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가 고달파질수록 대중문화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흐르곤 한다. 힘든 현실을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푹 빠지게 만들거나,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 자체를 비춰주거나.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현실은 대중문화로 하여금 후자의 작품을 대거 내놓게 만들고 있다. 소위 ‘막장 드라마’라는 장르 아닌 장르가 탄생할 정도로 중장년 소비자와 밀접한 위치에 있는 한국의 드라마판에선 올해에만 벌써 <어셈블리>, <송곳> 등 직간접적으로 사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 여럿 제작되었다. 영화의 경우 2011년 <부러진 화살>을 시작으로 최근 개봉한 <내부자들>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회 문제를 겨냥한 작품을 내놓고 있으며, 만화 역시 드라마로 제작되며 더 화제를 모은 <송곳>을 비롯해 <내가 살던 용산>, <섬과 섬을 잇다>와 같은 시도들이 매년 보이고 있다.

새누리당을 비롯한 보수 정치권과 일부 보수 시민단체, 커뮤니티는 이러한 시선들에 대해서 매우 불편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불편함은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는 작품들을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봇물같이 터져 나오는 현재의 상황을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 오죽하면 SF 소설가 듀나는 윤태호의 동명 원작 만화를 영화로 만든 <내부자들>에 대해 “부패의 순환이 이를 고발하는 영화의 이야기 자체를 진부하게 만들고 있다.”는 표현을 쓰며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사회 고발물에 대한 피로감을 드러냈을까.

이렇게 사회를 이야기하는 작품이 일상이 된 마당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 있다면, 바로 월간 <오늘보다>에서 연재 중인 노동운동에 대한 만화 <단결툰>일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독자에게는 <단결툰>이라는 작품의 제목은커녕 <오늘보다>라는 매체 자체가 익숙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미 만화/드라마 <송곳>을 필두로 영화 <카트>, 드라마 <어셈블리> 등 노동운동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다뤘던 대중문화 속의 작품들이 여럿 있는 상황에서 작품이 노동운동을 다룬다는 이야기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끊어져 있던 노동운동과 만화라는 매체의 적극적인 만남을 부활시켰다는 점과 작품 자체에 담겨 있는 흥미로운 지점들은 <단결툰>을 그저 그런 작품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긴 시간 잠들어 있던 노동운동과 만화의 만남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한국 노동운동에 있어 만화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이자 함께 발맞춰나가는 대상이었다. 그러한 차원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엄혹한 세월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었던 만화가들의 작품일 것이다. <머털도사>로 잘 알려진 이희재의 <간판스타>, 오세영의 <부자의 그림일기>, 박재동의 <한겨레 그림판>, 주완수의 <보통 고릴라>, 그 외에도 <반쪽이> 연작으로 잘 알려진 최정현, 장진영, 탁영호, 백성민, 이은홍, 故 신영식 등의 만화가들이 80, 90년대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사회 문제를 그려냈었다.

▲ 1980-90년대 노동, 사회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만화는 글 이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는 효과적인 선전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사진은 1980년대 해고 노동자들이 결성한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에서 1984년 10월 5일에 발간한 기관지 <민주노동> 6호에 실린 만화 <만화로 보는 노동교실>의 한 장면. (사진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즈)

하지만 만화가들의 행동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을 비롯한 운동단체들 역시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만화라는 매체를 활용하였다. 한국가톨릭농민회나 민족미술협의회(현, 민족미술인협회) 등의 단체가 활발하게 만화를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했고 이외에도 당시 발간된 노동조합이나 사회단체의 소식지나 홍보물, 대학교 교지 등에서 많은 이들에게 사회 현안을 알리고 주장을 퍼트리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만화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소위 ‘위장 서클’이라는 경멸적인 호칭으로 불리긴 했지만 학교와 정부의 감시를 피해 운동권 대학생들이 많은 학우를 만나기 위해 만들었던 동아리 중에선 故 이한열 열사가 가입했던 연세대의 만화사랑, 경희대의 한그림 같이 만화 동아리가 제법 많았다. 이외에도 노조, 단체 상근자를 위한 교안에 만화를 그리는 법이 포함되어 있거나 대중들을 교육하는 방법 중 하나로 같이 만화를 그리게는 시간을 가지는 것을 제시하는 등 만화는 노동, 사회운동과 다양한 형태로 만나며 함께 했다. 하지만 90년대 중후반 사회운동이 전반적으로 퇴조하며 만화를 통한 연대와 단결 역시 점차 모습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가 도단이를 비롯해 몇몇 작가들이 계속 노조나 사회운동단체들과 함께 했지만 전반적인 존재감은 흐려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상황이 2010년 만화가 김홍모를 필두로 일군의 작가들이 모여 용산 참사 문제를 다룬 <내가 살던 용산>을 계기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2012년엔 해당 기획에 참여했던 만화가 중 김성희, 김수박 작가가 삼성전자 반도체 문제 해결을 위한 모임 ‘반올림’과 함께 협력해 각각 <먼지 없는 방>과 <사람 냄새>를 만들었다. 2014년에 르포작가 이선옥의 주도로 전국 각지의 장기 투쟁 지역과 만화가들을 연결한 <섬과 섬을 잇다>가 등장했다. 그리고 2015년, <단결툰>을 통해 만화는 오래간만에 노동운동과 가까이 만나게 되었다.

