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어느 잡지를 펼쳤다가, 공감 1000%의 글귀를 발견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잡지는 ‘올해 최고의 ○○○’ 정도 제목의 캘린더 기획을 한다. 올해는 그 항목에서 과감히 ‘스포츠’를 제외했단다. 이유는 여러분이 상상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너무 식상할 테니까. 그렇다. 올해의 스포츠는 단연, 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전이다. 2008년 야구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종목의 우렁찬 '뽀스'로 군림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2008년 야구를 한 줄로 요약하면 그렇다. 격세지감이랄까,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전 미디어가 대동단결하여 야구의 위상 격하와 심화되는 위기를 걱정했었는데, 1년 새 그야말로 천지차이로 대중의 사랑을 회복한 것이다. 물론, 이유가 단순하지만은 않다. 롯데의 선전, 리그를 새롭게 지배하기 시작한 젊은 선수들의 등장 등 요인은 복합적이다. 다만, 앞서 밝혔듯 2008 야구 성공 스토리의 화룡정점, 압도적 한 장면은 역시 베이징올림픽 야구 우승이었다.

▲ 프로야구 도박 파문을 다룬 뉴스 검색 리스트

야구는 ‘프로’화 종목의 맏형 격인 종목이다. 프로라는 정체불명의 토속 외래어는 칼라TV 이후의 일상적 시공간에서 매우 중차대한 함의를 지닌다. 프로라는 말 속에는 자신의 실존이 시장의 질서에 온전히 걸려 있다는 존재적 각성이 포함되어 있다. 그걸 리모컨을 통해 각인해내던 장치가 바로 ‘프로’ 야구였다.

스포츠의 ‘프로’화가 그 자체로 스포츠의 재미를 깊게 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프로는 그저 종목을 시장에 던지는 행위일 뿐이다. 프로 스포츠의 성공 여부는 철저히 시장 안에서 다른 상품들과 치열한 경쟁에서 판가름난다. 이 과정에서 축적되는 ‘밀도’만이 재미가 되어준다. 아시다시피 시장에는 자비가 없다. 야구가 꽤 오래도록 지상파의 절대적 사랑을 누려왔다는 점은 시장의 관점에서 보자면 분명히 위대한 승리이다.

또한 문화적 관점에서 보자면 스포츠는 정치적 입장을 수렴하고 또 초월하는 문화적 가치들을 함축해낸다. 굳이 우리의 월드컵의 경험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스포츠를 향한 우리의 열정은 우리 사회가 잠재하고 있는 에너지의 실체적 증명이라고 해도 결코 과하지 않다. 골목 구석구석 자리 잡은 헬스장, 형형색색의 조깅복으로 무장한 마라톤족, 인라인스케이트의 폭발적 증가, 스키와 스노보드에 대한 집착 그리고 골프와 등산까지. 더 나은 삶을 향한 모든 시공간에 스포츠가 있다.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포츠는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존재 산업(industry of appearance)이다.

각설하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프로야구 선수 16명이 인터넷 도박을 했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김주선 부장검사)는 프로야구 선수들이 인터넷을 통해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도박을 한 혐의(상습도박)를 잡고 수사 중이라고 한다. 수사대상은 16명이며, 이중 13명이 삼성 선수라는 것이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이다.

며칠째 주시했지만, 아직 그 선수들이 누군지 실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실명이 나오지 않음은 물론, 뉴스의 가치와 파급력에 비해 기사의 양이 현저하게 적다. 매우 선정적인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미디어가 스크럼을 짠 듯 외면하니 거짓말처럼 정보의 확산 속도마저 무척 더딘 편이다. 검찰의 브리핑이 있었던 7일 하루 일제히 보도한 이후, 보도를 자제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더욱 의아한 것은 7일 보도마저 제목과 논조가 엇비슷했다는 점이다.

▲ 11월19일자 동아일보 12면

야구는 네티즌 사이에서 꽤 소용돌이성이 강한 검색어 가운데 하나이다. 이번 사건 바로 직전에 있었던 장원삼 트레이드 파문의 경우 수일 동안 검색어 상위권을 유지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스포츠의 역사가 곧 스포츠 영웅을 향한 숭배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검색어의 작동 원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스포츠는 대중문화가 장려해온 ‘스타덤과 팬덤’으로 이뤄진 상징체계이다.

