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반대말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녹색동물’이라는 제목부터 이상하다고 여기셨을 수도 있습니다. 동물의 반대말을 식물로 보는 사람들이 많고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식물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식물과 동물이 전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갖고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움직임’을 포착할 수 없을 때, 움직이지 않아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때 흔히 ‘식물’이라는 비유를 쓴다. 여야 대치로 법안 처리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국회는 ‘식물 국회’로 불리고, 의식을 잃고 운동기능을 상실한 환자가 ‘식물인간’으로 불리는 식이다. 하지만 식물도 여러 가지 욕구를 가지고 있고, 이를 이루기 위해 동물처럼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식물이 가진 ‘동물성’에 초점을 맞춘 다큐멘터리가 찾아온다. 오는 18일부터 3부작으로 방송되는 EBS <녹색동물>(연출/각본 손승우, 촬영 조규백·정근래·김태봉)은 2년 동안 5대양 6대주를 돌며 결코 ‘정적이지 않은’ 식물의 일대기를 담아냈다. “왜 식물이 동물인지를 증명해 내는 과정”이 <녹색동물>에서 펼쳐진다.

▲ EBS <녹색동물>의 손승우 PD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는 모습 ⓒ미디어스

손승우 PD는 “동물이 가지고 있는 생존 욕구를 똑같이 가지고 있고 성장한 후에는 짝짓기를 하며 새끼를 낳은 이후에는 양육을 하는데 식물들이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또, 식물은 매우 느리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분명히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기 때문에 정적인 존재라고 생각해 온 것 같다. (이 다큐는) 인간의 시간대가 아닌 식물의 시간대로 돌아가서 식물이 얼마나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가를 살폈다”고 말했다.

식물에 물을 줄 때를 모든 것을 다 잊을 수 있어 평온하고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던 손승우 PD는 이렇게 일상 속에서 우연히 ‘식물’이라는 아이템에 접근했다. 물론 예상치 못했던 식물의 ‘동물성’을 큰 줄기로 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관련학과 교수들, 국립수목원 관계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방향을 잡았다. 비인기 아이템이어서 작품을 찾기조차 쉽지 않은 점은 오히려 기회가 됐다. 약 20여년 전 제작된 BBC <식물의 사생활> 이후 식물을 전문적으로 다룬 인상적인 작품은 꼽기 힘들 정도다.

손승우 PD는 “식물을 다룬 자연 다큐는 지금까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만큼 사람들은 동물적인 걸 좋아한다는 것이다. 기존 다큐가 동물의 동물적인 모습만을 보여준다면, 이번 프로그램은 식물이 등장하고 식물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동물도 출연한다. 한 편 한 편씩 분절된 구조가 아니라 짝짓기-번식-굶주림의 순환을 담아 식물의 ‘일대기’를 조망할 수 있게 구성했다.

<녹색동물>에 나오는 50여 종의 식물은 그간 가지고 있던 편견을 금세 깨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1부 <짝짓기>는 다양한 짝짓기 방법을 통해 성욕을 해결하는 식물들이 나온다. 악취를 풍기고 스스로 체온을 높여 파리를 유혹하는 3m 크기의 ‘타이탄 아룸’, 말벌의 암컷과 똑같이 생겨 수벌을 유혹하는 ‘해머 오키드’, 벌을 함정에 가두는 ‘광릉요강꽃’ 등 직접 짝을 찾아 나설 수 없는 식물들이 짝짓기를 위해 수분 매개자를 유혹하는 모습이 담겼다.

2부 <번식>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생명체보다 ‘자손 번식’의 욕구가 강한 식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스스로 땅 속을 드릴처럼 파고드는 ‘국화쥐손이’, 200도 이상의 환경에 씨앗을 내놓기 위해 산불 속에서도 살아남는 ‘자이언트 세콰이어’, 3500km를 여행하는 모감주 씨앗 등 지구의 유일한 생산자인 식물이 ‘자손번식’이란 욕구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공개한다.

3부 <굶주림>은 보석 사이, 전깃줄 위 등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남는 식물들의 놀라운 생존 전략을 조명했다. 냄새를 맡아 사냥하는 기생식물 ‘실새삼’, 동물의 배설물을 영양분으로 쓰기 위해 변기의 모습으로 진화한 ‘네펜데스 로위’, 햇빛을 사냥하기 위해 스스로 잎에 구멍을 내는 ‘라피도포라’의 모습이 시선을 빼앗는다.

▲ EBS 4K UHD 다큐멘터리 <녹색동물>은 오는 18~20일 3일 간 오후 9시 50분 EBS1 채널에서 방송된다. 사진은 나무 두더지가 네펜데스 로위에 올라가 용변을 보고 있는 모습 (사진=EBS)

3부에 등장하는 네펜데스 로위 장면은 촬영하는 데에만 3개월이 걸렸다. 동물들의 변기 역할을 하는 네펜데스 로위 자체를 찍은 작품은 있었으나, 실제로 나무 두더지가 네펜데스 로위에서 용변을 보는 장면을 찍은 것은 <녹색동물>이 처음이었다. 해발 2700m에 이르러서야 찍을 수 있는 장면이라 오가는 데에만 수 일이 걸렸지만, 손승우 PD는 가장 기억에 남는 촬영으로 네펜데스 로위를 꼽았다. 거머리에 물려가며 고생을 했지만 정작 촬영은 2시간 만에 끝났다는 후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꽃이라고 알려진 타이탄아룸(시체꽃)을 찍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3m 길이의 꽃을 부감샷(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촬영한 것)기 위해 오두막까지 만들어야 했다. 손승우 PD는 “모든 자연 다큐가 다 쉽지 않게 촬영하는 걸로 알고 있다. 저희만 어려운 일을 겪었다기보다, (촬영을 돕기 위해) 오두막을 지어줬던 현지 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손승우 PD는 무엇보다 ‘식물의 동물성’이 ‘이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식물들도) 목적 없이 허투루 움직이지 않는다. 아주 사소하게 볼 수 있는 민들레도 마찬가지다. 지고 나면 꽃이 쓰러지는데 씨앗을 더 잘 퍼뜨리기 위해 다시 일어선다. 바닥에 있으면 바람이 잘 안 불어 씨앗이 잘 퍼지기 힘드니까.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저는 이런 것들을 통해 식물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유를 읽을 수 있었다”며 “동물적인 식물이 대다수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깨는 게 저희의 목표”라고 강조했다.

2014년 2월에 시작해 제작기간만 2년에 달하는 <녹색동물>은 한국, 미국, 호주, 인도,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베네수엘라 등 13번의 해외 촬영을 거쳤고, 4K UHD로 제작됐다. 미래창조과학부의 ‘UHD 콘텐츠사업 지원’에서 2등을 수상해 제작비를 지원받았다. 내레이션은 뮤지컬 배우 정성화 씨가 맡았다. <녹색동물>은 오는 18~20일 오후 9시 50분 EBS1 채널에서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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