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성학자도 아니고 페미니스트도 아니다. 오히려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나 운전에 서툰 모습에 분노하는 ‘우파적 남성상’에 가깝다. 물론 나의 속성은 그러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사회란 남성에 종속된 여성들 혹은 조롱의 대상으로서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 뭐 이딴 게 아닌, 그저 상식이 통하는 사회이다. 상식적인 생각과 상식적인 행동이 인정되고, 통용되는 그런 사회. 물론, 상식이 사회에 따라 다르게 통용되어 악용되는 경우도 많지만, 어찌되었든 가장 보편적인 관점에서의 그런 상식 말이다. 이러한 상식은 내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신문에서의 사진 게재와도 관련이 있다.

우선 아래의 사진부터 보자. 국내 주요 일간지에 실린 여자선수들의 사진이다. 보고 난 후의 느낌은 이 글이 끝난 후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고, 이 사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우선 고민해보자.

▲ 출처: 첫 번째 발리볼 사진(중앙일보, 2000.09.19, 40면; 동아일보, 2000.09.19, C3면; 그리고 한국일보, 2000.09.19, 39면), 두 번째 수영선수 사진(문화일보, 2003.12.01, 24면), 그리고 마지막 사이클 사진(동아일보, 2000.09.17, 14면).
두 개의 사진 모두 여자선수의 뒷모습을 잡고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엉덩이’를 사진의 초점으로 삼고 있다. 아무 생각없이 보면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사진을 잘 살펴보면 뭔가 모를 ‘가부장적 시선’, 그런 걸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가부장적 시선이 전 사회를 뒤덮고 있는 상황에서는 매체 역시 그 상황에 종속되기 쉽다. 가부장적 시선에 매몰된 사진의 정치학. 매체, 특히 신문과 같은 인쇄매체에서의 사진은 사진 그 자체만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사회문화적인 특성을 담지하고 있는 매개물로 파악되어야 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프레임론: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줄 테야

프레임 이론(theory of frame)이라는 것이 있다. 미국의 미디어 연구가인 토드 기틀린(Todd Gitlin)이 주장했던 이론이다. 이 사람이 누군고 하니, 바로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헤게모니 이론을 매체연구에 처음으로 도입하여 발전시킨 인물 중 하나이다. 헤게모니를 모를 수 있는 분들을 위해 한 마디. 헤게모니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서 지배계급이 국가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인 방향에 대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피지배계급에 대한 직접적인 강압보다는 문화적 수단을 통해 사회문화적인 지도력을 발휘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흔히 주변 어르신들이 ‘세상이란 게 다 그런 거란다’라고 말할 때의 그 뉘앙스. 바로 그게 헤게모니다. 일종의 상식과 같은 것으로 인식되는 헤게모니는, 그렇기에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거부감 없이 우리가 사회에서 살아가는 생활방식을 조정한다. 물론, 우리의 그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말이다.

▲ 왼쪽은 이탈리아의 혁명가였던 안토니오 그람시이고, 오른쪽은 토드 기틀린으로서 현재 콜럼비아대에서 저널리즘과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사진의 출처: 위키피디아.
이러한 헤게모니가 언론을 통해 전파된단다. 토드 기틀린에 따르면.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 헤게모니가 전파될까? 그는 이 과정을 프레임(frame)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프레임? 이게 무엇인가? 그의 설명을 잠시 인용해보자. 그는 ‘전 세계가 보고 있다(The Whole World is Watching: The Mass Media in the Making and Unmaking of the New Left, 1980)’라는 책에서 프레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상징조작자가 상례적으로 언어적 또는 영상적 담화를 조직하는 근거로 삼는 인식, 해석, 제시, 선별, 강조, 배제 등의 지속적인 유형”(p. 7)

한 예를 들어보자. 1980년대만 해도 뉴스를 통해 대학생의 데모 소식이 자주 들렸다. 내가 다닐 때는 그런 대학가의 시위나 데모는 거의 없었지만. 그런데,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나의 부모님은 “저 놈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하나”라며 혀를 차셨다. 그러고 난 후 그 다음날 신문 1면을 보면 시위와 관련한 기사가 1면에 나오는데, 대부분이 불에 탄 자동차 사진, 피 터져 쓰러져 있는 전경, 잡혀가면서 고함을 지르는 학생들의 분노에 찬 모습 등이 사진으로 실리곤 했다. 적어도 내 기억엔. 그러다 보니 내 기억에 ‘시위=나쁜 것’이라는 공식이 무의식적으로 형성되었고, 이러한 무의식은 지금도 뉴스에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라는 언급에 ‘저 놈의 시키들…’이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생각해보자. 시위가 났다고 하면 당장 우리는 무엇부터 생각해야 할까? 그렇다. “왜 시위를 할까?”라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가?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생각, 즉 ‘저 놈의 시키들…’이란 생각부터 한다. ‘시위=나쁜 것’이라는 프레임이 우리의 머릿속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아마도 매체가, 특히 언론에서의 시위관련 뉴스가 가지고 있던 ‘프레임’의 효과 때문일 것이다. 이는 다시 헤게모니 전략과 연계된다. 대부분의 보수언론들이 시위와 관련하여 보도하는 방식을 잘 보라. 특히 사진과 관련해서는 선정적인 사진만을 보도한다. 그것도 일반대중이 싫어할 만한 것들, 가령 피가 터져 실려가는 모습, 화염병으로 인한 화재, 폭력 등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는 보수언론이 사회 내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기업가들의 지배적 위치를 견고하게 하기 위한 헤게모니 전략으로서 ‘프레임’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틀린이 말하는 프레임 전략이 핵심이다.

