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종종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서는 비평이 필요하다. '정치 멀리보기'는 분명한 관점과 과감한 전망을 바탕으로 정치적 사건을 전체 맥락에서 재구성하고자 하는 심층 기사이다. 3류 정치평론처럼 소설의 영역으로 가보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허황된 망상이 아니라 근거 있는 정치평론의 도를 추구한다.

24일 국회에서 총 11조5천639억원 규모의 추경예산안이 처리됐다. 애초 정부안에서 약 2천638억원이 삭감된 결과다. 논의과정에서 메르스 대책, 가뭄·장마 대책,서민생활 안정, 안전투자 및 지역경제 활성화 등의 세출 항목이 증액됐고 사회간접자본 예산 2천500억원 등은 삭감됐다.

추경예산안이 제출된 지 18일 만에 신속하게 통과된 데 대해 일각에서는 여야가 서로 윈-윈한 결과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모처럼 메르스 및 가뭄 대책 추경이라는 성격을 잘 살린 데다 만성적 세수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야당이 주장한 법인세율 정상화가 ‘법인세 정비’라는 표현으로 일부 반영됐기 때문이다. 여당은 제때 예산을 투입해 경기회복을 도모할 수 있는 실리를, 야당은 ‘발목잡기’ 등의 비난을 받지 않으면서도 여당의 성역이나 다름없었던 법인세 문제를 건드릴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여기에 애초 야당이 주장한 국정원 해킹 의혹 관련 청문회가 현안보고 형식으로 반영된 것도 성과라면 성과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의원들의 분위기는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추경예산안 협상 과정에서의 성과를 강조하면서도 지역상권에 대한 온누리상품권 관련 예산이 삭감됐다는 점과 메르스 피해 복구 예산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아쉬운 요소로 언급했다. 특히 메르스 피해 복구 예산과 관련해서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한밤 브리핑’을 통해 진행된 서울시 개포동 재건축조합원 격리 비용이 삭제됐다는 점이 주요하게 언급됐다. 협상 당사자였던 이종걸 원내대표도 “나랏돈을 이렇게 근거 없이 쓸 수 있는가”라며 “절반 정도의 불쾌감이 남았다”고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이러한 불만스러운 기류는 추경예산안에 대한 표결에서도 드러났다. 야당 소속 의원 중 22명이 반대 표결을 하고 35명은 기권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협상을 주도한 이종걸 원내대표와 이춘석 원내수석부대표도 각각 반대, 기권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협상을 주도한 원내지도부라 하더라도 지역구나 소속 상임위 상황을 감안해 나름의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겠으나 상식적인 차원에서 흔치 않은 일로 보이는 건 사실이다.

이런 맥락을 보면 윈-윈 게임이었다기보다는 새정치민주연합 쪽이 손해를 본 ‘게임’이지 않았는가 싶다. 애초 이종걸 원내대표는 추경예산안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며 “정부가 제출한 11조8천억 원 중 세수결손 보존 위한 5조 6천억 원의 편성은 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5조 6천억’이라는 돈은 세수결손을 보존하기 위한 세입경정으로 전액 국채로 발행하도록 돼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세입결손이 고질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정부가 애초에 성장전망치를 잘못 예측해 생긴 문제점이므로 이에 대해 정부가 사과하고 법인세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왼쪽)과 이종걸 원내대표. (사진=연합뉴스)

