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경기 일정이 바뀌면서 하루 앞당겨 프리미어12 4강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주최국이 예선에서 1위로 올라올 경우라는 어처구니없는 전제조건이 생겨나서이다. 홈팀의 입맛대로 경기일정을 바꾼 것도 모자라 상대팀 선수단에게 초청 항공티켓을 꼭두새벽에 탑승하는 일정으로 제공하여, 선수들이 잠도 못잔 채 새벽 4시에 일어나 공항으로 향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국제대회를 표방한 프리미어12 대회에서 주최국 일본은 어처구니없는 홈팀 편의주의 행정으로 대회의 품격을 스스로 떨어뜨렸다. 갑작스레 바뀐 일정도 모자라 일본에 들어오는 항공편마저도 꼭두새벽에 탑승해야 했던 대한민국 야구대표팀은, 가장 불리한 조건에서 주최국의 터무니없는 텃세를 경기 당일 받아들여야만 했다. 좌측 선심에 일본인 심판이 배정된 것이다. 도대체 어느 국제경기에서 경기하는 국가의 심판이 배정된단 말인가.

국제대회인 듯 국제대회 아닌 국제대회 같은 프리미어12는 대회 내내 미숙한 경기운영 및 노골적인 텃세로 연일 입방아 위에 올랐다. 하지만 공동주최국 일본은 오로지 우승이라는 일념 하에 천연덕스럽게 텃세를 부렸다. 게다가 4강전을 앞두고 일본의 고쿠보 감독은 결승전에 등판할 선발투수까지 예고하는 오만의 극치를 선보였다.

▲ 일본 투수 오타니 쇼헤이 ⓒ연합뉴스
여러모로 불리한 여건에서 4강전에 임한 대한민국 대표팀은 개막전에 이어 11일 만에 다시 만난 상대팀 선발투수 오타니 쇼헤이의 위력적인 구위에 좀처럼 찬스를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160km의 직구는 기본이거니와 140km를 넘나드는 무시무시한 포크볼이 곁들여지니 대한민국 타자들은 좀처럼 영점을 맞추지 못하면서 끌려 다녔다. 비록 상대팀 투수였지만 투구 매커니즘과 공의 위력은 보면서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대한민국 선발투수 이대은(지바 롯데)도 혼신의 힘을 다해 150km대의 강속구를 뿌렸다. 하지만 초반 일본 타자들의 끈질긴 승부로 인해 투구수가 많아지면서 결국 4회에 첫 실점을 했고, 아쉬운 수비실책 등이 겹치면서 마운드를 내려왔다. 하지만 이대은이 물러난 이후부터 대한민국 김인식 감독과 선동열 투수코치의 투수기용은 고비 때마다 절묘한 '신의 한 수'로 작용하였다.

3-0으로 점수차가 벌어지고 추가 실점이 우려되던 상황에서 좌완 차우찬을 올려 불을 껐고, 7회 차우찬에 이어 마운드에 오른 심창민이 제구력 난조로 흔들리며 대량실점 위기에 처했으나 곧바로 좌완계투 정우람을 올려서 무사만루의 위기를 탈출한 장면이 흐름을 더 이상 내주지 않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우람의 호투는 2011년 롯데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 9회말 1사 만루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을 탈출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고비는 8회말 2사 1,3루 상황이었다. 안타 하나면 사실상 승부가 종료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구원등판한 임창민은 바깥쪽의 빠른 직구로 상대 타자 사카모토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상당히 위태로운 상황이었는데 더 이상 점수를 내주지 않은 것이 승부의 흐름을 미묘하게나마 대한민국 쪽으로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한일전에서 유독 8회에 강했던 대한민국은 정작 8회초 공격에선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한 노리모토(라쿠텐)의 구위에 눌려 별다른 반전을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노리모토는 경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9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김인식 감독은 선두타자로 대타 오재원을 내세웠다. 지나친 승부근성으로 인해 종종 상대편 선수들과 트러블을 일으키던 오재원은 유난히 안티팬이 많은 선수였다. 그러나 대표팀에서 오재원의 존재는 분위기 반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타석에 들어설 때부터 홈플레이트 안쪽을 넘나들며 신경전을 펼치던 오재원은 노리모토의 슬라이더를 받아쳐 기어이 안타를 만들어냈다. 이날 경기 대한민국의 2호 안타였다.

▲ 9회초 대타로 출전한 대한민국 오재원이 좌익수 앞 안타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단순히 안타로 출루한 것이 아니라 오재원은 1루로 출루하면서 일본 덕아웃을 향해 주먹을 들며 포효하며 진루하였다. 평온하던 일본 벤치에 묘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지점이었다. 이어 김인식 감독은 또 다시 대타로 손아섭을 투입하였고, 늘 적극적인 성향의 손아섭은 제구력이 좋은 일본투수들의 성향을 이용하여 초구부터 과감하게 배트를 내밀었다. 중전안타로 무사 1,2루라는 이날 경기 최고의 찬스를 만들어낸다.

