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언론사 기자 가운데 한 명으로서 슬그머니 짜증이 난다. ‘이명박 대통령 재산헌납 약속…왜 안 지키나’ 등의 기사가 12월8일 또다시 쏟아졌다. 그럴 만도 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TV카메라 앞에서 “우리 부부가 살 만한 집 한 칸이면 충분하니까 모든 것을 공익사업에 내놓겠습니다”라고 이야기 한 것이 벌써 1년 전 일이다.

▲ 12월 9일자 동아일보 8면.
당시 이 대통령은 대선 직전, BBK사건으로 인한 의혹이 한창 불거지자 스스로 ‘재산헌납’ 카드를 빼들었다. 전격적이었다. 야당에서 요구한 것도 아니고 국민들이 원했던 것도 아니다. 눈앞에 다가온 ‘대선 승리’에 쐐기라도 박듯, 이 대통령은 그렇게 재산헌납을 온 국민 앞에서 약속했다. 당시 이 대통령이 중앙선관위에 신고했던 재산은 353억8030만원이었다. 31억1천만원으로 신고된 ‘집 한 칸’(서울 논현동 단독주택)을 제외하면 내놓을 재산은 320억원 정도가 된다.

이 대통령과 청와대가 망설이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막상 재산헌납을 이행하려면 절차도 까다롭고 따져봐야 할 것도 많을 것이다. 특정인에게 나눠주자니 선거법 위반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공직선거법에서는 선거 출마자에게 특정인에 대한 기부를 금지하고 있다. 이왕 재산을 내놓을 거라면 효과를 극대화하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재산헌납 방식이나 시점이 당연히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깝다는 생각도 있을 수 있다. 먹고살기 어렵다며 눈물을 흘리는 시장 할머니에게 20년 쓰던 목도리를 벗어주면서도 꼭 “‘아까워도’ 줘야겠다”라는 식으로 토를 다는데, 평생 모은 재산이 왜 아깝지 않겠는가.

모두 이해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이런저런 사정을 모두 감안한다 해도 1년이 넘는 시간은 과했다. 더 이상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눈치를 볼 사안이 아니다. 국민들의 요구는 간단하다. 약속을 했으면 지키라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이 대통령의 재산이 당장 필요하니 자신에게 달라고 할 사람도 없고, ‘기부 문화 확산을 위해 아름다운 선행을 빨리 마무리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1년 전 재산헌납 약속이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순수한 기부 의사에서 나온 약속이 아니라면, 이쯤에서 최소한의 진정성이라도 보여달라는 것이 국민들의 공통된 목소리이다.(기사로 쓰려니까 ‘진정성’이라고 표현했지 일반인들은 이런 경우 흔히 ‘양심’이라는 단어를 쓴다.)

언론사 기자의 입장에서도 갑갑한 것은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기사거리도 넘쳐나는데 언제까지 대통령의 ‘지키지 않는 약속’을 챙겨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취재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쏟아지는 것도 아니다. 매번 청와대에서 하는 이야기는 똑같다. “적절한 시기와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말 한마디 들으려고 바쁜 ‘청와대 핵심 관계자’에게 전화하는 것도 민망한 일이다. 그런 기사는 대개 훈훈하지도 않고 재밌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다. 우선 나부터, 쓰면서도 시간낭비라는 생각만 든다.

‘예고된 선행’만큼 떨떠름한 일도 없지만, 착한 일 하겠다며 광고해놓고 미루거나 안 하는 것처럼 여러 사람 짜증나게 하는 일도 없다. 이제는 이 대통령이 결단할 때다. ‘아까워도’ 내놓는 편이 낫다.

최성진은 현재 한겨레21 정치팀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때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방송작가 생활을 경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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