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심상정 의원이 정의당의 새 대표가 되었다. “새” 대표라기에 약간 미묘하긴 하지만, 어쨌든 4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결선까지 간 결과다. 둘이 합쳐 75%에 육박하는 득표율을 차지하고 결선에 진출한 것은 심상정 노회찬이었다. 나머지 25%는 노항래 후보와 조성주 후보가 가져갔다. 과거를 추억하는 의미에서든, 지겨워하는 의미에서든 상징적인 이름들이다. 정의당의 당대표가 둘 중 한명이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처음 떠올린 것은 2008년 총선에 등장했던 진보신당이었다. 그 당시 진보신당의 슬로건은 “심상정 노회찬과 함께하는 진보신당”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의당 대표 선거 초반, 노항래 후보와 조성주 후보가 대립상대로 삼은 것은 당연하게도 심상정 노회찬이다. 노항래 후보는 “돌려막기” 비판으로 심상정 노회찬의 반대표를 얻으려 했다. 한편으로는 통합적 리더쉽을 강조하기 위해 노동운동 출신이자 참여계임을 어필하기도 했다. 경선을 위해 제출한 약력도 노동운동 관련 경력 3개, 참여정부/참여당 관련 경력 3개, 정의당 경력 1개로 균형을 맞췄다. 색깔을 지우다시피한 노항래 후보와는 반대로, 조성주 후보는 자신의 색깔을 명확하게 만들었다. “2세대 진보정치”라는 슬로건으로 세대교체를 요구하는 한편 심상정을 명확한 타겟으로 삼았다. 청년유니온 정책기획실장과 서울시 노동전문관 등의 경력으로 정책통 이미지를 부각시킨 점이나, 임금피크제에 대한 발언 등으로 “합리적인” 진보의 이미지를 보이려 했던 점이 그렇다.

▲ 정의당 대표 경선에 출마한 후보들 (사진=연합뉴스)

언론에서 자주 정의당 내 최대계파라고 주장하는 참여계의 노항래 후보는 8.7%로 꼴찌를 면치 못했다. 언론의 마이너 리그에 대한 디테일한 아는 체는 믿을 게 못된다. 반면에 기획자로서는 충분히 인정받아왔지만 조직적으로는 낭인에 가까웠던 조성주 후보는, 17.1%를 득표하며 그의 슬로건 “2세대 진보정치”와 함께 그 무게감을 확고히 했다. 심상정 후보와 조성주 후보의 득표를 합치면 3574표, 심상정 후보의 결선 득표는 3651표다. 심상정 후보가 조성주 후보의 표를 상당수 가지고 갔다고 봐야한다. 아니면 애초에 조성주 후보가 심상정 후보의 표를 많이 이탈시킨 것이었거나. 조성주 후보는 결선에 가지 못했지만 “2세대 진보정치”라는 말은 한동안 회자될 것이다. 그리고 심상정은 당선소감으로 그의 오래된 키워드 “대중적 진보정당”을 다시 꺼내들었다.

대중적 진보정당과 2세대 진보정치는 그 자체가 노선이라기보다는, 진보정당/진보정치계에 놓인 문제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문제의식들은 2007년 이후로 상존해왔다.

심상정과 대중적 진보정당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을 통해 등장한 진보신당은 “낡은 진보 타파”를 선언했다. 낡은 진보는 명확하게 민주노동당 세력을 지목하고 있었다. 심상정은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기 직전에도, 진보신당이 창당한 후에도 “대중적인 진보정당”을 대의명분으로 삼았다. “대중”이라는 말은 참 모호하다. 모두를 가리키는 것 같지만 아무도 가리키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적”이라는 말은 더더욱 그렇다. 어쨌거나 진보신당은 그다지 새로운 진보를 보여주지 못했다. 보여주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 당의 당원들은 나름의 새로운 시도들을 하려 노력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때문이다. 언론과 저잣거리의 사람들은 진보신당을 새로운 진보라고 추켜세워주기도 했지만, 그들이 언급하는 내용이라고는 “민주노동당과는 북한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는 것 뿐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것만으로 충분한 시기였다.

