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역에서, 유승민

“왼쪽을 바라보는 오른쪽. 그게 제가 생각하는 보수입니다.” -드라마 <어셈블리>에서 백도현 국민당 사무총장(장현성 분).

“누구를 찍어주지?” 2011년 한나라당 7.4 대표 경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당원인 한 지인이 물어왔다. 나는 “유승민을 찍어보는 것은 어떠냐”고 답했다. 유승민은 2위 득표로 최고위원이 되었다. 당시 그의 정책 공약은 파격적이었다. 추가 감세 중단, 비정규직 차별에 대한 징벌적 배상제 도입, 학자금 대출이자 절반 감면 등. 결정적으로 학교 무상급식 수용과 4대강 사업 비판까지 포함되었다.

실제로 해낼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주장 자체로 유용했다. 그무렵 지역에서도 학교 무상급식과 4대강사업은 최대 현안이었다. 구미시는 초등학교 1~3학년 무상급식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경북도의회가 교육청의 지원 예산을 삭감함으로써 제동이 걸렸었다. 구미시는 동시에 낙동강변에 골프장과 수상비행장을 건설하는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학교무상급식을 도입하고 강변난개발을 막으려는 사람에게는 학교 무상급식을 찬성하고 4대강사업과 강변난개발에 비판적인 한나라당 소속 대구경북 정치인의 존재가 절실했다.

유승민은 제 지론을 당론으로 만들지는 못했고 당 지도부에 오래 머물 수도 없었다. 다만 그를 예로 들어 한나라당에도 무상급식 찬성론자가 있고 4대강사업 비판론자가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이 의제들을 여야 대결 구도에서 건져내는 데는 얼마간 도움이 되었다. 예컨대 나는 이한구 의원이 강변 수상비행장 건설에 대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을 여러 자리에서 써먹고는 했으니까.

여당도 이를 “야당에 유리한 빌미를 주었다”고 경계할 일은 아니다. 유승민 같은 정치인이 있는 건 유승민 같은 새누리당 지지자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강변 골프장, 수상비행장 건설은 구미시민 여론조사에서 80%의 반대에 부딪혔다. 새누리당 지지자까지 반대에 나섰다는 방증이다. 유승민 같은 정치인은 이런 지지자들을 대변하고 붙잡아두는 새누리당의 정치인이다.

지역의 진보 활동가들은 시야가 넓고 말이 통하는, ‘왼쪽을 바라보는 오른쪽’을 고대하고는 한다. 이따금 나는 몇몇 활동가들로부터 유승민에게 받은 인상을 들은 바 있다. 우리는 그가 이번에 전국적 인지도를 얻기 훨씬 전부터 그를 알아보았다. 지역에서.

▲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13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 정당인 유승민

나는 박근혜 당선 직후 주변에 “유승민의 위상이 정권의 향방을 미리 가리킬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정권 첫해에는 김종인이, 2년차에는 이상돈이 이탈할 것이다. 유승민이 3년차에 어떻게 될지가 관건이다.” 여러 근거를 체계적으로 조립해 만든 관측은 아니었다. 박 정권이 얼마 안 가 망가질 것이라는 호언장담에 가까웠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되어 버렸다.

올 2월 유승민이 여당 원내대표로 당선되었을 때 때 이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승민과 '청와대 얼라들‘이 윈-윈할 것 같지 않았고, 그렇다면 그가 동료 의원들의 지지를 얻어 원내대표가 되었다는 것은 박 대통령이 여당으로부터 곧 내쳐질 것이라는 신호였다. 사람뿐만 아니라 기조에서도 청와대와 여당이 충돌할 수 있었다. 유승민이 원래는 2007년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의 ‘줄푸세’를 정립한 감세론자였다가 근래 들어 회심했다는 시각이 흔하지만, 처음부터 유승민은 ‘줄푸세’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실은 최경환 현 경제부총리의 작품이라는 전언도 있었다. 그게 맞다면 툭하면 증세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유승민이 정권과 화합하기는 거의 태생적으로 어렵다. 결국, 양측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유승민이 굽혔다 버텼다 꺾였다 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모골이 송연했다. 과거에는 친박 핵심으로, 나중에는 ‘탈박’으로 일컬어진 유승민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가지는 마음이 무엇인지, 나아가 그에게 새누리당이란 어떤 의미인지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그가 과거 이회창 국무총리처럼 대선 주자로 뜨고자 했다면 사과고 뭐고 할 것 없이 밀리면 밀리는 대로 사퇴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왜 대통령에게 사과하면서도 원내대표 자리를 지키려고 했는가. 내가 내린 답은 이것이었다. ‘그는 대통령의 마음을 달래고 자신이 직을 유지하는 것이 새누리당뿐 아니라 박근혜 정권을 성공시킬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에는 이런 정치인이 몇 명이나 있을까.

