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범초소를 공유하고자 했던 청년들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체화당이 위치한 신촌동에는 작은 방범초소가 하나 있다. 그 자리에 놓인지 오래되어 외부 벽면이 녹슬기도 한 허름하고 작은 컨테이너 박스이다. 앞에는 작은 나무 간판으로 ‘방법초소’라고 쓰여있고, 방법등이 설치되어 있다. 현재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 신촌동 주민센터와 서대문구청을 통해 알아보니, 염화칼슘을 보관하고 있고, 일상적으로는 바로 앞에 위치한 경로당에서 열쇠를 관리하며 어르신들이 밤에 종종 방범을 서실 때 입으시는 옷과 장구류 등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듯 했다.

▲ 방범초소로 활용되고 있는 컨테이너 박스. 이 장소가 내게 이렇게 의미있는 공간으로 다가오게 될지는 몰랐다.

한편, 최근 봉원마을 사업단의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리사이클 공공제작으로 봉원마을 소셜거점 만들기’ 워크숍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청년들, 주민들이 모여 버려진 폐파레트를 수집하고, 이 파레트를 분해하여 마을과 거리에 필요한 공공의 물품을 제작하는 워크숍이다. 상상할 수 있듯이 마을과 거리에 누구나 앉을 수 있는 벤치를 만든다거나, 탁자를 만든다거나 하는 프로젝트가 기본이 된다. 단순히 공공제작물을 만드는 워크숍을 넘어 공공제작물이 놓여진 장소를 연결하여 지도를 만들고, 각 장소가 공유하는 어떤 공적인 생활패턴을 확대하여 이 마을과 지역사회를 새롭게 디자인하고자 하는 워크숍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워크숍을 ‘봉원마을 마디마디’ 워크숍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마을 디자인의 줄임말이기도 하고, 점과 점을 잇는 마디의 의미를 담은 표현이기도 하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려다보니, 작업에 필요한 공구(그리고 앞으로 마을의 공동자산으로 활용될 공구)를 보관할 공공의 장소가 필요해졌다. 그 때 눈에 띈 장소가 저 컨테이너였다.

컨테이너를 중심으로 이 과정을 상상하다보니, 여기를 단순히 공구 보관함 정도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 마을과 거리의 변화를 가져올 거점 공간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획의 총감독이 그런 제안을 했고, 실무 활동가들은 모두 너무 좋은 의견이라며 공감했다. 이른바 ‘봉원마을의 리사이클 순환거점’. 누군가 쓸 수 없는 나무를 놓아두면, 누구나 쓸 수 있는 나무로 디자인되는 순환의 공간. 일단은 나무가 그 시작이지만, 나는 도시에 이런 순환 거점은 매우 필요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특히, 시민들이 직접 그 순환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면 시민교육의 차원에서도,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확대하는 차원에서도 매우 매력적인 기획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장소를 함께 사용하기 위해 행정과 경로당에 이 같은 의도를 전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그 내용을 배제하지 않고,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는 내용을 몇 차례 공유했다. 다행히 경로당의 어르신들도 찬성해주셨고, 나는 컨테이너의 열쇠를 복사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며 몇 차례 경로당을 방문하여 열쇠를 받고자 했다. 그런데 일은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다. 정작 그 열쇠를 관리하던 어르신은 이 사안이 대단히 마음에 안 드신 모양이다.(그 과정에서 내가 이 분께 잠시 빌린 열쇠를 늦게 반납하는 바람에 신의를 잃는 중대한 실책도 있었다.) 왜 노인들이 잘 사용하는 장소를 뒤흔들려고 하는지, 심지어 그 과정에서 경로당의 평화를 왜 헤치는지 내게 물으셨다. 다시는 이야기도 꺼내지 말라고 질색을 하셨다.

그 컨테이너는 그 어르신의 사유도 아니고, 경로당의 소유도 아니다. 정확히 그 관리와 책임 여부를 묻자면, 아마 동의 자율방법대가 그 권한을 갖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동과 자율방법대, 심지어 경로당의 몇몇(?) 어르신들과도 절차적으로 합의했지만, 결국 열쇠를 보관하고 계신 어르신과 또 다른 몇몇 분의 어르신들의 반대로 그 공간에 진입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아마 이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일 것이다. 어떤 장소든 그 장소에는 고유의 생태계가 있다. 사용과 사유를 둘러싼 구조와 관계로서의 생태계 말이다. 나는 그것을 간과했다.