여자선수 프레이밍하기: 그들을 사소하게 만들어라!

그렇다면, 우리는 앞서 여자선수들의 ‘엉덩이’ 사진을 이러한 프레임 기법과 함께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을까? 프레임 기법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사소화(trivialization)’ 기법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게 무엇이냐면 묘사대상의 ‘언어, 복장, 나이, 스타일, 목표를 경시’하는 기법이다. 특히 스타일에 주목해보기 바란다. 스타일엔 신체적 특정부위를 부각시키는 것이 포함되는데, 여자선수의 특정신체를 부각하는 것 역시 이러한 사례에 속할 수 있다.

여자선수에서 ‘여자’라는 맥락을 떼어놓고 한 번 생각해보자. ‘선수’라는 존재를 사진을 통해 묘사한다면 과연 어떤 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좋을까? 승리의 기쁨, 역동성, 움직임의 미학(美學), 불확실성 등이 부각되는 것이 ‘상식’이다. 굼브레이트의 <매혹과 열광>이란 책에서 제시되었던 것처럼 선수들의 육체, 고통, 우아함, 아름다움 등이 부각되어야 함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물론 ‘선수’에 ‘여자’를 붙여도, 이러한 부각의 대상은 변하지 않는다. 여자선수들의 근육이 보여주는 미적 감각, 그들의 역동성, 승리의 기쁨 등은 ‘여자선수’를 ‘여자’라기보다는 ‘선수’로 만들어주는 그 무엇이 된다. 때문에 언론을 포함한 모든 매체는 여자선수를 이러한 차원에서 부각시켜야 한다. 스포츠하는 여성을 위하여.

하지만, 우리가 보는 여성선수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들이 묘사되는 주제는 ‘선수’가 아닌 단지 눈요기 정도의 수준으로 치부되는 ‘여자’다. 그것도 남성의 우월적 시선에 복종될 수 있는 ‘엉덩이’로 초점화되면서 말이다. 내가 있는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재미있는 ‘짓’을 한 적이 있다. 남학생들에게 여자선수들의 엉덩이가 강조된 사진을 스크린에 띄워주고 그냥 그 반응을 지켜보았다.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갈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은 표현들이 여과없이 쏟아져 나왔다. ‘오우, 탱글탱글한데, 역시 운동하면 엉덩이가 업되는군, 주물럭 주물럭(손짓과 함께), 이쁜데, 저 뒤에 올라타서…, 스는데’ 등등. 더 심한 말도 나왔지만, 차마 여기다가 적지는 못하겠다. 사진 한 장을 통해서도 남자들의 지배적 시각, 남성우월적이고 가부장적인 표현을 여과없이 끌어낼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한 사례라 하겠다.

그들이 운동선수로서의 모습이 부각되지 못하고, 엉덩이나 가슴과 같은 신체의 특정부위가 강조되는 신문의 묘사방식은 어떤 변명을 갖다 붙여도 정당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이런 사진들이 게재될까?’이다. 이런 사진밖에 없어서 그럴까? 아님 눈요깃감으로 올려놓고 ‘보고 즐길 거리’를 주려고 그러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각 언론사의 편집국 구성원의 성별비율이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신문에 실리는 사진은 편집국에서 선택 및 편집되어 최종적으로 실린다. 2007년도 한국신문협회의 통계결과에 따르면 모든 중앙일간지 편집국의 남성 대 여성 비율이 8.7 대 1.3이라고 한다. 국장급으로 갈수록 여성은 거의 없다고 하니, 결국 어떤 사진이 선택되고 편집될 것인지는 지극히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가면서: 여자선수를 ‘선수’로 만들어야

얼마 전 끝난 <바람의 화원>(SBS)에서 박신양(김홍도 역)이 그런 대사를 던진 적이 있다. “하나의 그림은 백 마디의 말을 담고 있습니다”라고. 마찬가지다. ‘하나의 사진은 백 마디의 말을 담고 있다.’ 사진이 어떻게 묘사되느냐에 따라, 아니, 오늘 이 글의 주제에 맞춰 표현하면, 사진이 어떤 프레임으로 묘사되느냐에 따라 그것이 전달하는 이미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아래의 사진을 보고 독자 분들께서 판단해주셨으면 한다. 백 마디의 설명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참고로 밑의 대립된 사진들은 같은 대상을 다른 프레임에서 찍은 것이다.

▲ 출처: 왼쪽(동아일보, 2003.08.25, C3면), 오른쪽(한국일보, 2003.08.26, B16면)

▲ 출처: 왼쪽(동아일보,2003.08.28, C2면), 오른쪽(중앙일보, 2003.08.29, C2면)

느낌이 다르지 않은가? 사진의 의미를 생각해보자는 이 글 처음의 언급처럼, 이 두 개의 대립되는 사진을 보고 과연 어떤 ‘프레임’에 입각한 사진의 게재방식이 여자선수를 ‘상식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을는지 여러분께서 생각해봐 주시길 부탁드린다. 난 여러분들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실 거라 생각한다. 아닌가?

체육교사로서의 직업정체성을 고민하며 충남대에서 2006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남대 스포츠인문사회과학 전공자들의 스터디 그룹인 ‘세미나리움’의 실장을 하고 있고, 미디어와 젠더, 운동장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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