심상정의 행보가 독특한 점이 있었다면, 보수야당에 대한 정치적 유연성이었다. 2008년 총선에서부터 그의 그런 행보는 과감하게 두드러졌다. 불과 1년전 까지만 해도 집권여당이었던 통합민주당의 한평석 후보와 단일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이 행보에 대해 “의석수만 생각하느냐”며 강하게 비판했지만, 얼마 못가 소위 “야권연대”는 민주노동당의 주된 선거전술이 되었다. 심상정은 이후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국민참여당의 유시민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했고, 이후 진보신당 탈당파와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의 통합으로 통합진보당이 만들어졌다. 야권연대 이외에 새로운 진보가 무엇인지 보여주지 못한 채, 다시 낡은 진보와 손을 잡기로 한 셈이다. 통합진보당은 얼마 후 안타깝게도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대규모 패싸움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하게 되고, 다시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지금의 정의당)으로 나뉘었다. 통합진보당과 정의당 모두, 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의 단일화 파트너로 인정받는 것을 생존전략으로 삼았다. 갈라졌다가 합쳐졌다가 다시 갈라진 두 세력은, 확실히 익숙하지 않은 혼종의 모습이 되었다. 진보로서는 새롭다면 새롭지만, 진보라는 수사를 빼면 새롭지 않은 모습이었다.

2015년 오늘에 와서 돌이켜보면, 대중적인 진보정당을 만드는 기획은 결국 실패했던 모양이다. 진보신당의 족보상 후신인 노동당에서 최근 “대중적인 진보정당”을 명분으로 한 집단 탈당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의당의 대표가 이정희가 아니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 대다수는 정의당이 진보신당의 후신이라고 이해하고 있겠지만, 유전적 형질이 얼마나 닮았느냐와 종가가 어디냐는 또 다른 이야기다. “낡은 진보”는 확실히 심판 받았지만 심판한 주체는 정의당도 국민도 아닌 헌법재판소였다. 통합진보당이 강제해산당하면서 정의당은 모종의 혐의들, 즉 “종북/패권주의”의 혐의로부터 해방되었다. 통합진보당이 그 혐의들을 다 떠안고 사라진 덕이다.

“대중적 진보정당”이란 말은 언론에 의해서든 진보정치인에 의해서든 수없이 이야기되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거기로 가기 위해서 어떤 길을 밟아야 하는지 자세하게 이야기된 적은 없다.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정치인과 운동권의 특성이다. 우리는 그 말이 슬로건으로 등장하던 시기들의 맥락으로 그 말의 의미를 추측할 수밖에 없다.

▲ 돌고 돌아 다시 대표에 오른 심상정 의원은 줄곧 '대중적 진보정당'을 말해왔다. 그 '대중'이 무엇이냐는 다소 불분명하지만 심 의원은 상대적으로 '보수야당'에 유연한 행보를 해왔다. (사진=연합뉴스)

2008년, “낡은 진보”와 대립하는 형태로 등장한 대중적 진보정당은 총선 이후 잠잠해졌다가 다시 2009~2010년 즈음에 등장한다. 2007년 즈음 등장했던 “진보의 위기”와 함께. 진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선들이 이런저런 세력들에 의해 제출되었다. “빅텐트”에서부터 “진보대연합론”, “진보의 재구성” 등등. 말은 거창하지만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다시 합칠 것이냐(진보대연합), 아니면 민주당까지 포괄해서 합칠 것이냐(빅텐트 혹은 반MB 민주대연합), 아니면 하지 말 것이냐(진보의 재구성)의 다른 말이었다. 이 노선논쟁은 크게 진보대연합과 민주대연합으로 나뉘어 불렸고, 진보대연합은 다시 그냥 진보대연합과 “선 진보대연합 후 민주대연합”으로 나뉘었다.

