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이 저물어 가고 있다. 올해의 방송 환경과 여기서 만들어진 콘텐츠들의 상황을 돌아보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대목 보다는 절망을 말할 수 밖에 없는 대목이 훨씬 많다. 그러나 진흙 속에 진주가 있는 법, 이 와중에도 어쨌든 꿋꿋히 자리 자기를 지켜 나가며 한 발을 앞으로 내딛은 프로그램들이 우리를 기쁘게 해준 것도 사실이다. 시사교양, 예능, 드라마 프로그램의 2015년을 점검하고 올해를 빛낸 콘텐츠를 꼽아보았다.

△ 시사교양 : ‘고사’ 직전 침체 속 유일하게 빛난 <그것이 알고 싶다>

“지상파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사정도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MB 정권 때부터 이어져 온 ‘불편한 아이템 피하기’나 ‘권력 견제·감시 내용에 대한 탄압’은 계속됐다” 2015년의 시사교양 프로그램들에게는 2년 전 방송 결산에서 쓴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줄 수밖에 없었다. 빛난 콘텐츠보다는 빛바랜 콘텐츠들을 먼저 소개해야 할 판이다.

공영방송 KBS의 상황이 특히 나빴다. KBS 탐사보도팀이 ‘훈장을 통해 본 대한민국 70년 역사’를 주제로 정부에 정보공개 청구소송까지 하며 오랜 시간 준비한 대기획 <훈장> 2부작은 반년째 방송날짜를 잡지 못하고 있다. 친일 행적자와 일본인들에게 훈장이 가장 많이 수여됐던 시기가 이승만-박정희 정부 때여서 ‘민감하다’는 이유로 방송이 기약 없이 미뤄지는 것 아니냐는 의혹 제기에 KBS는 면밀한 데스킹이 필요한 사안이라며 불방 논란을 일축했다. 그러나 KBS가 이후 인사에서 제작진을 타 부서로 전보하고 불방 사태를 논의하려 했던 공정방송위원회를 번번이 거부한데다, 간부들이 삭제를 요구한 내용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에게 보낸 편지라는 점 등이 드러나면서 ‘정권 눈치 보기’라는 비판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시청률로 충격을 준 프로그램도 있다. 1983년 첫 방송을 시작한 시사 프로그램의 원조 KBS <추적60분>이 그 주인공이다. 시청률 집계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지난 6월 3일 방송된 <추적60분> ‘산업스파이, 창과 방패의 전쟁’ 편은 전국 기준 시청률 1.1%를 기록했다. ‘누가 거짓을 말하나-별장 성접대 의혹의 진실’(1월 10일), ‘원전과의 불편한 동거’(3월 21일), ‘세월호 실종자 가족, 멈춰버린 1년’(4월 11일), ‘부당해고, 멀고 먼 복직’(7월 15일), ‘불평등 육아의 경고, 2020 인구절벽’(10월 28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일자리, 간접고용’(11월 18일) 등 올해 의미 있는 기획을 선보였지만 시청률은 여전히 2~3%대에 그치고 있다. 천안함, 국정원의 간첩조작 사건 등 정권이 불편해 할 만한 방송이 매번 불방 위기를 겪은 점, 2013년부터 이루어진 잦은 시간대 변경 등 ‘외적 요인’ 등이 겹쳐 시청자들의 관심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MBC도 시사교양 부문에서 맥을 못 추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재철 전 사장 당시 MBC 시사교양국이 시사제작국, 교양제작국으로 분리됐다. 이후, 안광한 사장은 지난해 반쪽이 된 교양제작국을 없앴다. 그 여파로 <불만제로> 등 교양 프로그램이 종영했다. 올해로 황우석 줄기세포 논문 조작 특종 10주년을 맞은, 한때 PD저널리즘의 대명사로 불렸던 <PD수첩>은 예전처럼 위력적인 보도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여성 혐오’를 다룬 ‘그 남자, 왜 그녀에게 등을 돌렸나’(8월 4일) 편은 피해자이자 당사자인 여성의 입장을 반영하기보다는, 여성혐오에 나선 남성들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전반적인 침체기 속에서 존재감을 과시한 프로그램은 단연 SBS <그것이 알고 싶다>였다. 지난 9월 5일 1000회를 맞은 <그것이 알고 싶다>는 충성스런 고정 팬을 확보하며 토요일 밤의 가장 핫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1000회 특집으로 방송된 ‘대한민국의 정의를 묻다’(9월 5일)는 교도소 안에서조차 ‘회장님’으로 군림한 특권층의 속살을 파헤쳐 큰 반향을 일으켰고, 미군부대 내 집창촌인 몽키하우스의 인권유린 실태를 조명한 ‘몽키하우스와 비밀의 방’(11월 7일)도 방송 후 파장이 컸다. 여성을 심신미약 상태로 만들어 강간하거나 몰카를 찍는 등 각종 범죄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 문제적 사이트 소라넷을 정면으로 다룬 ‘위험한 초대남, 소라넷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12월 26일) 또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다소 자극적인 미제 사건에 치우친다는 지적은 여전히 나오고 있으나, ‘세모자 성폭행 사건’, ‘형제복지원’,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이태원 살인사건’, ‘조희팔 죽음 미스터리’ 등 지상파 3사 중 시사적인 이슈를 가장 많이 다뤘다는 점은 평가할 만한 지점이다. ‘내일만 사는 그알 PD’라는 농담이 유행어가 될 만큼 민감한 소재를 흡입력 있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전달하는 <그것이 알고 싶다>는 깊은 신뢰와 지지를 보내는 시청자들의 피드백 속에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

