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귀족노조’는 민주노총을 일컫는 전형적인 수사가 되었다. 이 단어는 지난 5일 2차 민중총궐기 집회 주변에서도 나왔다. 보수단체의 ‘맞불집회’에서 “연봉 6천 받는 고액노동자들”이란 표현과 짝을 맞춰 등장한 것이다. 이 고약한 말은 8일 동아일보의 지면에서도 얼굴을 드러냈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조계사 은신에 대해 “전체 근로자의 3%에 불과한 귀족노조 민노총이 불교를 ‘인질’ 삼아 국민 전체에 영향을 미칠 노동법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처리하도록 압박하는 것도 법치를 조롱하는 일과 다름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 동아일보 8일자 사설

한상균 위원장의 거취를 문제 삼는 건 동아일보 뿐만이 아니다. 전통의 조선일보 역시 점잖은 척 조계종을 타이르고 있다. 군사정권 시절에야 종교가 ‘양심범’들의 피난처였을지 몰라도 이제는 민주화가 된지 20년이 넘었는데, 더 이상 불교계가 민주노총 위원장을 숨겨줄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조선일보는 “(한상균 위원장은) 기득권 노조들이 주축이 된 민노총을 이끌며 ‘나라를 마비시키겠다’면서 폭력 시위를 이끌고 부추겨온 범법자”라며 앞서의 전형적 수사를 다시 끄집어냈다.

▲ 조선일보 8일자 사설

다소 당혹스러운 것은 ‘중도적’ 논조를 가진 걸로 평가되는 한국일보가 이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한국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경찰력이 조계사 내에 투입될 경우 상황이 악화될 수 있다며 “한 위원장이 법 집행을 거부할수록 민주노총을 대하는 국민의 눈길은 싸늘해질 뿐”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일보는 “민주노총이 대기업·정규직 노조원의 기득권만 보호하려 한다는 정부의 공세 강화로 노동개혁 반대 명분이 퇴색하고 민주노총의 입지가 더 축소될 수도 있다”고도 첨언했다.

▲ 한국일보 8일자 사설

물론 한상균 위원장의 조계사 은신을 무작정 이해해달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법 집행을 거부하는 범법자’와 ‘다수 노동자를 대변하지 못하는 기득권’이라는 두 가지 프레임만으로 이 상황을 규정하는 것은 사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질문을 뒤집어야 한다. 그가 법 집행을 거부하는 이유와 민주노총이 비정규직을 포괄한 대다수 노동자를 대변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에 대한 답은 명쾌하다. 한상균 위원장이 이런 불행한 상황에까지 몰리게 된 건 민주노총의 힘이 부족해서다.

민주노총이 정규직의 기득권에만 관심이 있다는 주장은 반만 맞다. 민주노총은 매 시기마다 비정규직까지 포괄하는 노동운동으로의 노선전환을 모색해왔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출신인 한상균 위원장 역시 그런 취지의 주장을 전면에 내세워 민주노총 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다만 우리가 익히 알 듯, 이런 노선전환이 잘 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정권과 보수언론이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이간질시키고 민주노총의 무력화를 위해 발을 맞춰온 정치적 역사가 작용했다. 정권과 보수언론이 틈만 나면 꺼내드는 ‘귀족노조론’은 이를 위해 민주노총 내부로부터 제기된 비판을 교묘하게 차용한 사례다.

‘법 집행을 거부하는 범법자’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 만일 보수언론이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민주노총이 나라를 뒤엎을만한 힘을 갖고 있다면 애초에 한상균 위원장은 조계사로 피신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민주노총에 그런 강력한 힘이 없으므로 한상균 위원장은 현안을 앞에 놓고 싸우지 않을 수도 없고 순순히 잡혀가 그나마 간신히 유지되는 조직마저 위기에 빠지도록 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민주노총을 둘러싼 상황이 악화되는 데에 당연히 권력과 보수언론의 의도가 작동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박근혜 정권은 마치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노동개혁 5법을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나 이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노동개혁’이 역대 정권이 꾸준히 주장해온 노동유연화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돼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걸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포장하는 것은 마치 개구리가 들어있는 솥의 온도를 1도 높이면서 “곧 따뜻해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비유에서 민주노총과 한상균 위원장은 삶아져 죽기 전에 뛰쳐나가는 게 개구리가 사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거기에 대고 불을 지피는 쪽에서 “얼어 죽자는 거냐”며 면박을 주는 게 과연 적절한 일인가.

결국 이건 근본적으로 법 집행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정치의 영역에서 노동개혁 문제를 성의있게 다루고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의 주장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는 ‘신호’가 있어야 한상균 위원장도 나름의 결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데 정치는 그야말로 마비된 상태다. 연내에 노동개혁 5법을 처리하라는 대통령의 황당한 요구에 여당은 한 마디의 불만도 제기하지 못하고 있으며 야당은 한국노총과 합의된 정도까지는 용인할 수 있다는 식의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4일 오후 조계사 관음전을 격려 방문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을 비롯한 민중총궐기투쟁본부 지도부와 창문 틈으로 잠시 대화를 나눈 뒤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여기서 공론 조성을 위한 사회적 책임을 지는 언론이 맡아야 할 역할은 정치권의 ‘슬기로운 해법’ 모색을 촉구하는 것이다. 한상균 위원장더러 조계사를 나가라느니 경찰에 출두하라느니 훈수를 둘 게 아니다. 그게 과연 신문이 사설을 통해 제기할 만한 무게감 있는 주장인지 스스로 돌이켜봐야 한다. 한상균 위원장은 집회를 주도한 사람이지 사람을 죽이거나 돈을 훔친 흉악범이 아니다. 정치와 대중운동에 대한 “민나 도로보데쓰” 수준의 현실인식으로는 언론이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없다. 다수의 국민들이 지지를 보냈던 철도노조 파업 국면을 되돌아볼 필요도 있다. 그 상황을 해결한 방식을 100점짜리로 평가할 순 없지만, 어쨌든 첫 매듭은 정치권이 풀었다. 같은 시도를 다시 반복하면서 더 좋은 결과를 모색하는 것 역시 진보(進步)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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