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예상대로다. 많은 사람들의 우려대로 올해 선거제도 개혁은 물거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선거구획정위원회가 정개특위에 선거구 획정 기준이 되는 선거제도의 개편을 마쳐달라고 요청한 날짜 8월 13일이 임박했다. 지금까지의 논의 양상을 봤을 때 막판 반전을 기대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논의가 제대로 됐다면, 결과가 서로에게 좀 미흡하더라도 용인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논의 자체가 중구난방이었다. 선거제도 개편 논의의 핵심 플레이어인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론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새정치민주연합이 의원총회를 열어 당론을 결정한 것이 10일이고, 새누리당은 아직도 당론을 결정하지 못했다. 양당의 정치인들은 당내 다수를 획득하는 방식으로 당론을 형성해내기 보다, 인터뷰와 브리핑을 통해 지극히 개인적이며 평론가적인 발언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누구는 국민에게 공천권을 돌려줘야 한다며 오픈프라이머리를 주장했고, 누구는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오픈프라이머리를 주고받는 빅딜을 제안했다. 또 누구는 비례대표와 의원정수 확대를 주장했고, 누구는 비례대표 폐지를, 누구는 의원정수 축소를 주장했다. 같은 당 의원들도 의견이 천차만별이고, 누가 언제 왜 이 주장을 했는지도 이제는 알기 어렵게 돼버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혹자는 정당 혹은 의원들이 자신들의 유불리만 따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관련 기사들도 대부분 선거제도가 요리조리 바뀔 경우 어느 정당에게 유리하고 불리한지에 대해서만 보도했다. 일면 맞는 말이다. 정치인이 정치적 계산을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유권자들의 표를 받아야 하는 이들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소리 높여 주장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난 것일까? 그렇게 해도 되는 어떤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 박형준 국회 사무총장이 1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새누리당 아침소리 모임의 '권역별 비례대표 토론회'에서 선거제도개혁 국민자문위에서 국회의장에게 보고한 개선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왼쪽 부터 함진규 의원, 박 총장, 김종훈, 하태경, 여상규, 황인자 의원. (사진=연합뉴스)

눈을 돌려 독일을 보자. 독일의 선거제도는 철저히 의석과 득표의 비례성이라는 가치 위에 서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2008년과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당시 독일 선거제도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당시에도 매우 높은 비례성을 자랑하던 독일 선거제도였지만, 보정되지 않은 초과의석과 투표수 기준 주별 의석 할당이 비례성을 해친다고 본 것이다. 이후 독일은 의석과 득표의 비례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더 큰 폭의 의원정수 변동을 받아들였다. 한국에서 그렇게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의원정수가 독일에서는 비례성을 높이기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다. 이것이 2013년 5월 9일 발효된 독일 연방선거법의 내용이다.

독일의 예를 든 이유는 사회적 합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독일의 바뀐 선거제도는 독일 사회의 의석과 득표의 비례성이라는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 수준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고서야 연방헌법재판소가 기존 선거제도가 갖고 있는 비례성의 작은 왜곡까지 잡아내 위헌 판결을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독일은 비례성 확장이라는 합의된 원칙 위에서 선거제도 변화에 대해 논의했고, 방향에 대한 합의가 있었기에 2013년 5월 발효된 연방선거법을 결과로 도출할 수 있었으리라 본다.

눈을 되돌려 한국을 보자. 이번 선거제도 개편 과정에서 논의 기반이 되는 합의된 가치를 찾을 수 있겠는가? 아니, 과연 어떤 가치든 간에 사회적 동의를 얻기 위한 노력이 존재했는가? 과연 지금 다종다양한 의견을 쏟아내는 분들 사이에 표의 등가성 또는 비례성이라는 가치에 대한 합의는 있는가? 아니, 더 근본적으로 입법부의 역할과 그 중요성에 대한 합의는 만들어졌는가? 만약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부정적이라면, 아래의 표와 같은 근거는 논쟁에서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다. 득표와 의석의 불비례성 따위 뭐가 문제란 말인가?

▲ (출처: “한국, 민의 반영 ‘선거 비례성’ 최하위… 비례대표제 국가는 상위”, <경향신문>, 2015-08-05.)

이러한 사회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흔히 동원되는 근거가 ‘국민’이다. 국민 정서에 맞지 않고, 여론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어떤 가치나 방향에 대한 여론이 아니다. 단순히 의원정수 확대에 찬성하냐, 반대하냐를 두고 진행된 여론조사 결과가 논쟁의 핵심 근거를 이루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설 곳이 없다.

또 눈을 돌려 보자. 이번에는 미국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최근 동성결혼 합법화, 오바마케어 합헌 결정 등 굵직굵직한 판결을 내놨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사회의 변화를 환영하는 연설에서 끊임 없이 미국 사회가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해 강조한다. 거의 모든 문장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로부터 이어진 자유, 평등, 정의 등의 가치가 변주되어 반복된다. 미국 사회는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논쟁을 통해 어떤 선택이든 할 수 있지만, 구성원들이 함께 발딛고 서있는 곳은 자유와 평등, 정의라는 기초 위라는 선언처럼 들린다. 싸워도 이 위에서 싸우라는 듯이.

다시 문제는 한국이다. 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가치와 방향에 대한 합의가 있다면, 세부사항들은 토론을 통해 조정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게 없다. 그런 것을 만들려는 노력도 잘 보이지 않는다. 선거제도 논의가 보여준 한국 사회의 곤란함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더라도 합의를 쌓아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어떤 논의를 통해 당장 사회제도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다. 그것이 우리가 어떤 사회적 기초 위에 함께 서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라도 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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