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개혁’ 앞에 전운이 고조되고 있다. 고위 당정청 회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뤄진 이 주제는 새누리당이 과거 노동부 장관을 지냈던 이인제 최고위원을 ‘노동시장선진화특위’ 위원장에 임명하면서 속도감이 증가하고 있다. 정부 여당 관계자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개혁’의 주요 쟁점에 대해 ‘쉬운 해고’를 가능하게 하고 노동조합을 무력화하자는 것이라며 반발하는 노동계를 설득해야 한다고 발언하고 있는데, 여기서 ‘설득’이라는 것은 노동계의 의견을 수렴해 반영하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안 따라오면 우리끼리 해버리겠다’는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고전적인 의미의 설득과 타협은 야당이 언급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22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노동개혁은 방법과 절차에 있어서 사회적 대타협과 합의가 중요하다”면서 “정부와 새누리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식으로 노동개혁을 하려고 하면 실패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야당 일각에선 정부 여당이 주장하는 노동개혁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라는 반발도 나왔다. 과거 김영삼 정부 시절 노동법 개악안을 ‘날치기 통과’ 시켰다가 광범위한 반발에 부딪쳤던 사례가 언급되기도 했다.

▲ 동아일보 24일자 사설

야당의 이런 주장에 보수언론은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동아일보는 24일 지면에 <새정연, ‘대타협’ 들먹이는 건 노동개혁 않겠다는 이야기>라는 제목의 사설을 배치했다. 문재인 대표가 위와 같은 발언을 한 것에 더해 국회 환노위 야당 측 간사 이인영 의원이 정부가 주도하는 노사정기구가 아닌 국회가 적극적 역할을 하고 양대노총이 참여하는 새로운 협의체를 구성하자고 주장한 것 등에 반발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이 사설에서 공무원연금법 개정 당시 공무원단체가 실무기구에 참여해 ‘맹탕개혁’으로 끝나고 말았다고 지적하며 “사회적인 논의는 필요하지만 이익단체에 휘둘린 사회적 기구로 노동개혁이 물건너 가면 한국 경제는 저성장과 일자리 부족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외국의 사례까지 언급하며 야당을 압박하는 모습을 보였다. 문재인 대표가 독일, 스웨덴 등의 노동개혁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통해 노동개혁을 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이 발언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동아일보는 “독일 하르츠 개혁을 비롯한 성공적인 노동개혁의 이면에는 ‘표를 잃을 각오’로 이해 당사자들에 흔들리지 않고 개혁을 추진한 정치인들의 리더십이 있었다”면서 최근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자신의 친정인 노동당을 향해 “전통적인 좌파 공약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광범위한 중도층에 호소할 때, 기업을 지지할 때 승리할 수 있다”고 발언한 사실을 새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주장을 ‘전통적인 좌파 공약’에 빗댄 셈이다.

국내의 ‘노동개혁’ 문제를 논하기 위해 영국 노동당의 내부 분파투쟁의 사례까지 인용해야 한다는 사실은 놀랍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 발언의 맥락은 최근 노동당 내 차기 대표 경쟁에서 ‘강경파’로 불리는 제러미 코빈 의원이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에 대한 견제의 성격이 크다. 제러미 코빈 의원을 지지하는 노동당 내의 기류는 지난 선거의 패배가 보수당 정부의 긴축 정책에 찬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거 패배 이후 양극단의 주장이 돌출하고 있는 과정에서 나온 주장들인 셈이다. 제러미 코빈 의원은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평가하며 토니 블레어 시기 노동당과 ‘제3의길’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노동당을 이끌던 시기 ‘빨갱이 켄’이라 불렸던 켄 리빙스턴 런던시장을 쫓아냈다. 이 맥락에서 평가하자면 새정치민주연합의 주요 정치인들은 소위 ‘좌파’들 보다는 토니 블레어 전 총리 측에 더 가깝다. 단지 사회적 대타협을 주장했다고 해서 새정치민주연합을 제러미 코빈 의원과 같은 사람들에 비견하는 건 무리다.

독일 노동개혁에 대한 동아일보의 주장 역시 사례를 반쪽만 본 것이다. 하르츠 개혁은 사민당 정부가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한 것이긴 하지만 사회적 타협을 시도하는 최소한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건 아니다. 지난 5월 방한한 페터 하르츠 박사는 당시 노동계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해고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약속한 뒤에야 협상이 진전될 수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노동시장 개혁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고 발언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정부여당은 해고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기는커녕 대놓고 쉬운 해고를 말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새정치연합은 비정규직과 청년 백수의 한숨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문장으로 사설을 끝맺고 있는데, 이는 야당과 노동계에 대한 전형적 압박 논리다. 고용이 경직되고 정년이 연장되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신규 인력을 채용하지 않으니 노동개혁을 통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고 쉬운 해고를 가능하게 하는 등 노동유연성을 제고해 청년실업을 해소하자는 게 정부 여당의 논리다. 야당은 이에 대해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고 반론하고 있으나 보수언론들은 정부 여당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쓰고 있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 6면에 ‘長·靑 대타협 청년에게 일자리를’이라는 이름의 기획기사를 배치했는데 기성세대가 청년세대의 실업에 대해 걱정하며 임금피크제 도입, 일자리 창출 기업에 대한 세제혜택 등을 주장하는 게 핵심 내용이다. 조선일보는 <‘열정 페이’ 횡포 막으려면 인턴도 노동법으로 보호해야>라는 제목의 사설도 지면에 실었는데 현행 노동관련법에 인턴의 법적 지위나 권리를 구체적으로 정하고 사업장들이 인턴 고용과 관련한 내부 가이드라인을 갖춰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 조선일보 24일자 사설

단순하게 보면 청년세대가 질 낮은 일자리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을 해소하자는 것 같지만 결국 조선일보가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열정 페이’의 문제가 근로기준법을 피해가기 위한 기업과 기득권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라는 점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결과에 가깝다. 1996년 노동법을 개악한 이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양산되자 그들을 법적 테두리 안에서 보호하겠다며 비정규직법을 만들 때 동원한 논리와 유사한 점도 있다. 이런 점에서 조선일보의 주장은 청년세대가 직면한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규직-비정규직 격차가 확대된 것에 새로운 불안정노동계층을 추가해 제도화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공산이 다분하다.

지금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 노동개혁은 대기업이 뭔가를 먼저 내놓겠다고 약속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상황까지 왔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에서의 대기업들은 그런 의지를 보여준 바가 없다. 최경환 부총리가 기업의 사내유보금을 가계로 흘러들게 하겠다고 공언하고 이와 관련한 입법을 추진하였으나 결국 ‘시늉’에 그쳤다. 박근혜 대통령은 기업들 24일 대기업 총수 17명과 오찬을 갖고 창조경제에 협력할 것과 ‘노동개혁’에 동참할 것을 주문할 예정이다. 이 자리에서 전경련 등은 기업인 사면 문제도 우회적으로 건의하겠다는 입장이다.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보면 대통령은 대기업을 ‘압박’하기보다는 양해를 구하거나 협력을 요청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런 과정에서 ‘주고 받아야’ 하는 문제도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개혁’에 수반되는 고통은 힘없는 사람들이 뒤집어 쓸 것으로 예상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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