이번 사건을 두고 그나마 일고 있는 소용돌이는 그들이 ‘공인’이냐 아니냐는 진부한 논란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중문화의 문법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부질없는 논쟁의 결과가 ‘그들은 공인이 아니다’고 결론지어져도 대중에게 노출된 존재라는 그들의 숙명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뒤집어서 얘기하면, ‘찌라시’의 역할은 언제나 같다는 말이다. 스포츠와 그 영웅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호흡할 뿐이고, ‘찌라시’는 그 짧은 호흡에 기생하는 무엇일 뿐이란 말이다. 따라서, 그들이 ‘공인’일 수도 있기에 보도를 조심한다는 ‘찌라시’의 변명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스스로의 생존 기반을 뒤엎는 얘기이고, 있을 수 없는 가정이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겠거니를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단 말이다.

이번 인터넷 도박 파문은 ‘찌라시’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될 절호의 찬스였다. 평상시 실력으로 봤을 때, 이미 진작 이름이 나왔어야 했다. 이름 정도가 아니라 그 선수들의 절절한 라이프 스토리와 성격, 평소 습관 정도는 읊어줘야 마땅하다. 평소 그토록 ‘찌라시’를 찾아보는 이들의 알권리를 주창했던 이들이었는데. 게중에 센스가 남다른 기자라면, 당사자들의 ‘관상’ 정도는 분석해주는 정도의 기획은 이미 실었어야 했다.

비근한 예로 ‘강병규’를 생각해보자. 강병규의 인터넷 도박을 처음 전할 때, ‘찌라시’들은 혐의가 확정되기 훨씬 이전부터 그의 실명을 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다이내믹하게 강병규의 사연을 읊조렸음은 물론이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산산히 물고 흔들던 ‘찌라시’만의 고유한 페이퍼리즘을 보여줬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다. 아직 본격적인 장사는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그 흔한 이니셜조차 안 나왔는데, 벌써부터 필요한 것은 ‘성찰’이라는 마무리성 기사로 관조하고 있다. 장터에서 드잡이하던 때가 언제 있기나 했냐는 듯이 느닷없이 구도자의 자세를 잡고 WBC 선수 선발을 염려하고, 선수들의 공인 의식을 촉구할 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배반이다.

중요한 건 역시 ‘왜’이다. 왜 이렇게 갑자기 ‘찌라시’의 보도 태도가 변했을까? 천방지축 날뛰던 손오공 역할도 이제 지겨워 갑자기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 가자는 삼장법사가 되고 싶은 것일까? 너무 빨리 변하면 죽는 법인데. 그 변신은 너무 극적이라 혜안이 짧은 나로서는 그저 어안만 벙벙할 뿐이다. 그리고 다만, 한 가지. ‘삼성’이란 두 글자만 자꾸 맴돌 뿐이다.

스포츠와 관련된 논의 중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 가운데 하나가 스포츠를 일종의 가족 유사성을 지닌 제도로 보는 시각이다. (우연찮게 삼성의 슬로건이 ‘또 하나의 가족’이다.) 그 이론은 스포츠를 개별적 장르가 아닌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이 삼투하여 사회적 의미를 만들어내는 연속적 과정으로 파악한다. 경쟁/갈등/복수/ 타협 등을 스포츠의 내적 속성을 구성하는 요소로, 계급/정치/돈/성 등을 스포츠에 개입하는 외적 요소로 보는 시각이다.

이 이론은 한국 프로 스포츠에 대입해보면 얼추 그림이 나온다. 배구, 축구, 야구 가릴 것 없이 삼성은 공히 공공의 적이다. 한국 프로 스포츠는 거칠게 말하자면, 누가 삼성을 이길 것이냐의 승부이다. 삼성은 한국 프로 스포츠가 지닌 내적 속성의 ‘실체’이다. 프로 스포츠에 대한 삼성의 지배력은 이뿐만이 아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인데 거의 모든 종목의 메인 스폰서십을 삼성이 맡고 있다. 말하자면, 삼성은 스포츠에 개입하는 외적 요소의 ‘실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찌라시’들의 가장 큰 고객이기도 하다.

‘하이에나+히드라’의 속성을 지닌 ‘찌라시’마저도 삼성 앞에서라면 꼬리를 내린다고 하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 개도 제 주인은 물지 않는다고 해버리면 너무 ‘찌라시’스런 화법일까. 나도 침묵하는 ‘찌라시’들과 함께 두고 보겠다. 그리고 기대한다. 삼성을 마주하며 진중한 저널리즘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찌라시’들의 행보가 완보가 되기를. 그리하여 세상이 좀 더 맑고 평화로워지기를. 피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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