치’라는 철퇴가 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날도 박근혜 대통령은 진실한 사람이니 배신의 정치니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동안 해오던 얘기를 똑같이 했다.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할 수 있도록 당이 뒷받침해야 하고 그 결과에 대해 당청이 공동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박살(?)낼 때와 여전히 같은 인식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이날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는 한국 정치가 처한 내외의 문제적 상황들을 모두 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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