노동운동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달하다

▲ <단결툰>에 등장하는 노동운동의 모습은 작품이 연재되는 잡지의 또 다른 정기 인터뷰 코너 ‘노조 할 권리’와 함께 기획된다. 만화로 이야기되는 노동 현장의 모습은 실제 노동운동의 주인공이 참여한 인터뷰와 상호교류하며 깊은 의미를 만들어 나간다. 사진은 <오늘보다> 2015년 6월호에 게재된 교육공무직(학교비정규직)에 대해서 다룬 <단결툰>의 한 컷과 ‘노조 할 권리’에 게재된 실제 주인공들의 모습. (사진제공=오늘보다)

그렇다면 <단결툰>은 어떤 식으로 노동운동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을까. <단결툰>은 작품이 연재되는 <오늘보다>의 또 다른 연재 코너 ‘노조 할 권리’와 발걸음을 맞춰나가는 식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잡지 편집실에서 근무하는 이들이 매달 노동운동이 벌어지는 현장으로 직접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그렇게 정리된 이야기는 다시 <단결툰>을 통해서 만화로 표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단결툰>과 ‘노조 할 권리’ 두 연재 꼭지를 함께 읽으며 단순히 글로만 노동운동 현장의 이야기를 담는 것보다 더 다채롭게 그들을 만나게 된다.

비록 매달 <단결툰>에 할당된 페이지는 단 네 쪽에 불과하지만 작품에 담겨있는 이야기는 물리적인 페이지의 수보다 더욱 깊고 넓다. 평범했던 이들이 어떤 계기로 노동운동이 필요함을 느끼고 어떻게 싸워왔는지를 진솔한 시선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장편 극화의 형식을 채용한 <송곳>이 매화 극적인 긴장감을 주면서 독자들을 쥐었다 폈다 하며 노동운동의 현실에 점차 빠져들게 만든다면, 반대로 <단결툰>은 실제 노동현장에서 싸우는 이들이 독자들에게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에세이의 형태로 독자들에게 다가간다.

<오늘보다> 2015년 6월호에 게재된 <우리학교 급식실이 밥짓기를 멈춘 날>(▷링크) 편은 그러한 에세이 형식의 구성이 인상적으로 드러난 연재분이다. 그저 아이를 키우면서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찾던 평범한 주부였던 주인공은 막연히 학생들만 상대해 일반 식당보다 나을 것이라 생각해 초등학교 급식실의 조리원이 된다. 그 환상은 출근 첫 날 만에 깨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기로 15년 동안 계속 일을 한 주인공은 어느 날 노조를 하자는 제의를 받은 뒤 투쟁에 나서게 되고, 그제서야 자신들의 존재가 드디어 주목받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아들을 비롯한 학생들이 자신들의 투쟁에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에 힘을 얻는다.

극적으로 더 매만지면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단결툰>은 이러한 이야기를 에세이의 형식으로 전달하며 극화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독자들이 흥미를 가지게 만든다. 주인공이 급식실에서 일을 하며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가 드러나긴 하지만, 사건 자체에 집중하는 대신 주인공이 학교와 가정에서 느끼고 경험한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게 작품은 에세이의 틀을 활용해 사건이나 장소가 아닌 실제 그 현장에서 노동하는 한 명의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가 어떠한 계기로 문제에 직면해 인식하고 행동에 나서게 되었는지를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특징은 <단결툰>의 매호 연재분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지만, 주인공들이 가진 리얼리티의 힘은 작품을 지루하고 단조롭지 않게 한다. 또한 구성에 있어서도 주인공의 내레이션을 구어체로 처리하는 등 독자가 단순히 관찰자의 위치가 아니라 바로 곁에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듣는 느낌을 주는 세심함도 좋은 요소가 된다.

한편으로 주목할 지점은 반지수 작가가 그리는 <단결툰>의 작화이다. 매 연재분마다 그림체가 조금씩 바뀌어도 차분하게 내용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길잡이의 역할에 언제나 충실하기 때문이다. 분명 작가만의 고유한 특징이 진하게 묻어날 정도로 인상적인 그림체는 아니다. 하지만 등장인물이 처해있는 상황과 느꼈을 감정이 한 번에 인식될 수 있도록 사람에게 중심을 맞추며 앞에서 언급한 구어체의 내레이션과 더불어 독자가 이들의 상황을 생각할 수 있도록 적절히 표현의 디테일을 조절한다. 또한 매번 바뀌는 그림체 역시 앞서 언급한 주부이자 급식실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파스텔톤에 에세이툰의 느낌으로, 홈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때는 무채색의 톤으로 판화 미술 혹은 프랑스의 그래픽 노블을 떠오르게 만드는 스타일로 각각의 대상들과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단결툰>이 작가의 첫 연재작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만화에서 작화가 수행해야 할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 무척이나 대단할 따름이다.

이렇게 전국 각지의 노동현장에 서있는 ‘사람들’에 시선을 기울이는 <단결툰>은 비록 아직까지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진 작품은 아니다. 최규석의 웹툰 <송곳>이 비슷한 주제를 다룬 작품 중에서는 비교적 잘 알려진 편이지만, 작품이 연재 중인 웹툰 중에서는 인기가 높지 않은 편인 것을 생각하면 메이저 매체를 통해 연재되지 않는 <단결툰>이 인지도가 적은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냉정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단결툰>은 연재지 <오늘보다>의 SNS를 통해 계속 전파되고, 또한 모바일이나 컴퓨터로 보는 독자를 위해 웹툰의 형태로 재편집하는 정성을 기울이는 등 한 명의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이미 단결을 했거나, 단결을 하고 싶은 이들 모두를 위한 작품이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작품이 되길 바랄 뿐이다.

김유미 · 홍명교 구성, 반지수 그림. 월간 <오늘보다> 창간호(2015년 2월호)부터 연재 중.

▲ [사진 4] <단결툰>의 이야기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다시 그 초점은 계속 단결을 꿈꾸고 있는 이들에게 참고자료가 되고 북돋아주는 용기로 다가간다. 그렇게 <단결툰>은 이름 그대로 사람들의 단결을 이미 했거나, 단결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작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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