3. 싸드, 핵, 민병주와 유승민

사람이 전향적인 언행을 펼칠 때면 항상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본심과 주요 목적이 나타나 있다. 유승민 의원의 지난 4월 국회 연설은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에게 국가는 왜 존재합니까?”, “10년전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양극화를 말했습니다.” “가진 자가 더 많은 세금을 낸다는 원칙, 법인세도 성역이 될 수 없다는 원칙”,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는 정책은 우리 사회의 공정성과 양극화 해소 차원에서 강력히 추진” 등등의 발언으로 화제가 되었다.

한데 그 다음에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싸드의 한반도 배치를 반대하는 야당은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으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대안을 갖고 있습니까?” 복지, 조세, 심지어 노동에서조차 야권에서 하던 말을 받아들이는 여권 정치인이 절대 놓지 않는 정책이 ‘싸드’였다. 그가 원내대표에 오를 때 같이 정책위의장에 당선된 원유철 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심지어 핵무장론자이다. 7월 14일 녹색당이 낸 논평이다. “새누리당은 핵무장론자나 사드 배치론자를 지도부로 선출하는 정당이다. 이것이 반전반핵평화를 기치로 건 녹색당이 새누리당의 본질을 판단하는 주요 근거이다.”

녹색당은 지난 2012년 총선 당시 새누리당 비례대표 1번 민병주 후보를 두고 맹공을 가했다. 핵물리학자인 그는 핵발전소 안정성 심사에 참여해오며 고리1호기의 10년 연장을 결의한 장본인이다. 그런데 그 민병주 의원은 ‘유승민 계보’ 10여명 의원의 일원으로 꼽힌다. 핵무장론자와 러닝 메이트를 맺어 원내 지도부 경선에 나서고 핵마피아로 불리우는 핵물리학자를 제 계보에 두고 있는 유승민이다. 그리고 그가 이 분야에서도 복지 담론에서처럼 전향적이거나, 박 대통령에게 했듯 몸을 굽힐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을 대비한다.

“복지(혹은 경제)는 진보적으로, 안보는 보수적으로.” 2010년 지방선거 이후 보편적 복지와 경제민주화의 메아리가 거셀 적에, 저렇게 이야기하는 정치인을 반기는 진보적 인사가 많았다. 대타협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구현된 것은 작고, 그 ‘보수적 안보관’은 잦아드는 법 없이 스멀거린다. 유승민은 한국 보수의 미래인가? 그렇다면 그 미래는 어떤 세상인가? 무상급식, 정규직화가 싸드 같은 무기나 핵발전소와 동거하는 세상일까. 그것 모두가 공존하지 않는다면 선택받는 것은 무엇일까.

유승민이 박근혜의 무자비함과 몰염치에 꺾이던 그날, 정의당 대표선거 후보마저 “오늘 우리는 모두 유승민이다”라고 선언했지만, 녹색당 당원인 나는 그 대열에 설 수 없었다.

김수민 / 경북녹색당 사무처장
안티조선운동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돼 개혁당과 민주노동당에서 정당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 말 민주노동당이 분리된 후 진보신당에 몸을 담았다가 2009년 탈당해 출마를 결심하고 고향인 구미로 내려가 무소속으로 기초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시의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대형폐기물 민간위탁을 막는 조례를 재개정하고 구미 단수 사태에 대해 시민단체들과 수자원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부분 승소하는 등 모범적 활동으로 주목받았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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