같은 시기에 참여정부의 관료들, 이른바 “친노” 세력 일부가 민주당으로는 정권 교체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며 신당 창당에 착수했다. 그 결과가 바로 국민참여당이다. 유시민의 설명에 따르면 국민참여당은 “대중적 진보정당”이며, 대중적 진보정당이 추구하는 것이란 “현실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최대한의 진보”였다. 국민참여당은 그해 지방선거에 전격적으로 뛰어들었지만,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얻었다. 사실상 제 1야당 교체의 꿈을 접을(혹은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국민참여당은 진보대연합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2011년 7월 유시민의 기자회견 발언, “민주당을 포함한 야당 전체 통합에 대한 국민들 요구는 현실(...)현재 말하기는 적절치 않지만 새로운 진보정당이 출범하면 논의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국민참여당의 전략은 선 진보연합 후 민주연합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심상정 경기도지사 후보가 유시민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며 기습사퇴를 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후 심상정 후보가 미디어오늘 인터뷰를 통해 회고한 바에 따르면 이는 “대중적 진보정당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문제인식” 때문이었다고 한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대중적 진보정당의 문제의식에 대해 “진보가 이념적 순수성을 고집하고 독자로 갈 것이냐, 진보의 비전과 집권 가능성을 열기 위해서 진보 중심으로 하면서 다원적 틀을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쉬운 문제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2011년에 가장 열심히 “대중적 진보정당”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진보정치세력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모임”(약칭 진보교연, 상임대표 김세균, 공동대표 손호철)이었다. 진보교연이 주장하는 대중적 진보정당이란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중적 세력만 늘리자는 것인데(진보교연의 주축세력 중에 이공계 교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참여당을 제외하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이 합쳐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2011년 5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민주노총, 진보교연 등의 대표자들이 모여 “진보진영대표자연석회의”의 최종합의문을 도출했고, 그 합의문은 “진보적 대중정당”이 “진보정치대통합으로 설립될 새로운 진보정당”이라고 설명했다. 다음해, 국민참여당과 민주노동당, 거기에 ‘새 진보정당 추진 모임’(진보신당 집단탈당파)이 통합되어 통합진보당이 창당했다. 통합된 “대중적 진보정당”의 운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창당한 그 해에 통합진보당은 중앙위원회 집단폭력사태라는 정말 새로운 모습을 국민들에게 생중계했고, 8월 초에 “진보적 정권교체와 대중적 진보정당을 위한 혁신추진모임”이라는 정말 긴 이름의 집단탈당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창당 결의문”을 발표하고 분당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진보정의당이다.

진보정의당은 창당 초기에만 해도 당권자 약 6천여명에 불과했지만, 매우 다양한 구성의 연합세력이었다. 구 집권여당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NL이라고도 불린다), 비민족주의 범좌파 세력이(PD라고도 불린다) 한 지붕 안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참여계, 인천연합, 노심계열로 불리기도 한다.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의 양분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당과 비슷한 착시현상을 일으켰다. 진보정치에 부여되었던 나쁜 이미지, 즉 종북주의와 패권주의 이미지를 통합진보당이 전부 안고 가면서, 진보정의당은 자연스럽게 혐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특히 노/심의 존재는 대중에게 그런 이미지를 어필하기에 매우 적절했다. 한편 선 진보연합을 통해 이후 통합야당의 지분을 확보하겠다는 국민참여당의(혹은 유시민 개인의) 계획은, 통합진보당의 양분으로 인해 종식되었다(혹은 지연되었다). 그리고 대중적 진보정당론도 다시 잠잠해졌다.

“대중적 진보정당”을 논하는 방식들이 복잡하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최소한 정의당 안에서는 이 말이 비교적 일관성을 띄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참여계의 노선은 위에 설명했듯이 선 진보연합 후 민주연합이고,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원했던 민족주의 계열의 노선도 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심상정과 노회찬의 경우 이 두 사람이 항상 노-심으로 불리며 패키지로 엮이지만 정말로 이 둘의 노선이 같은지는 불분명하다. 이번 정의당 대표선거에서 대중적 입지도가 높은 노회찬 쪽이 심상정에게 패한 점은, 이 “불분명함”이 낳은 변수라고 보아야 한다. 심상정 대표가 당선된 후 몇몇 언론에서는 이를 “이변”이라면서, 조직적 움직임보다 특정 성향을 가지지 않은 당원들이 힘을 발휘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것은 비논리적인 분석이다. 정보와 조직력이 적은 당원들은 후보 선택에 있어서 인지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마련이다. 1차 투표에서 “돌려막기”론과 “2세대 진보정치”론을 무시하고 심상정과 노회찬에게 75%의 표를 몰아준 것은, 대다수의 당원들이 “새로운 인물” 보다는 좀 늙었어도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스타로 돌파하자는 선택을 한 셈이다. 1차 투표의 결과 역시 지지도 순서가 사실상 인지도 순이다.