△ 예능 : <마이 리틀 텔레비전>, <신서유기> 등 틀 깬 신선한 예능 승승장구

2015년은 예능 부문에서 ‘히트작’이 쏟아져 나왔다. 기존 TV 프로그램의 틀에서 벗어난 참신함으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하 <마리텔>)이 대표적이다. ‘콘텐츠가 있는 출연자’가 진행하는 개인 인터넷 방송을 뼈대로 하는 <마리텔>은 시청자들의 참여도를 극대화하고, 인터넷 방송의 묘미를 살린 기발한 CG와 재미난 자막으로 ‘약빤’(기가 막히게 재미있거나 참신한 것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이는 신조어) 방송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백종원, 이은결, 김영만 등 출연자뿐 아니라 방송 ‘보조’를 위해 등장한 스태프들까지 ‘기미 작가’, ‘모르모트 PD’ 등의 애칭으로 불리며 사랑받고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위원장 박효종, 이하 방통심의위)는 ‘바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리텔>을 심의해 자막을 ‘순화’시켰으나, 새로운 형식의 프로그램을 이해 못하는 ‘꼰대짓’이라며 네티즌들에게 도리어 역풍을 맞기도 했다.

▲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한때 3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해 ‘국민 예능’으로 불리다 부진의 늪에 빠져 폐지설까지 돌았던 KBS <1박 2일>은 재기에 성공했다. 시즌1에서 깜짝 몰래카메라로 호되게 당했던 ‘신입 PD’ 유호진 PD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편안하고 기분 좋은 <1박 2일>을 만들어 냈다. 여행과 게임이라는 틀은 유지하되 영리한 기획으로 신선함과 재미를 동시에 선사했다. ‘니코틴 패스’라는 말을 만들어 낸 금연 여행이나 국보 전국 일주를 예로 들 수 있다. 김주혁, 김준호, 차태현, 김종민, 데프콘, 정준영은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면서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케미스트리로 ‘이멤버 리멤버 포에버’(6명의 멤버 구성이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말)라는 말을 탄생시켰다.

