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종종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서는 비평이 필요하다. '정치 멀리보기'는 분명한 관점과 과감한 전망을 바탕으로 정치적 사건을 전체 맥락에서 재구성하고자 하는 심층 기사이다. 3류 정치평론처럼 소설의 영역으로 가보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허황된 망상이 아니라 근거 있는 정치평론의 도를 추구한다.

주말 새 두 야권 정치인의 광복절 관련 메시지가 화제가 되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의 문재인 대표와 안희정 충남지사가 그 주인공이다. 문재인 대표의 경우 상대적으로 남북이 협력해야 새로운 경제적 비전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 무게를 실었고 안희정 지사는 외교안보라는 측면에서 좀 더 거시적인 비전과 이념 갈등의 해소에 중점을 뒀다는 느낌이다.

광복절과 관련한 입장 표명은 야권의 차기 대권주자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이다. 광복절은 2차대전의 큰 줄기를 이루는 한 축인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날이다. 이 날부터 실제로 항복문서가 조인된 9월 2일경 까지는 한국, 일본, 중국, 미국 등 주요 관계국이 모두 당사자의 입장에서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기간이다. 따라서 각국이 이 시기에 민감한 외교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올해는 전쟁이 끝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라 더욱 이 메시지들에 관심이 모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의 대권주자에게는 발언의 기회가 사실상 없다. 국가의 수반인 대통령이 내놓는 외교적 메시지를 조용히 지지하고 뒷받침할 뿐이다. 그러나 야권의 주자들은 다르다. 모처럼 국가적 대사에 대한 거대담론을 펼쳐 보일 좋은 기회다. 문재인 대표와 안희정 지사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상당히 공을 들인 메시지를 내보인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작용했을 것이다.

▲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안희정 충청남도지사가 6일 충남 홍성 도청사에 열린 예산정책협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실로 들어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두 사람의 메시지는 각자가 내세우고 있는 노선이 충실히 반영돼있다. 문재인 대표의 메시지는 평소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유능한 경제정당’이라는 모토를 떠올리게 한다. 부산에서 시작해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을 잇는 환동해경제권과 목포에서 시작해 남포와 상하이를 연결하고 군산 새만금 지역과 개성공단을 핵심 산업단지로 하는 환황해경제권을 만들겠다는 게 가장 주요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표의 그간 경제 관련 행보는 경제민주화 및 소득주도성장 등 경제주체들 간의 관계 조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이번 메시지는 거시적인 국가적 비전을 보여주려 한 것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안희정 지사의 경우 광복절을 ‘승리의 날’로 기념하자는 이념 갈등 종식의 메시지와 ‘아시아 평화 공동체’라는 외교안보적 비전을 제시하는데 주력했다. ‘아시아 평화 공동체’는 미국과 중국 중의 양자택일이라는 고약한 선택지를 극복하고 마치 유럽처럼 아시아 지역의 블록화를 이뤄내야 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안희정 지사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을 인용하며 남북통일을 통해 이를 위한 초석을 놓아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러한 안희정 지사의 메시지는 지도자의 자질을 잘 보여준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충남도지사로서의 메시지로 보기에는 다소 과도한 측면이 있지만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욕심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폭넓은 부분에서 나름의 식견을 보여주고 있다. 외교안보적 비전과 관련해서는 현재의 박근혜 정부와 지난 이명박 정부 모두가 부정적 평가를 피할 수 없는 처지다. 비록 ‘아시아 평화 공동체’라는 구상이 한국 정치사에서 언급된 바 없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일종의 ‘모범답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두 번의 보수정부가 모두 외교안보적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안희정 지사와 같은 강단있는 모습이 대중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특히 박근혜 정부가 미국과 일본, 중국 사이에서 길을 잃을 듯 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최근에는 북한의 지뢰 도발이라는 악재를 만난 상황에서 동아시아 정세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야권의 대권주자로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또, 이런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국내에서의 이념 갈등의 종식을 요구하는 것 또한 피해갈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박근혜 정부는 그간 ‘과거사’ 문제를 근거로 상당한 거리를 둬왔다. 이는 박근혜 정부가 특별히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균형외교’라는 측면에서 중국과 공동행보를 취하기 위한 핑계를 내세운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최근의 동아시아 정세는 더 이상 이런 식의 균형외교가 유지 불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종전 70주년 기념 담화가 우리로서는 불만족스러운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 국가들이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에는 이런 상황이 반영돼있다.

한국이 역사적 평가 대상으로서의 일본이 아니라 현대의 일본이라는 국가와 외교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면 국내의 부정적 여론부터 극복해야 한다. 현재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여론에는 전통적인 민족 감정에 의한 적대감이 작용하는 측면도 물론 있지만 ‘뉴라이트’로 표현되는 세력의 역사관에 의한 국가적 정통성 논쟁이 활발하다. 이런 국면에서 안희정 지사가 광복절을 ‘승리의 날’로서 기념하자고 한 것은 1948년을 건국절로서 기념해야 한다는 뉴라이트 역사관에 대한 명확한 반대의사를 표명하면서도 독립을 서구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닌, 주체적 승자의 위치에서 기억하자고 제안함으로써 역사적 정통성을 분명히 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문재인 대표는 구체적 현안에 대한 입장을 내놓는 것에 주력했다는 인상이다.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해 5·24 조치 해제와 북미 간, 남북 간 2+2 회담을 구체적으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는 제1야당의 대표라는 입장에서 문재인 대표가 취할 수 있는 정치적 액션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안희정 지사는 어찌됐건 광역지자체장의 입장이기 때문에 정부나 여당에 지역 현안과 동떨어진 의제를 제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의 당위로 경제적 효과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불필요한 이념갈등을 피해가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남북관계의 개선을 요구하면서도 중도적 스탠스를 유지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북한이 대화에 나설 수 있는 조건을 만들자는 모든 주장에 ‘종북’ 딱지를 붙이려 하는 보수세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문재인 대표의 이러한 선택은 나름 영리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16일 국회 당 대표실에서 가진 8·15 광복 70주년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대표와 안희정 지사는 야권의 유력한 차기대권주자로 반복해서 호명되고 있다. 만일 두 사람 모두 2017년 대선에 진지하게 임하게 된다면 서로 간의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 경쟁을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단일한 정치세력이 생산적인 방식으로 소화할 수 있다면 국민들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줄 수 있다. 두 사람의 광복절 메시지를 하나의 단일한 비전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면 한국의 미래에 대한 유의미한 메시지를 가진 정치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아쉬운 점은 있다. 두 사람의 비전에는 남북관계 개선을 통한 경제 개발 계획이 실제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면밀히 고민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통일의 당위를 말하고는 있지만 통일 과정에서 북한의 체제와 지배세력을 어떻게 해석하고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문제 또한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또,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있어서도 아직까지도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과거사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답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한 번의 광복절 메시지를 통해 모든 의문을 해소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과도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뉴라이트가 아닌 야권이 남북의 민중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새로운 체제에 대한 담론을 만드는데 앞장서 주도권을 발휘할 때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도 단지 반성과 사죄를 요구하는 것을 넘어서서 일본제국주의가 한반도에 뿌리내리도록 한 체제를 정확히 평가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주요 정치인들이 앞으로도 거시적 비전을 활발히 내놓고 이에 대한 토론을 진행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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