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요구했던 노사정 대타협 시한이 지났다. 정부는 이제 자체 입법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고용노동부는 ‘노동개혁 향후 추진방향’에 대한 관계부처 합동발표문에서 한국노총 등 노사정 복귀 및 대타협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성과가 미미하다면서 임금피크제 도입과 업무 부적응자에 대한 ‘공정한 해고’ 가이드라인이 노동개혁에 포함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간 논의를 바탕으로 정부 입법을 추진하겠단 입장을 밝힌 것이다.

눈여겨 볼 것은 이 발표문에 현대자동차와 조선업계 파업에 대한 비난이 포함됐다는 것이다. 정부는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한 노사정 협력 분위기를 깨는 일부 대기업 노조들의 무분별한 임금인상 요구와 파업을 자제할 것을 촉구한다”면서 “현대자동차는 조합원 평균 연봉이 9천만원이 넘는 고임금을 받고 있으면서도 임금인상 파업을 결의했다”, “일부 조선업종 대기업 노조들은 조선산업의 불황과 경영적자를 아랑곳하지 않고 연대파업에 나서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은 이날 아침 주요 일간지에서도 발견할 수 있어 노동개혁을 겨냥한 기득권의 ‘총공세’가 이뤄지고 있다는 의혹을 거둘 수가 없는 상황이다.

▲ 조선일보 11일자 1면 기사

조선일보는 이날 1면 톱에 <‘고임금 노조’에 발목잡힌 한국경제>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고 “자동차와 조선·타이어 등 주력 업종에서 노조들의 파업 움직임으로 한국경제에 ‘경고등’이 켜지고 있다”면서 “‘고임금 노조’들의 비타협적인 행태로 주력 대표 기업들이 흔들릴 경우 한국 경제 전반에 심각한 타격이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현대자동차의 경우 총매출액 25%를 차지하는 중국 시장에서 30% 가까이 매출이 줄어드는 등 대외경기가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조가 임금인상, 성과급지급, 완전고용, 임금피크제 없는 정년연장 등을 요구하고 있다며 “연봉 1억원 노조가 파업에 나선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고도 썼다.

▲ 조선일보 11일자 3면 기사

조선일보는 이어지는 3면에서도 <8조 적자에도 파업하는 노조…해외 생산량까지 노사합의 요구> 제하의 기사에서 25일째 파업을 진행하고 있는 금호타이어의 사례를 들어 “불황에 시달리는 한국 산업계가 ‘고임금 노조’들의 잇단 파업 움직임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재차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현대차노조가 생산량 조정을 요구하고 있고 한국델파이 노조가 델파이 본사 보유 지분 50%를 한국 S&T그룹에 매각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을 ‘경영권 침해’라고 규정하고 생산직을 구조조정에서 제외하는 등 노조의 이기적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고도 주장했다.

조선일보의 이와 같은 지면 편집은 이날 오전 정부의 노동개혁 관련 발표문에 드러난 시각과 놀랍도록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는 한국 사회 기득권의 일반적 시각이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조선일보가 정부와 보조를 맞춰 노동개혁 입법의 논리를 강화하려는 의지를 가진 결과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신문들이 국정감사에서 불거진 쟁점들에 대한 여야 간 대립을 주요한 보도의 틀로 잡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 동아일보 11일자 1면, 2면 기사

조선일보가 김대환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장의 핵심 발언을 의도적으로 축소해 보도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이날 동아일보는 1면에 <“노사정위, 일반해고-취업규칙 쟁점 주목할 진전”>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김대환 위원장이 10일 중간 브리핑을 통해 노사정 협의에서 주목할 만한 진전이 있었다며 “정부가 가이드라인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노동계도 의제 포함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견해차가 조금씩 좁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정부가 10일을 노사정 합의 마지노선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에 대해 김대환 위원장이 “노사정이 합의한 바 없다”며 “정부가 정한 시한이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고도 보도했다.

▲ 중앙일보 11일자 10면 기사

중앙일보 역시 10면 하단 기사에서 “이날 김대환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장은 협상 시한을 10일로 못 박은 정부를 작심하고 비판했다. 노사정 대화가 교착상태 빠진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취지다. 1998년 노사정위원회가 설립된 이후 노사정 협상과 관련해 정부가 비판의 대상이 된 건 처음”이라면서 김대환 위원장 발언에 상당한 무게를 실어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김대환 위원장의 발언을 3면 하단 기사에서 주변적으로만 다루고 있으며 김대환 위원장의 “주목할 만한 진전” 관련 발언에도 불구하고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는 점을 더 강조하고 있다. 결국 정부가 노사정 합의를 반복 요청하면서도 일방적으로 합의 시한을 정하고 실질적인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정부 입법을 시사하는 입장문 발표 등을 통해 사실상 ‘판을 깨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 사실상 눈을 감은 것이다.

▲ 조선일보 11일자 3면 기사

조선일보는 이날 <지역 텃세에 발목 잡힌 세계 최대 반도체 공장>이란 제목의 사설을 싣기도 했다. 여기서 조선일보는 삼성전자가 경기도 평택시에 짓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 반도체 생산라인이 ‘지역이기주의’에 부딪쳐 차질을 빚고 있다면서 “삼성전자가 이렇게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 대기업이 또 국내에서 대규모 투자를 하고 싶겠는가”라고 썼다. 충남 당진시가 한국전력이 신청한 북당진변환소 건축 허가를 반려해 당진화력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가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으로 공급되지 못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충남 당진시의 건축 허가 반려는 평택시와 당진시의 바다 매립지에 대한 관할권 분쟁 때문인데, 또다른 송전선로 건설 계획 역시 안성시의 반발에 부딪쳐 난항이라는 것이다.

물론 신문의 관점은 존중돼야 하지만 지역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한 사안을 일방적으로 기업입장만 편들며 쓴 사설을 지면에 배치하는 게 합리적인지 의문이다. 앞의 대기업 노조 파업 관련 보도와 더불어 조선일보의 친기업적 시각이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친기업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비단 조선일보 뿐 만이 아니다. 동아일보 역시 이날 현대차노조 파업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는 기사를 지면에 배치했고 중앙일보는 국회가 국정감사에서 너무 많은 증인을 신청하는 ‘갑질’을 하고 있다며 국감 증인 신청 실명제를 도입하자는 내용의 사설을 배치했다. 특히 중앙일보의 사설은 최근 국회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재벌총수를 국감 증인으로 요구한 것에 대한 반발로 보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친기업적 시각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의 행보가 정부의 노동개혁 추진과 유기적으로 맞물려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가 사실을 전달하고 권력을 비판하는 언론 본연의 임무를 내팽개치고 정부를 위한 ‘선전’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반성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데서 이 반성의 필요성은 백 번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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