<꽃보다> 시리즈, <삼시세끼> 등을 연달아 성공시킨 나영석 PD는 ‘웹 예능’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였다. 열광적인 반응에 힘입어 1주 연장한 <신서유기>는 강호동, 은지원, 이수근, 이승기가 4박 5일 동안 중국 시안에서 7개의 드래곤볼을 찾는 유랑기를 담았다. 인터넷방송과 외국어에 약해 쩔쩔 매는 강호동, 물 만난 고기처럼 ‘비방용 언어’(방송에 나오지 못하는 수위의 말)를 거침없이 내뱉는 이승기 등 개성 넘치는 캐릭터 등장, 과거 KBS <1박 2일>에서 호흡을 맞추다 재회한 멤버들이 만들어 내는 케미스트리, 정제되지 않는 날 것 느낌의 연출과 편집이 어우러져 재미를 선사했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소재를 비교적 단순한 구성과 자막 아래 5~10분 분량으로 제공한 것은 철저히 ‘모바일 최적화’를 지향한 시도였고, 결국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리얼 버라이어티의 원조이자 MBC 예능의 대표주자인 <무한도전>은 올해도 여전히 활약했다. 2년마다 돌아오는 가요제는 어느 때보다 많은 관심 속에 치러져 또 다시 음원차트를 제패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인들이 끌려갔던 탄광이 있는 하시마 섬에서 지나간 역사를 되짚었던 ‘배달의 무도-하시마 섬의 비밀’은 국제앰네스티 언론 특별상을 받아 <무도>가 ‘예능 그 이상의 예능’임을 재확인했다. 불미스런 일로 인한 멤버 교체를 새로운 ‘놀이’로 탈바꿈시킨 ‘식스맨 프로젝트’도 큰 화제를 모았다.

노래를 전면에 내세운 음악 예능도 재미를 봤다. 복면을 쓴 사람들의 ‘노래쇼’ MBC <복면가왕>은 매주 ‘이 사람은 누굴까?’ 하고 예측하는 재미를 주며 순항하고 있다. 온전히 노래에 집중하게 만드는 컨셉은 수많은 사람들을 ‘재발견’하게 했다. 국민 MC 유재석의 첫 종편 프로그램 JTBC <슈가맨을 찾아서>는 시간이 흘러도 계속 기억되는 좋은 곡들과 ‘그때 그 가수들’을 조명하고 지금의 눈높이로 ‘다시 부르게’ 하는 예능이다. 파일럿 당시 보였던 미숙함은 온데간데없고 점차 안정적인 음악 예능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중이다. 단지 축구를 하고 싶었던 꿈 많은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스포츠 예능 KBS <청춘FC>도 재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호감형 예능’ 중 하나다. 감성팔이 대신 정공법을 택해 선수와 경기에 오롯이 집중하게 한 <청춘FC>는 4개월 간 시청자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전했다.

△ 드라마 : <풍문으로 들었소>, <앵그리맘>, <송곳>… ‘사회’를 말한 드라마들

올해는 유독 사회상을 반영한 드라마가 많이 나왔다. 권력층의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에 주목해 온 SBS는 대한민국 0.1%에 속하는 ‘갑’의 세계의 들어간 ‘을’의 이야기를 담은 <풍문으로 들었소>를 방송했다. 누구보다 고고하고 우아(한 척)하지만 뒤틀린 욕망으로 가득한 상위층을 맛깔스럽게 풍자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SBS <마을>은 성폭행을 당해 낳은 딸을 ‘괴물’이라며 버린 친모와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입양된 언니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동생을 등장시켜 혈연에 의한 정상가족 판타지를 깨 주목받았다. 또 외부인들에게 배타적인 ‘아치아라 마을’에서는 수많은 범죄가 일어나도 피해자만 고통 받을 뿐 결코 ‘거대악’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줘 지금의 사회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정치’와 ‘노동운동’을 주제로 한 무게감 있는 드라마도 등장했다. 경남 해안가 경제시의 (주)한국수리조선소 용접공 출신인 진상필이 국회의원에 출마해 ‘정치’에 눈을 떠가는 과정을 그린 KBS <어셈블리>는 <정도전>으로 정치 사극의 진수를 보여준 정현민 작가의 차기작이어서 방송 전부터 화제가 됐다. 끝내 노동자들의 편에 서 있지 않았던 법원의 최종 판결, 노조 활동을 방해하는 행정대집행, 해고노동자가 국회의원에 출마한다는 설정 등 쌍용차 노동자들을 연상케 하는 각종 장치들은 드라마에 현실감을 불어넣었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 평점 9.96점을 받으며 절찬리에 연재된 웹툰을 원작으로 한 <송곳>은, ‘무노조 경영’을 원칙으로 삼는 삼성과 특수관계에 있는 JTBC에서 방송된다는 것만으로 관심을 모았다. 정부여당 대표가 ‘불법파업을 벌이는 강성 노조의 쇠파이프 때문에 GDP 3만 달러를 못 넘겼다’는 틀린 주장을 당당하게 하고 정부가 노동자를 옥죄는 ‘노동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시국이어서인지, ‘본격 노동운동 입문기’를 표방한 <송곳>의 존재는 더 특별했다.

