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이즈음의 일이다. 오후에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분이 쭈빗거리며 사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왔다. 구석진 곳에 있는 나를 발견하지 못한 그 분은 제일 눈에 띄는 자리에 앉은 한 직원에게 다가가 어렵게 말을 붙인다.

“저~”
“네, 무슨 일이세요?”
“애청자인데요, 원음방송 수첩 좀 얻으려고 하는데요~”
“수첩이 없는데요…….”

12월 초부터 배포되기 시작한 수첩은 12월 중순, 이미 교단 각 기관과 관계 기관 등 수요에 따라 발송이 마무리된 상태였다. 우리 방송사의 수첩은 사이즈가 A4 절반 정도의 크기로 제작되어 특히 출장이 잦은 공무원이나 자영업자에게 인기다. 멀리 정읍에서 왔다며 몇 번을 사정하는데, 직원 입장에서도 없는 수첩이 어디서 자동판매기처럼 튀어나올 리도 만무하다. 아무 연고도 없이 오직 수첩 하나 얻으려고 방송국 문을 어렵게 밀고 들어선 그 분이 얼마나 민망하고 난감할지, 사무실 건너편에서 그 상황을 지켜본 내가 무렴할 지경이다. 책상 한 켠을 살펴보니 마침 내 몫의 수첩이 딱 1권 남아있다. 사무실을 막 나가려는 그 분을 불러 세웠다.

“멀리서 오셨는데, 수첩이 여유가 없어 죄송합니다. 제 거라도 드릴게요.” 정중하게 나를 소개하고 명함과 더불어 수첩을 공손하게 전해드렸다. 의외의 상황에 그 분의 얼굴이 활짝 펴진다. 수첩을 얻어서가 아니라 구겨져 손상된 마음이 복구되는 것 같다. 나는 안다.

잠시 후 그 분으로부터 ‘수첩을 어렵게 구해주신 거 잘 아는데,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사업하는 형님이 이런 수첩이 꼭 필요하다고 하신다. 1권만 더 구해주실 수 있겠느냐’며 전화가 왔다. 이 전화 또한 얼마나 어렵게 했는지 잘 안다. 다른 직원들한테 수소문해서 1권을 더 구해 우편으로 보내드렸다. 며칠 뒤 그 분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정읍…입니다…수첩…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해 끝맺음 잘 하시고 좋은 일만…” 유난히 말 줄임표가 많은 그분의 문자에서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그 분의 자존심을 지켜드릴 수 있어서.

올해 내 몫으로 배포된 수첩을 보니 지난해 그 ‘애청자’가 생각났다. 혹시 몰라서 1권을 남겨두었더니 어느 날 문자가 왔다. “김사은…PD님, 안녕하세요… 작년에 주신 수첩…너무 감사하게 잘 썼는데 이번에 가능할지요”

“네~ 정읍에 계신 분이죠? 기억하고 있습니다. 수첩 남겨뒀는데 어떻게 전해드릴까요?” 답 문자를 보냈더니 올해도 역시나 중국에서 사업하는 형님 몫까지 2권을 부탁한단다.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며칠이 지났다. 군산항에서 물건을 선적하고 방송국에 들르시겠다고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형님’도 함께 모시고 가겠다고. 회의가 늦어져 약속시간보다 무려 삼십분이나 늦게 사무실에 왔더니, 지난해 쭈빗거리며 불편해하던 모습과는 달리 ‘편안하고 당당하게’ 앉아서 기다리고 계신다. 1년 만에 만나 반가웠고 내 집처럼 편안하게 앉아 기다려주셔서 고마웠다. 중국 석도에서 호텔을 경영한다는 ‘형님’이 우리 프로그램에 호텔 숙박권을 협찬하시겠단다. ‘호텔 숙박권만 갖고는 안되니까 군산에서 석도까지 왕복 선박이용권도 알아보겠다’고 자진해서 말씀하신다. 요즘같이 경기가 어려운 때, 큰 기대는 안 하지만 뭔가 보탬을 주려고 애쓰는 마음이 고맙다. 오직 수첩하나 구해드린 인연으로…….

시내버스 운전기사인 애청자 A씨와 B씨는 고향 선후배 사이로 띠동갑이지만 형제처럼 지낸다. 문자로 하루 일과를 꼬박꼬박 보고(?)하는 그 분들과 함께 하다보니 일상사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 가을 A씨가 역시 문자로, 휴무일에 아내와 함께 손자를 돌보며 곶감을 만들고 있다며 곶감이 잘 만들어지면 방송국에 들르겠다고 했다. 통상적인 멘트이겠거니 했는데 며칠 전, 방송 중에 두 분의 남자가 스튜디오 밖에 계셨다. 바로 그 A씨와 B씨였다. 잘 익은 곶감을 한 소쿠리 싸가지고 오셨다. 이틀 전 두 분이 함께 방송국에 방문하기로 했는데 B씨가 약속을 펑크 내, A씨가 손자와 함께 방송국 주변을 두어 번 서성이다가 결국 방송국에 들르지 못하고 되돌아갔단다. 그냥 방송국에 들어오지 그러셨냐고 말하니까 A씨가 순박하게 웃으며 답한다.

“아이구~ 함부로 올 수 있는 데가 아니잖여요.”

▲ 애청자 A씨와 B씨가 가져온 잘 익은 곶감 한 소쿠리
곶감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삼백여개의 감을 깎으며 처마 밑에 매달아두고 벌레, 파리 들어갈까 모기장으로 겹겹이 보호 장막을 두른 채 곶감을 만들었던 A씨 내외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우체부 아저씨, 택배직원, 야쿠르트 아줌마, 동네 사람들이 오다 가다 “아따~ 그 곶감 참말로 맛있겄네요 잉~” 하면서 입맛을 다시면 “맛있게 생긴 놈으로 따 잡숴요~”라고 말하는 내외의 모습도 선하다. 그 중에 크고 모양새 좋은 것을 골라 정성스럽게 소쿠리에 담아주는 A씨 아내의 모습도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렇게 푸른 소쿠리에 담은 곶감을 용기가 없어 ‘방송국 문턱’을 넘지 못하고 주변만 두어번 뱅뱅 돌다가 되돌아간 A씨의 쓸쓸한 뒷모습도 눈에 그려진다.

다행히 B씨가 약속을 지켜 두 분이 방송국을 방문함으로써 A씨의 아쉬움은 해소되었으리라. 작은 규모이지만 방송국 견학도 하고 직접 녹음도 했다. 방송국 직원들이 가는 원불교 중앙총부 식당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문턱을 넘어 가져온 곶감이 너무나 달고 맛있었다.

남의 사무실 문을 쑥 열고 들어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방송국 문턱 넘기는 더욱 더 힘든 것 같다. 나에게도 넘기 어려운 문턱이 있다. 여전히 권위적인 중앙의 문턱, 지역 차별과 성 편견의 문턱, 역사가 일천한 지역 종교방송의 PD로서 넘어야 할 문턱은 끝이 없다. 애초부터 문턱을 만들지 않고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지면 좋을 텐데, 높이만 다를 뿐 어느 곳이나 문턱은 있다. 어느 문턱은 자력으로, 어느 문턱은 저 편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쉽게 넘을 수 있다. 나의 손을 잡아 문턱을 넘게 도와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 덕에 ‘소통’이 쉽게 된다. 넘지 못한 문턱은 좀더 용기를 내어 도전해 봐야겠지.

오늘도 우리 방송사 주변을 맴도는 사람은 없는지, 사무실 문을 열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은 없는지,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을지 몰라 귀를 쫑긋 세워본다.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최근 전북여류문학회장을 맡았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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