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영화>(1997), <노랑머리>(1999), <눈물>(2000) 등 그간 가출 소녀의 위태로운 일상을 담은 영화는 더러 있었다. 또한 이 영화들처럼 가출 소녀들의 삶을 전면으로 다루지 않더라도, 갈 곳 없이 여기저기 헤매다가 벼랑 끝으로 몰린 소녀들의 이야기는 한국 영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단골 아이템이다.

이와 같이 소재만 놓고 보면 박석영 감독의 <들꽃>은 별반 새롭게 다가오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를 보지 않아도 관객들은 <들꽃>의 주인공들이 집을 나온 이후 얼마나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으며, 그녀들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들꽃>은 ‘가출 소녀’ 하면 흔히 생각하는 범주와 조금 다른 지점에서 소녀들을 바라본다.

‘들꽃’은 집을 나와 거리를 헤매는 소녀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업소에서 그녀들을 부르는 일종의 ‘은어’다. 가출 소녀인 수향(조수향 분)과 은수(권은수 분)는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하담(정하담 분)이 어느 남자에게 맞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하담을 위험에서 구해준다.

▲ 영화 <들꽃> 스틸 이미지
언제나 그랬듯이 소녀들은 갈 곳이 없다. ‘들꽃’들을 팔아넘길 속셈으로 가득한 어른들만 존재할 뿐이다. 오래전부터 수향을 좋아한 태성(강봉성 분) 덕분에 잠시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한들, 소녀들은 여전히 갈 곳이 없고 나쁜 어른들 손바닥 안의 쥐일 뿐이다.

<들꽃>은 소녀들이 왜 집을 나와 거리를 헤매게 되었는지 알려주지 않고 묻지도 않는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 소녀들의 삶을 보여줄 뿐이다. 매일매일이 음흉한 어른들에게 다시 끌려갈지 모르는 일촉즉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소녀들은 조그마한 집을 구해 알바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자립’을 꿈꾼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지극히 평범한 일상도 소녀들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청소년, 미성년자임에도 집을 나왔다는 이유로 사회의 보호망 밖에 놓인 소녀들. 가출 소녀들을 위한 ‘쉼터’가 마련되어 있지만, 소녀들은 쉼터에 가는 것을 거부한다. 자신들에게 다가올 현실을 뻔히 알면서도 소녀들은 계속 ‘들꽃’으로 남고자 한다. 업소에서 부르는 은어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진짜 거리에 피어난 꽃으로 말이다.

▲ 영화 <들꽃> 스틸 이미지
2013년 여름 홍대 놀이터에서 우연히 가출 소녀를 목격한 이후, 그녀들의 행방을 따라 다녔다는 박석영 감독은 데뷔작인 <들꽃> 외에 지난 10월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스틸 플라워>를 완성시켰다. <들꽃>은 애써 그녀들의 삶을 모른 척 했던 관객들의 정신을 어지럽게 하는 문제작이다.

카메라의 거친 핸드헬드 기법, 소녀들의 일상을 세밀하게 파고드는 리얼리즘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들꽃>은 집을 나온 소녀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영화에는 시민들의 안전을 위한 보호망이 마련되어 있음에도 그 어떤 혜택을 받지 못하고 거리로 내몰린 홈리스들의 출구 없는 현실, 그리고 어려움을 처한 사람들에게 쉽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는 비정한 세상이 담겨 있다. 가출 소녀들의 일상을 정직하게 담아낸 <들꽃>이 웬만한 스릴러보다 보는 이들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하는 이유다. 11월 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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