참여계와 민족주의자들의 표는 심상정에게 주어졌을 것이다. 이것은 결선투표 이전에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노회찬과 심상정이 민주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 탈당을 함께 했다는 것은 기억하지만, 이들이 선거에서 다른 선택을 해왔다는 사실은 자주 잊고는 한다. 두 사람의 선택이 극적으로 갈린 것은 2010년 지방선거였다. 당시 심상정은 유시민을 지지하고 경기도지사 후보를 사퇴한 반면, 노회찬은 서울시장 선거를 완주했다. 심상정은 유시민과 문재인을 지지하고 두 차례 사퇴를 했으며, 그 배경에 대중적 진보정당론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반면에 노회찬은 단 한번도 공직선거에서 사퇴한 적이 없다. 야권연대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는 모두 긍정적이지만, 노회찬은 자신이 당선되기 위한 전술로만 단일화를 선택했고 심상정은 그 반대였다. 대중적 진보정당론을 노선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심상정은 비판적 지지가 가능한 후보지만, 노회찬은 의심스럽기 그지 없는 인물일 것이다. 당 대표 선거는 노선을 결정하는 선거다. 정의당의 경선 결과는 심상정의 노선을 선택했거나, 노회찬을 견제한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심상정 신임대표는 당선인사에서 자신을 지지해준 표심에 화답하며 다시 한 번 대중적 진보정당을 언급했다. 정치인의 공식 문건은 단순한 수사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 '2세대 진보정치'를 표방한 조성주 후보의 활약은 비록 결선 투표까지 가진 못했지만 향후 거대한 얘기를 남겼다. 시사 주간지 표지 모델이 됐을 정도니 그 반향은 짐작할 만 하다. (사진=주간경향)

조성주와 2세대 진보정치론

“청년”이 절박하게 호출되는 시대는 단절된 시대다. 특히나 진보정치, 진보운동에는 청년활동가-대중의 소멸이 “진보의 위기”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고민거리였다. 세대를 이야기하는 것에 불쾌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젊은 사람에게 더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 진보적 청년 세대의 보급은 나이든 활동가-정치인들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갈 앞으로의 진보정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시간은 연속성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노동-진보의 지향성을 가진 정당들은 “당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정의당과 노동당 모두 민주노동당으로부터 파생되었다. 더구나 족보상 첫째도 아니라서, 유산을 제대로 이어받지도 못했다. 민주노동당 이후, 민주노동당에서 파생된 진보정당들은 점점 하늘 위의 섬 라퓨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진보정당이라는 섬을 떠받치고 양분을 공급하던 대중기반은 거의 소실되었다. 사람들은 “운동”이 아니라 “정치”를 하자고 강변하지만, 정작 소실된 것은 “운동” 쪽이다. 데모와 급진적 발언에만 신경 쓰는 것이 진보정당의 문제라고 진단하면 모르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거리겠지만 멸종 위기의 운동권들은 코웃음을 칠 일이다. 대중적 진보정당과 “현실정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부력을 얻어서 더 위로 올라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소실된 기둥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엔 상대적으로 관심이 없다. “현실적”이라는 말은 갖다붙이기만 하면 왠지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마법이 있다.

대중적 진보정당을 필두로 한 전략이 전세대-민주노동당 이후-의 유산들을 판돈으로 어떤 합종연횡을 이루어 몸을 부풀릴 것이냐에 집중하고 있다면, 2세대 진보정치론은 주변화된 대중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역점을 두고 있다. 조성주가 이야기하는 “2세대 진보정치”라는 말은 얼핏 보면 그저 리더를 젊은 사람에게 맡기라는 내용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출마선언문을 꼼꼼히 읽어보면, 주변화된 청년대중을 재조직하는데 무관심한 기존 진보정치를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내세우는 경력과 성과들, 그 의미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평가하기 나름이겠지만, 최소한 그는 사무실에 앉아서 “왜 청년활동가-대중이 대량으로 자연발생하여 깨달음을 얻고 나를 찾아와 지도를 요청하지 않지?” 따위나 고민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조성주는 심상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당의 중요한 진로를 결정하거나 큰 정치무대에서 자신의 방향성을 증명해보일 기회가 없었다. 조성주의 “2세대 진보정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자주파 학생운동가 - 청년유니온 - 2세대 진보정치로 이어지는 그의 글들의 궤적을 통해 그의 고민을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가 전통적인 학생운동에서 청년유니온 운동으로 관심을 이동시키기 시작한 동기는 2007년의 흔적에서 찾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대학생계층을 고통받는 집단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이는 생산관계와 연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했으며 실제 대학생이라는 집단은 졸업이후 미래가 보장되는 계층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중략) 문제는 (...) ‘반미’를 이야기하고 ‘조국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현재 고통받는 대학생들에게 ‘저들이 바로 내편이다!’라는 인식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 (민중집권을 위한 학생운동의 5년 전망, 2007년 11월 15일)

우석훈의 책 <88만원 세대>가 진보진영에 여파를 일으키고 “청년실업 100만”이라는 구호가 넘실거리던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대학생은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한 선봉대 역할을 하도록 요구받는 계층이었다. 극우 정권의 부활에 대한 불안과 상대적으로 민중운동의 약화라는 악조건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민중이 어려울 때 대학생이 일어서야 한다”는 상투적인 요구들을 더 잦게 하고 있었다.