이 상황을 볼 때만 하더라도 속으로는 지더라도 1점은 내고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워낙에 노리모토의 구위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오타니의 160km 강속구는 아니더라도 노리모토도 150km를 가볍게 상회하는 직구와 낙차 큰 포크볼을 보유하고 있어 쉽게 공략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선발투수 오타니의 구위가 너무도 뛰어난 탓이었을까. 오히려 대한민국 타자들에게 오타니 학습효과는 뒤이어 등판하는 투수들의 공이 상대하기 편해지는 반작용을 불러 일으켰다.

무사 1,2루의 상황에서 타석에 등장한 캡틴 정근우는 좌측선상으로 빠지는 2루타를 치면서 대한민국의 지긋지긋한 무득점 행진을 깨뜨린다. 상황은 무사 2,3루가 되면서 순식간에 급변하였다. 정근우의 안타가 터지는 순간 승부의 추는 확실하게 대한민국으로 기울었다. 순식간에 도쿄돔은 얼음장처럼 냉랭한 분위기로 돌변하고 마운드에서 노리모토는 좀처럼 평정심을 되찾지 못하였다.

흔들린 노리모토는 결국 후속타자 이용규마저 몸에 맞는 볼로 내보내면서 마운드를 내려왔다. 일본 고쿠보 감독의 선택은 21세의 어린 마무리 투수 마츠이였다. 하지만 이런 중압감이 감도는 상황은 어린 투수 마츠이게는 너무도 큰 부담이었다. 마츠이는 좀처럼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고 김현수에게 밀어내기 볼넷을 허용하였다. 한 점 차로 좁혀진 경기는 완전히 대한민국의 흐름으로 넘어왔다.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에서 일본의 투수들이 불펜에서 몸을 제대로 풀 시간조차 없었음이 드러났다.

▲ 9회초 무사 만루 때 대한민국 이대호가 2타점 역전 적시타를 친 뒤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마츠이는 아웃카운트도 잡지 못하고 마운드를 내려왔고 니혼햄의 마무리 투수 마스이가 올라왔다. 타석에는 일본시리즈 MVP 이대호. 이미 마스이의 공을 수차례 상대했던 이대호는 초구 유인구에 반응하지 않았고, 결국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승부를 걸어오는 마스이의 공을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쳐 깨끗한 좌전적시타를 터뜨렸다. 수비하는 일본 야수들은 혼비백산하는 모습이었고, 결국 3시간 30분가량 경기를 리드 당했던 대한민국은 불과 10분 사이에 승부를 뒤집는 기적을 연출하였다.

역대 한일전에서 9회초 3점차 이상 리드의 상황을 뒤집은 최초의 상황이 일본야구의 심장인 도쿄돔 한복판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2사 만루 상황에서 타순은 한 바퀴 돌아 기적 같은 승부의 시발점을 만들어낸 오재원이 다시 올라왔다. 오재원은 시원한 스윙과 배트플립으로 거대한 타구를 만들어냈다. 우중간을 가를 것 같이 보이던 타구는 일본 중견수 아키야마의 집요한 호수비에 가로막혔고, 오재원은 아쉬움에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그 타구와 시원한 배트플립 제츠쳐만으로도 일본벤치는 철저하게 기가 짓눌릴 수밖에 없었다. 천만안티 오재원이 국민열사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9회말 마지막 공격에서 김인식 감독은 베테랑 정대현을 마운드에 올렸다. 정대현은 투 아웃을 가뿐히 잡았으나 나카타에게 빗맞은 중전안타를 내줬다. 그러자 대한민국 벤치는 주저 없이 마무리 이현승을 내세웠고 벼랑 끝에 선 일본은 퍼시픽리그 홈런왕 나카무라(세이부)를 대타로 세웠다. 나카무라의 타구는 빗맞으면서 처리하기 어려워 보였으나 3루수 황재균은 침착하게 타구를 처리하면서 기적 같은 역전극의 대미를 장식한다.

▲ 9회말 대한민국 투수 정대현이 역투하고 있다. ⓒ연합뉴스
믿기지 않는 통쾌한 대역전극. 대회 내내 상식을 넘어서는 텃세로 대한민국 선수단과 야구팬들을 분노하게 만든 일본이었기에 통쾌함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배가되었다. 역대 한일전 명승부 1순위에 이름을 올려도 될 만큼 2015년 11월 19일 도쿄돔의 기적은 쉽게 잊혀지지 못할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반면에 이번 대회 우승은 사실상 예약한 것이라 자부하던 일본의 오만함은 대한민국의 끈기와 집념 앞에 굴욕적으로 짓밟혔다.

결국 모든 스포츠의 기본은 페어플레이임을 이번 프리미어12 대회가 몸소 보여주고 있다. 꼼수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임을 보여준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은 역대 최악의 텃세 속에서 역대 최강의 짜릿함을 일구어냈다. 억지로 국기하강식을 거행한다고 해서 애국심이 솟아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기를 가슴에 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팀 선수들의 투혼이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스포츠는 그래서 위대하다. 요즘처럼 사회 전반에 걸쳐 존경할 인물들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스포츠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대중문화와 스포츠는 늙지 않습니다(不老). 대중문화와 스포츠를 맛깔나게 버무린 이야기들(句), 언제나 끄집어내도 풋풋한 추억들(不老句)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나루세의 不老句 http://blog.naver.com/yhjmania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