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머리가 좋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기억을 하지, 머리 나쁘면 이거 다 기억 못해요. 질문을 이렇게 한꺼번에 하시면…”

13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이 열렸다. 국민과의 소통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 온 박근혜 대통령이니만큼, 연초에 열리는 기자회견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향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늘 높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집권 1, 2년차에 열린 신년 기자회견은 ‘각본대로’ 이루어져 조롱의 대상이 됐다. 대통령이 발표할 내용을 미리 준비하는 것은 감안하더라도, 누가 질문할지와 어떤 질문을 할지 이미 조율을 마쳐놓고 현장에서 즉석 질문을 하는 것처럼 ‘꾸민’ 모습은 줄곧 비판을 받아 왔다.

여론을 의식한 듯, 청와대는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미리 짜여진 질문지에 답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장에서 즉석 질문을 받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정연국 대변인은 12일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질문과 내용을 알 수 없고 즉각 응답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같은 호언장담은 올해도 빗나갔다.

▲ 13일 오전 진행된 박근혜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 (사진=YTN 생중계 캡처)

13일 11시 1분께부터 시작된 질의응답에서는 북핵 실험 사실 모른 이유, 한미 간 정보 공유 상태, 대북제재 실효성 담보 방안, 북한에 대한 국제적인 제재 조치 하에서의 중국 참여 유도 방안, 위안부 협상을 한 이유, 소녀상 철거에 대한 입장, 위안부 피해자 만날 계획, 경제혁신 3개년 계획과 창조경제 기조로 현재의 경제위기 극복 가능한지, 노사정 파기에 대한 입장, 독자적 노동개혁 추진 의사, 3.1% 경제성장률 가능 여부, 내수 진작 방안, 미뤄지는 법안 처리 복안, 직권상정 필요성, ‘진실한 사람’ 의미, 수직적 당청관계 지적, 누리과정 갈등, 서울시-성남시의 복지 정책에 관한 견해, 국정교과서 진행할지, 대야관계 설정, 외교안보라인 문책론, 국회선진화법 견해, 일본이 위안부 합의 어길 경우 조치, 개성공단 출입 조치 제한, 북에 대한 단독 제제조치 있는지 여부, 부패 척결 사정 드라이브, 규제 프리존 도입 문제 등의 내용이 다뤄졌다.

하지만 이미 SNS 상에는 어떤 매체 어떤 기자가 무슨 질문을 하는지 질문 순서와 내용이 정리된 내용이 돌고 있었다. 서울신문-KBS-조선일보-이데일리-헤럴드경제-경상일보-OBS-뉴데일리-한국일보-평화방송-일본 마이니치신문-대전일보 기자들은 어긋남 없이 제 순서에 질문을 했고, 질문 내용도 사전 공개된 것과 대부분 일치했다. 마지막 대전일보 기자 질문에 대한 답을 끝내자마자, 사회자인 정연국 대변인은 “오늘 질문은 여기까지 받겠다. 대국민 담화 및 기자회견을 모두 마치도록 하겠다”며 서둘러 기자회견을 종료했다. 질문이 예고된 13개 매체 이외의 다른 매체에게는 질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각본이 100% 실행되진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는 당초 적힌 내용과 달리 ‘독도’ 언급을 빼고, ‘반기문 대망론’을 언급했다. 위안부 관련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이 위안부 합의를 어길 경우 어떻게 할지’가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날 계획이 있는지’로 수정됐으며 예비 질문이었던 ‘개헌론’이 본 질문으로 바뀌었다. 평화방송 기자도 질문지에 있던 ‘5·24 조치’와 ‘한반도 프로세스’를 거론하지 않고 내용을 조금 바꿔 질문했다. 한편, 질문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던 마이니치신문은 위안부 합의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은 가운데 향후 설득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한일 양국 경제협력 강화 방안이 무엇인지, 한일 정상회담을 어떻게 전망하는지 등을 물었다.

“머리 나쁘면 이거 다 기억 못해요, 질문을 이렇게 한꺼번에 하시면…”

이 같은 상황에서도 청와대는 질의응답의 ‘현장성’을 강조하기 위해 애를 썼다. 질문자와 내용이 정해져 있음에도 정연국 대변인은 매번 “다음 질문 받겠습니다. 질문하실 분들은 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고, 여러 명의 기자들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정연국 대변인은 마치 질문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은 듯, “손을 들었다 지목받지 못했다”는 점을 굳이 언급하며 JTBC 기자에게 질문 기회를 주기도 했다.

나온 질문에 대한 답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정연국 대변인이 다른 질문을 받자, 박근혜 대통령이 이를 끊고 계속 답변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때 박근혜 대통령은 “제가 머리가 좋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기억을 하지, 머리 나쁘면 이거 다 기억 못해요. 질문을 이렇게 한꺼번에 하시면…”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19대 국회 임기가 5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경제활성화 주요 법안이 줄줄이 좌초해 있다며 묘안을 묻는 경상일보 기자의 질문에 박근혜 대통령은 역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답을 안 하시겠지만 질문을 수십 개 받았으니까 저도 한 개 정도는 질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과 행정부가 더 이상 어떻게 해야겠느냐 질문 드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 13일 오전 진행된 박근혜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 (사진=YTN 생중계 캡처)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이따금 웃음이 터졌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높은 지지율을 얻는 것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한 번 여론조사를 해서 왜 (반기문 후보에) 찬성하느냐고 물어보시죠, 그게 제일 정확할 것 같습니다”고 했을 때, 규제프리존 특별법에 대한 질문에 한숨을 쉬며 “지금 같은 국회에서 어느 세월에 되겠느냐”고 반문했을 때 회견장은 금세 웃음바다가 되었다.

노종면 YTN 해직기자는 기자회견 시작 전부터 자신의 페이스북에 질문 매체와 내용을 앞서 올렸고, ‘대통령 각본 회견’이라고 비판했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올린 글에서는 “유출된 각본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해 세 가지 문제를 보고 말았다”며 △“머리가 좋으니까 기억을 하지”라는 대통령의 농담 △정연국 대변인의 진행 방식 △순서가 있음에도 사회자의 말에 여러 기자가 손을 들어 ‘연기’에 동참한 것 아니냐는 의혹 등을 짚었다.

비영리 독립언론 뉴스타파의 최기훈 기자 역시 “그냥 기존 청와대 관습대로 짜놓고 하면 그렇게 하는 게 효율적이라서 그렇다고 인정하고 양해를 구하면 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처럼 포장을 하고 거짓말을 한다. 즉문즉답인데 왜 아래쪽을 자꾸 쳐다보나”라며 “질문 순서와 질문 내용도 미리 다 나와 있다. 작년, 재작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꼬집었다. “머리가 좋아서 다 기억을 한다”는 대통령 농담에 대해서도 “질문 내용 미리 알고 있고 답변도 써놓고 읽고 있으면서 이 무슨 촌스러운 연출인가”라고 일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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