이 시기 조성주의 의문은 “대학생이 정말 그런 것을 요구받을만한 계층인가?”에서 시작한다. 대학 진학률이 80%를 넘어선 시점에서, 대학생이 엘리트 집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엔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대적 차이, 세대적 상황에 대한 이론 제기를 무조건 분열 책동으로만 이해하려는 시선을 주의해야 한다. 그의 문제의식의 중점은 “그런 요구가 부당하다”가 아니라, “그런 요구로는 대학생을 움직일 수 없다”였다. 대학생의 처지에 문제가 있음을 제기한 이유가 단순히 청년세대로서의 “이유없는 반항”이 아니라는 점은 2008년에 쓴 글, “대학생운동, 선봉대가 아니다”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어떤 사회변혁운동도 현실의 물리적 조건을 벗어난 상상이나 추억의 공간속에서 벌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물리적 ‘시간’은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하던 흘러가게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사회변혁운동을 전개하는 세력은 ‘물리적인 세대교체’를 거부할 수 없다. (중략) 사회변혁운동의 물리적 세대교체의 시기가 점점 늦어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운동진영이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시점이 아닌가한다.” - (대학생운동, 선봉대가 아니다. 2008년 2월 25일)

2007년 경까지만 해도 그래도 반미 자주는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며, 전통적인 학생운동은 계속될 것이라고 전제하며 조심스럽게 주장을 펼치던 그는 2008년부터 다분히 공격적 어조를 띄기 시작한다. 대학생은 생존의 위기에 처한 당사자이며, 학생회 깃발로 그들을 조직하는 것은 어렵다는 주장을 과감하게 펼친다. 이 시기부터 그가 세대를 지칭하는 방법은 점차 “대학생”에서 “청년”으로 옮겨가며, 대학이라는 공간 외에서의 청년운동에 대한 고민은 점차 노동조합으로 집중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라는 노동을 하는 노동자로서 최저임금인상투쟁에 나서야 하는 당위성은 충분하다 (중략) 장기적으로 대학생들의 아르바이트 최저임금 문제를 이슈화시켜내고 이를 ‘아르바이트 노조’ 등의 형태로 발전시켜나갈 수 도 있다.” - (등록금 투쟁 이렇게도 해보자! 2008년 3월 20일)

청년세대의 노동조합에 대한 모색 끝에 그는 일본의 수도권 청년유니온에 착안하게 되고, 이후 청년유니온의 정책기획실장이 되었다. 청년유니온이 결성된 것은 2010년, 진보대연합 논쟁이 한참이던 시기다. 통합이냐 독자냐가 진보정치의 미래를 결정할 유일한 키워드인 것처럼 난리통이던 시기에, 그는 절실한 문제가 다른 곳에 있다고 주장한다.

“미래세대인 이들을 조직할 수 없다면 진보정당의 미래도 없다. 그런 면에서 진보양당이 청년세대 조직화나 청년문제를 의제화하는데 실패한 것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고민이 필요하다.”
- (통합, 지지하나 떨림도 설렘도 없다. 2011년 03월 23일)