새정치민주연합의 주장에 대해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세수 부족에 따라서 세입경정 추경을 요청해서 결과적으로 재정건전성에 부담을 초래한 것에 대해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는 내용의 사과를 함으로써 쟁점이 해소된 모양새지만 어찌됐건 이종걸 원내대표가 “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한 대목을 ‘물린’ 것은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법인세 정상화의 경우도 새정치민주연합이 이명박 정부 때부터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사안인데 이번 추경예산안 국면에서도 일관된 주장을 내놓은 것에 대해 긍정적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전술이라는 측면에서 법인세 정상화와 관련한 충분한 의미부여가 대중적 차원에서 제기됐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의문이 표시될 수밖에 없는 것은 새정치민주연합이 추경예산안 처리 국면을 충분히 활용한 정치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경예산안과 관련한 쟁점은 단지 경기활성화를 위한 재정 지출과 세입결손의 보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국정원 해킹 의혹이라는 ‘치명적인’ 요소가 폭발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원내지도부는 청문회와 추경예산안 처리의 연계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는 22일 고위당정청회동 이후 국정원 문제에 대한 여당 내의 분위기가 ‘강경기류’로 변화하였기 때문이지만 추경예산안과 국정원 문제를 연계하는 전술에 대한 대중적 설명이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민들이 공무원연금 개혁과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새누리당의 ‘민생과 정쟁을 구분하자’는 프레임에 말려들어갈 소지가 다분했던 것이다.

국정원 해킹 의혹과 관련해서는 보안 전문가인 안철수 의원을 필두로 전병헌 최고위원 등이 ‘마티즈 차량 바꿔치기 의혹’ 등을 제기하고 있으나 사태의 전모가 밝혀질 가능성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국정원은 일관되게 민간인에 대한 사찰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담당 실무자는 중요한 파일을 삭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국정원은 이를 복구한다면서 시간을 끌고 있다. 시간은 국정원의 편이다. 증거를 인멸하고 상황과 증언을 끼워 맞추는 데에는 어쨌든 시간이 필요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가 정치적 판단을 해야 한다. 국정원 해킹 의혹을 붙들어 놓고 아예 정국을 멈춰 버리거나, 출구전략을 준비하고 이슈를 전환하거나의 문제이다. 만일 정부의 추경편성을 전술적으로 활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면 이 기회에 보수정권 10년의 경제정책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국면을 조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입결손은 박근혜 정부 출범 첫 해부터 문제가 됐었다. 이는 이명박 정권이 성장률 예상치를 과다하게 잡고 산업은행 민영화 등 실현 불가능한 정책을 예측해 세입을 부풀렸기 때문이다. 예산은 적자예산이든 균형예산이든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세입예산이 부풀려진 상황에서 세수가 예상대로 걷히지 않으면 애초에 할 수 있었던 사업 지출도 못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수를 더 확보하거나 애초에 세입예산 자체에 낀 거품을 제거해야 하는데, 주지하다시피 박근혜 정권은 세수 확보에 대해서는 대책을 갖고 있지 않다. 세입예산의 거품을 줄이기 위해 실질적인 ‘액션’을 보여줬던 인사는 이 정부의 첫 경제수석을 맡았던 조원동 전 수석이 거의 유일하다.

이런 맥락을 잘 복기해보면 새정치민주연합이 있으나마나한 경제팀과 각을 세우고 문재인 대표를 중심으로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되는 ‘유능한경제정당위원회’ 등의 활동을 바탕으로 ‘법인세 정상화’ 이상의 대안을 제시할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이 추경예산안을 다루는 방식은 오히려 관성에 빠져 무기력과 무성의로 일관한 것처럼 비춰진다. 앞서 언급한 이종걸 원내대표의 반대표결 역시 이런 상황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서가 아닌가 한다.

많은 국민들이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해 “무엇을 하려는 정당인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당 내외의 분열상이 겹치고 있는 것은 비극이다. 제1야당이 하려는 바가 뚜렷하고 이를 보다 잘 이루기 위해 분열하는 것이라면 그건 그나마 긍정적인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루려는 것도 없으면서 오로지 공천권 쟁취를 위해 분열하고 있다는 인상만을 준다면 남는 것은 절망뿐이다. 그냥 ‘경제정당’이 아니라 ‘유능한’ 경제정당을 표방한 것에는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보여주고 실제로 그것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능한 경제정당’이라는 슬로건은 총선 공약을 잘 만드는 정도로 귀결돼선 안 된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유능한 경제정당이 되려면 바로 지금부터 유능해야 한다. 그러한 유능함을 보여줘야 당 내외에서 작용하고 있는 원심력을 극복할 수 있다.

▶[정치 멀리보기] 더 찾아보기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