사실 이러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있어 ‘장소’는 참 중요하다. 어쨌든 어떤 장소의 변화를 만들 수 있을 때, 그 변화를 이어 길과 마을에 개입할 수 있을텐데,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장소’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공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공공기관(구청이나 시청, 동 주민센터 등)이 활용하는 장소나 땅을 찾게 된다. 그런데 그 마저도 이미 사실상 ‘사유화’된 공간으로서 작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우리에게는 ‘공유’의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장소’의 경우, 그것은 언제나 법적으로든, 사실상으로든 ‘사유’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살아왔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새롭게 디자인하고, 마을의 공간으로 잇고자 했던 또 다른 공간은 안산 자락에 위치한 ‘배드민턴장’이다. 이 장소는 법적으로는 조계종의 땅이다. 현재는 구청이 설치한 배드민턴장이 운영되고 있고, 배드민턴장 주변의 땅에는 누군가가 텃밭을 일구고 있다. 아마 여기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겪을 것이다. 우리가 그 공간을 전체 점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에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 기능을 유지하며 조화롭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중요한 목표임에도, 이 의도는 결코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한다. 실제로 답사 차 찾아간 무리를 보며 배드민턴을 치시던 동호회 분들은 어떤 일인지 물으셨고, 우리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천천히 설명드렸는데, 그 중 한분은 “여기는 이미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마을 공동체 같은 것이 들어오면 안 되요.”라고 이야기하셨다.

방범초소의 열쇠는 결국 수령했다. 행정과 이 프로젝트를 공유하고 있는데, 이 같은 현안을 공유했더니, 결국 자율방범대장님이 어떤 설득(?)의 과정을 거쳐 열쇠를 받아내셨다. 나는 오히려 이 같은 행정의 개입이 관계에 있어서 더 부정적인 결과가 있을 것 같아, 천천히 하며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상황을 그냥 곱게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주민주체가 있었던 것이다. 이 결과가 어떤 영향이 될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 어렵고 험난한 과정은 아직 현재 진행 중이다.

정치, 한정된 자원의 권위적 배분

나는 학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어쩌다보니 그 어렵다는 ‘전공을 살려’ 살아가는 사람이 된 셈이다. 정작 학교를 다닐 때는 정확히 기억한 적이 없었지만, 졸업하고 나니 사람들이 종종 “그래서 정치가 뭐에요?”라고 물어보는 순간들이 있어 의식적으로 외웠던 ‘정치의 정의’가 있다. 그것이 바로 ‘한정된 자원의 권위적 배분’ 이었다.

요즘 나는 이 학문적 정의에 대해 꽤 자주 생각하게 된다. 정치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조건으로서의 ‘한정된 자원’, 그리고 그것을 배분하는 인간의 기술로서의 ‘정치’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사회의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혹은 그 자원을 사용하는 가장 효율적인 ‘권위’는 ‘사유’의 방식으로 만들어졌던 것 같다. 개인이든, 단체든 그 자원을 ‘사유’하는 것이다. 정확히는 선점하여 독점하는 방식으로 자원을 배분해왔던 것이다. 법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대부분의 경우 그렇다. 장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일상 근처에 ‘사유화되지 않은 장소’는 과연 어디인가? 때로는 법적으로 사유화된 장소가 사실상은 공유가 더 쉬운 장소가 되는 경험도 하고 있다.

얼마 전 또 다른 주민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지역에 위치한 생협 매장의 주차문제가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재개발 된 아파트 단지에 생협 매장이 생겼는데, 이 매장에 마땅한 주차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아파트 단지의 입주자들이 외부인들의 주차를 반대해서 내린 결정 때문이라는 것이 그 식사 자리의 주된 화제거리였다. 빗장이 걸린 공동체(Gated community) 문제는 앞으로 이 도시에 주된 화두가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 이 상황이 마냥 화가 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현상으로서,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한정된 자원을 사용하는 감각으로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법적인 공유지조차 ‘사유’화된 상황에서 법적으로조차 사유화된 그 장소에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현재로서는 당연하다. 제도와 개인의 감각(의식), 모두의 문제이다.

긴 역사 속의 경험으로 축적된 이 제도와 개인에게 누적된 이 감각을 넘어서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나 난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정치는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권위를 사유의 방식에서 다른 방식의 것으로 전환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자원에 비해 인구가 밀집될 수밖에 없는 도시의 경우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사유하지 않고 도시의 변화에 개입하는 방법, 사유하지 않고 도시의 장소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훨씬 더 다양한 경험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그게 우리의 삶에 새로운 감각을 부여하고, 그 감각이 새로운 제도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에서부터 시작하는 녹색정치는 결국 이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여 함께 사용하는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가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 감각과 제도의 연결을 고민하는 것 역시 당연한 과제가 될 것이다. 전체 그림을 설명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변화를 통해 새로운 감각과 제도의 유효성을 증명해내는 것이다. 녹색정치의 풀뿌리성은 그 증명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것으로 가장 강조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태영 / 서울녹색당 정책위원장

30대 초반, 지역활동가이자, 녹색당원. 풀뿌리사회지기학교와 신촌민회, 체화당이 어우러진 신촌의 일터에서 활동하고 있고, 서울녹색당의 정책위원장으로 역할하고 있다. “조직되지 않은 사람들을 조직한다.”는 목표로 2014년 지방선거에 녹색당 서대문구의원 후보로 출마, 낙선했다. 아직 그 목표는 유효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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