그 시기에 그가 당 운동이 아니라 청년유니온에 집중했던 것과 통합 문제에 미온적이었던 것은 “정치보다 운동”을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 그 과정은 그가 “청년 정치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2012년 통합진보당이 결성된 후, 그는 총선 청년비례 경선 프로그램인 “위대한 진출”에 참여한다. 오디션을 통해 “BIG 5”라고 불리는 결선에 오르고 좋은 평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비례 경선은 바로 통합진보당 분당의 비극을 낳았던 바로 그 경선이었다. 결선에서 고배를 마신 그는 이후를 기약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2015년 정의당 대표 경선은 그로서는 재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그에게 가능한 원내진입 루트는 당선 가능성이 높은 순위의 비례대표를 받는 것이고, 그가 가진 재산은 결국 청년운동이다. 2016년을 그냥 넘기면 설사 청년정치, 청년운동의 필요성을 정의당 다수가 받아 안는다 해도 조성주가 선택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청년유니온이 집단적/공식적으로 정의당을 지지하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정의당에는 엄청난 메리트가 없기 때문이다. 그와 길을 함께하지 않았던 청년정치인들이 흔쾌히 자리를 양보해줄 리도 없고, “자, 이제 세대교체를 해봅시다”라고 나섰을 때는 정작 그의 나이가 약점이 된다. 2016년 총선을 넘기게 되면, 그는 대선에 출마가 가능한 나이가 된다. 40대 기수론을 이야기해야 할 처지다. 정의당 당대표 경선은 그에게 일종의 승부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출마의 변은 그가 주장해왔던, 혹은 고민해왔던 화두의 총화와 같은 성격을 가진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같은 앞선 세대의 경험이 아닙니다. 이미 그 경험은 충분합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노동운동 밖의 노동에 대한 경험과 대안 부족이야말로 지금 진보정치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가 아닙니까? (중략)우리의 혁신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기본으로 돌아간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우리는 남들이 주목하지 못한 새로운 가치를 통해 힘을 키워야 합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만큼 주목하지 못하는 그 새로운 가치는 바로 당원입니다. 당의 힘은 당원에 있습니다. 국회의원의 숫자는 정당이 가진 힘의 결과이지 정당이 가진 힘의 원인은 아닙니다. (중략)정의당은 박근혜 대통령과 싸우는 정당이 아닙니다. 정의당은 새누리당이나 새정치민주연합과 싸우는 정당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우리 정당의 본질적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정의당은 미래와 싸워야 합니다.” - (<두려움 없이 ‘광장’ 밖으로 과감히 나아갑시다> 2015년 6월 15일)

인용한 부분들은 운동이 1세대의 시간과 환경에 멈춰있다는 것, 그 결과 2세대가 대변해야 할 노동자대중이 광장 밖으로 밀려났다는 점을 지적하고, 1세대의 광장 밖으로 나가는 것이 전통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초심의 복원에 가깝다는 것, 당장의 (그것도 유효기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는)인지도에 매달리기보다 미래의 구도에 개입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진보의 위기

대중적 진보정당론이나 2세대 진보정치론이 완벽한 대답도 아니고 서로 반드시 상충되는 것도 아니다. 심상정이 2세대 진보정치론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조성주가 합종연횡에 꼭 반대한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없다. 어찌보면 이 말들은 그저 한 정당의 대표경선 과정에서 나왔던 “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들은, “진보의 위기”가 제출된 이후 상존했던 어떤 갈등을 대변한다.

노회찬은 정의당 대표 경선에서 2세대 진보정치론에 대해 정당의 세대교체는 노선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답변했지만, 그것은 별 반박이 되지 못한다. 정치인의 노선은 결국 자신의 생애주기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노회한 진보정당 운동가들이 끊임없이 상기시키려하는 것과, 그 기억 속에서 소거시키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분명히 짚어야 한다. 민주노동당 10석 시절의 강한 진보정당의 복원, 노동중심성과 현장의 복원, 끊임없이 과거시점의 전술을 상기시키는 목소리들 속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그 결과에 대해서만 향수한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10석을 위해 121명의 낙선자가 필요했다는 사실도, 노동자 운동의 융성이 그 시기 노동자들의 생활공간에서 움텄다는 사실도 소거되고 “운동보다 정치”라는 헛말만 맴돈다. 잃어버린 의석을 복원하려고는 하지만, 잃어버린 노력을 복원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합종연횡을 통해 지난 시기의 의석수를 당장 확보하기 위한 노력 속에서 정작 진보정치/운동가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지난 시기의 노동운동을 복원해야한다고 말하는 동안 노동자의 모습은 지난 시기의 현장 안에 갇혔다. 오늘날의 노동자들은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데도 말이다. 주변부화된 오늘의 노동자들, 노동자들의 생활공간과 그들의 상태, 일하지 않거나 일할 수 없는 노동자들의 존재는 소거되고 만다. 진보정당의 대다수 당원이 계급적으로 노동자지만, 대부분은 쉽게 자신이 노동자라고 자부하지 못한다. 오늘날 진보정치/노동자운동은 파편화된 노동자들의 존재를 찾아 헤매는 일부터 다시 해야 할 처지다. “알바생”을 노동조합으로 불러낸 것이 청년유니온이었고, 그들에게 “알바노동자”라는 이름을 찾아준 것이 알바노조였다는 사실은 그 세대의 처지를 찾아내는 것이 결국 그 세대에 의해서 가능한 일임을 의미한다. 이제 막 시작한 사람들과, 마감시간에 다다른 이들의 욕구가 같기를 바라는 것은 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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