▲ JTBC <송곳>

학교폭력 문제를 다룬 학원물도 화제를 모았다. MBC <앵그리맘>은 엄마가 고등학생으로 위장해 딸이 겪는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한다는 다소 판타지적인 설정에서 시작했으나,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정부를 비추고 정경유착 속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부정부패와 ‘기레기’(기자+쓰레기)로 대변되는 언론 문제를 꼬집는 드라마였다. 특히 극중 배경인 명성고등학교의 별관 붕괴 사고는 마치 모든 국가시스템이 멈춰버린 듯했던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해 이목을 끌었다. KBS <후아유-학교 2015> 역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해 자살을 시도하는 고등학생을 등장시켜 현재 진행형인 학교폭력 문제를 환기시켰다.

본편보다 나은 속편 없다는 속설을 비웃기라도 하듯 연일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는 tvN <응답하라 1988>도 빼 놓을 수 없는 ‘올해의 드라마’다. <응답하라 1988>은 아직 따뜻한 정이 있었던 골목길을 배경으로 한 가족극을 표방함으로써 아름다운 추억에 기댄 과거회귀적 성격이 더 짙어졌다. 가부장적인 아버지-희생적인 어머니상을 강조하는 묘사, 한 편의 유기적인 드라마라기보다는 이야기 흐름이 뚝뚝 끊기는 전개 등으로 비판의 목소리 또한 높지만 류준열, 혜리, 고경표, 박보검, 이동휘, 안재홍, 류혜영 등 신선한 얼굴들을 골라내는 능력, 드라마에 예능적 요소를 가미하는 센스는 여전하다. 물론 시청자들은 이번에도 열광적으로 ‘응답’하고 있다. 지난 25일 방송된 15화 ‘사랑과 우정 사이’는 평균 시청률 16.3%, 최고 시청률 18.3%(닐슨코리아/유료플랫폼 가구/전국 기준)라는 신기록을 썼다.

올해는 예능뿐 아니라 드라마 쪽에서도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다. KBS는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을 총동원해 <프로듀사>라는 금요 드라마를 탄생시켰다. 예능과 드라마의 혼합, 12부작이라는 다소 짧은 회수 등은 이미 시도된 것들이었지만 그게 지상파의 맏형이자 공영방송인 KBS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분명 ‘주목’할만한 것이었다. 차태현, 공효진, 김수현, 아이유를 주인공으로 해 <별에서 온 그대>의 박지은 작가와 <개그콘서트>를 지휘했던 서수민 CP가 만든 <프로듀사>는 10%대의 시청률을 기록해 ‘중박’은 쳤다. 네이버 TV캐스트에서 방송돼 누적 조회수 600만을 돌파한 MBC <퐁당퐁당 LOVE>는 웹 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조선시대 왕과 고3 여고생의 사랑 이야기라는 소재, 비를 매개로 장영실, 측우기 등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결합한 몰입도 있는 대본, 탄탄한 연기, 드라마 곳곳에 심어 놓은 복선을 빠짐없이 회수하는 연출 등이 고루 어우러져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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