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문제적 인물’ 아베 신조 총리가 예상대로 자신의 신념을 담은 종전 70주년 담화를 발표했다. 한국과 중국은 반발했지만 미국은 아베 신조 총리의 담화에 힘을 실어줬다. 이 구도 자체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국제관계의 오늘을 그대로 보여준다. 박근혜 정부의 이후 행보가 그만큼 중요해진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의 ‘과거형 사죄’에 대해 중국 외교부는 “일본은 피해 국가에 성실하고 진지하게 사과해야 한다”면서 “깨끗하고 철저하게 군국주의 침략 역사와 절연해야 하며 이같은 중대한 원칙상 문제에 있어 회피하려 해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또, 중국 외교부는 “역사문제는 중·일관계의 정치적 기초와 중국 인민의 감정에 관계되는 문제이며, 중국은 일관되게 역사를 거울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주장해 왔다”면서 “침략역사를 직시하고 깊이 반성하고, 평화발전의 길을 걷기를 촉구하며 실제 행동을 통해 아시아 인접국과 국제 사회의 신뢰를 얻기 바란다”고도 주장했다. 아베 신조 총리의 담화에 반성과 사죄가 충분히 드러나 있지 않다고 평가한 것이다.

▲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사진=연합뉴스)

식민지배의 당사국 중 하나인 한국도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박근혜 대통령은 15일 제70주년 광복절 경축식 경축사를 통해 “어제 있었던 아베 총리의 전후 70주년 담화는 우리로서는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며 “역사는 가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없어지는 것이 아니고’의 오류로 보인다) 살아있는 산증인들의 증언으로 살아있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앞으로 일본 정부는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공언을 일관되고 성의 있는 행동으로 뒷받침해 이웃나라와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어야 할 것”이라며 “특히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조속히 합당하게 해결하기를 바란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박근혜 대통령은 아베 신조 총리 담화에 담긴 성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시도를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아시아의 여러 나라 국민들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준 점과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한 사죄와 반성을 근간으로 한 역대 내각의 입장이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국제사회에 분명하게 밝힌 점을 주목한다”면서 “앞으로 일본이 이웃국가로써 열린 마음으로 동북아 평화를 나눌 수 있는 대열에 나오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발언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러한 스탠스는 미국의 입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의 처지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의 네드 프라이스 대변인은 14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아베 총리가 2차 대전 당시 일본이 야기한 고통에 깊은 참회를 표하고 역대 일본 내각이 취해온 역사적 담화를 계승한다고 약속한 것을 환영한다”면서 “일본은 전후 70년간 평화와 민주주의, 법치에 변함없이 헌신해왔으며 이는 세계적 모범이 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베 신조 총리가 담화를 통해 밝힌 일본의 국제사회에서의 입지를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행보는 지난 4월 아베 신조 총리가 미국을 방문해 상·하원 연설을 한 이후 ‘신밀월관계’로까지 불릴 정도로 급속하게 양국이 가까워진 이후 두드러지고 있다. 이는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영토분쟁 문제와 남중국해 인공섬 건설 문제에 더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추진 등으로 정치·군사·경제적 측면에서 ‘중국 대 일본·미국’이라는 형태의 전선이 형성되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전통적 우방인 한국 역시 ‘한·미·일 동맹’이라는 고전적인 지역동맹에 속하게 될지 여부가 주요 관심사가 된 형국이다.

문제는 한국의 경우 한·미·일 동맹에 묶여버리는 것은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한국 경제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수준까지 확대돼왔다. 남북관계의 개선이라는 오랜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미국 및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의 ‘균형외교’는 필수적이다. 이런 상황 판단에 따라 그간 한국정부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묘한 줄타기를 이어가는 아슬아슬한 양다리 외교를 해왔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이 급속히 가까워지고 미국이 중국과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국면이 되자 한국의 균형외교는 지속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까지는 미국과 중국에 한 다리씩 걸치고 있었지만 양쪽의 입장 변화에 따라 가랑이가 찢어지는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전승절 기념 행사 참석 여부를 두고 중국과 미국의 신경전 사이에서 신중한 행보를 거듭하는 것은 이런 국제정치적 지형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한국 입장에서 미국과 중국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이 양자택일의 딜레마를 돌파하는 거의 유일한 방안은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다. 북핵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는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주변국가들의 입장에서도 주요한 관심 현안일 수밖에 없다. 북핵문제의 최우선 당사국인 한국이 남북긴장 완화라는 측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낸다면 동아시아에서의 외교적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최근 들어 유난히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하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방북한 기간 동안 북한의 지뢰 도발에도 불구하고 통일부가 5차례나 고위급 회담을 요구하는 전통문을 보낸 것이나 유난히 이 사건에 대한 대응이 느리고 애매했던 것 역시 이런 맥락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와대 일각에서 “안 도와줘도 이렇게 안 도와줄 수 있느냐”라는 반응이 나온 것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 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0주년 광복절 중앙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근혜 정부가 처한 이런 딜레마는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드러난다. 박근혜 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 북한의 거듭된 도발 등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북한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민생향상과 경제발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며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을 언급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긴장이 고조돼있던 상황임에도 대화가 가능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본인의 공약인 DMZ 세계평화공원 조성 사업을 언급하고 남북의 철도와 도로 등을 연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북한은 도발과 위협을 내려놓고, 생명과 평화의 한반도를 만드는 길에 동참하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또, 박근혜 대통령은 “이산가족 문제만큼은 아무리 정세가 어렵고 이념이 대립한다고 해도, 인도적 견지에서 남북이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연내에 남북 이산가족 명단 교환을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가 지금 구상대로 북한을 대화의 테이블로 이끌어낼 수 있다면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치에서의 외교적 성과를 내는 길로 갈 수 있다. 문제는 지뢰 도발 사태에서 보여준 정부의 우왕좌왕 때문에 국내 여론이 악화된 상황에서 최소한의 우군을 찾기 힘들게 됐다는 점이다. 보수언론까지 나서서 정부의 아마추어적 정국 운용을 질타하고 북한이 박근혜 정권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박근혜 정권이 남북관계의 진전이라는 중차대한 과제를 얼마나 소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도발을 감행한 북한에 대해 ‘원점 타격’이나 ‘혹독한 대가’를 언급하는 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책임을 요구하는 원칙적이고 일관된 대응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