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종종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서는 비평이 필요하다. '정치 멀리보기'는 분명한 관점과 과감한 전망을 바탕으로 정치적 사건을 전체 맥락에서 재구성하고자 하는 심층 기사이다. 3류 정치평론처럼 소설의 영역으로 가보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허황된 망상이 아니라 근거 있는 정치평론의 도를 추구한다.

정부와 청와대, 새누리당은 22일 고위 당정청 회동을 갖고 노동개혁을 위해 힘을 합치기로 합의했다. 새누리당은 박근혜 대통령이 추진하는 4대부문 개혁에 발맞춰 공공, 노동, 금융, 교육의 각 분야에 대해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입장이다. 새누리당은 1차로 노동개혁 관련 특위를 만들고 23일 위원장에 김영삼 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맡았던 이인제 최고위원을 임명했다. 특위의 이름은 ‘노동시장 선진화 특위’로 결정됐다.

이를 계기로 당정청 사이에는 언제 그렇게 대립했냐는 듯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22일 총리공관에서 진행된 고위 당정청 회동에 참석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원유철 원내대표, 김정훈 정책위의장, 황진하 사무총장, 황교안 국무총리, 최경환 경제부총리, 황우여 사회부총리,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 현정택 정책조정수석, 안종범 경제수석, 현기환 정무수석 등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았다고 한다. 박수가 터져 나오고 웃음꽃이 피었다고도 한다. 이례적으로 당정청이 회동하면서 식사를 함께 했다는 것도 ‘내전 종식’을 알리는 하나의 신호처럼 받아들여지는 상황이다.

여권이 이렇게 다시 신속하게 힘을 모은 것은 세월호 참사, 청와대 문건유출 사건, 메르스 사태에 이어 다시 국정원 해킹 의혹 사건이 화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정청이 삐걱대는 상태가 계속 이어질 경우 위기관리에 실패해 올 하반기 국정운영 동력의 상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고위 당정청 회동에 참석한 인사들은 국정원 문제에 대한 논의를 따로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를 의심케 하는 정황이 감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당정청 회동 이전까지 정치권에서는 국정원 해킹 의혹에 대한 비공개청문회를 국회 정보위 차원에서 개최하는 방안을 검토하였으나 22일 고위 당정청 회동 이후 새누리당 내 기류가 ‘청문회 불가’로 선회한 것이 대표적인데, 결국 청와대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새누리당의 입장이 변화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22일 오후 삼청동 총리공간에서 열린 고위 당정청회의에 앞서 참석자들이 음료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실제로 23일 새누리당 최고위원회를 전후한 상황에서 주요 인사들은 국정원 해킹 의혹에 대한 강경한 발언을 쏟아냈다. 김무성 대표는 “국정원은 우리 국가의 안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직인데, 지켜져야 될 비밀을 공개하자는 것은 조직 해체나 다름없다”며 야당의 청문회 요구를 일축했고, 서청원 최고위원 역시 “98년도에 전 정권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가? 국회의원 10명, 20명, 30명을 협박해서 빼가고 도청해서 국정원장이 구속됐다”며 “자기들이 제발 저려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해 야당의 청문회 요구를 강하게 비난했다. 특히 서청원 최고위원은 국정원이 전 세계 해커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조선일보의 이날 보도를 인용하기도 하고 국정원 문제 관련 발언을 따로 하지 않은 원유철 원내대표에게 발언을 재촉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 이 문제에 대한 ‘친박’ 내부의 기류를 그대로 드러냈다.

김무성 대표가 “표를 잃을 각오로” 노동개혁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공언한 것도 당청관계의 기울기가 청와대로 쏠리기 시작한 상황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김무성 대표는 고위 당정청 회동 전인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농성 중인 한국노총 지도부를 방문해 박근혜 대통령이 하반기 주요 국정과제로 언급한 노동개혁의 당위를 설명했다. 김무성 대표는 이 자리에서 “정부 주장만 할 수도 없고 노동계 주장만 들을 수도 없다. 정치권이 양쪽을 설득하면서 절충해야 한다”고 발언했는데, 이는 한국노총이 노사정위에 복귀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보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임과 동시에 김무성 대표 자신이 이 문제에 있어서 중심을 잡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노총은 지난 4월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대타협의 결렬을 선언하고 논의 테이블에서 이탈한 바 있다. 한국노총을 이탈하게 한 주요 쟁점은 임금피크제 도입과 일반해고를 가능케 하는 근로기준법상 해고 요건 완화, 노동자에 불이익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취업규칙을 변경할 시 노동자 절반 이상의 동의를 얻도록 한 규정의 변경 등이다. 노동계는 이를 쉬운 해고를 가능하게 하고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기 위한 시도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21일 국무회의에서 “한국노총의 대타협 결렬 선언 이후 핵심 과제에 대한 논의가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면서 “조속히 노사정 대화가 재개되도록 범정부적인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노사정위원회를 빨리 가동해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한 바 있다. 청와대의 이런 기류에 따라 여권 주요 관계자들 역시 노동개혁을 위해서는 한국노총 등 노동계를 설득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김무성 대표가 지난 2013년 철도파업 당시 철도노조를 설득해 사태를 해결하는 데 역할을 한 것처럼 이번에도 정치력을 발휘해 한국노총을 노사정위에 복귀시키는 등의 성과를 내면 박근혜 대통령의 의사에 따라 움직이면서도 자신의 정치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2인자’의 역할을 내외에 각인시킬 수 있게 된다. 즉, 노동개혁의 성사를 위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느냐는 김무성 대표의 입장에 있어서는 ‘차기 대권주자’의 입지를 굳히면서 이를 살아있는 권력인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인정받는 계기를 만드는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인 셈이다.

▲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이 23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원유철 원내대표에게 국정원 해킹 사태에 대한 여야 협상 상황에 관해 질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무성 대표의 이런 입지를 고려해 다시 국정원 문제로 돌아오면 이후 여권의 대응에 대한 예상이 가능해진다. 이병기 국정원장이 그간 비교적 전향적인 태도로 의혹의 해소를 공언해온 것과는 달리 당정청이 국정원 해킹 의혹을 적극적인 태도로 방어하면서 야당에 반격을 가하는 모양새가 두드러질 것이라는 얘기다. 이를 통해 국정원 측은 의혹을 해소할 준비를 하기 위한 최대한의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보안 전문가인 안철수 의원을 앞세운 새정치민주연합은 ‘본전도 못 건지는’ 처지로 내몰릴 수 있다.

지금 상황 전반의 ‘키’를 쥐고 있는 김무성 대표는 유승민 전 원내대표로 상징되는 중도층을 공략하기 전에 자기 지지층을 내실 있게 다져야 하는 입장이다. 이념으로 보면 극우에 가까운 보수층이고 연령으로 보면 50대 이상 고령층이며 지역으로 보면 대구경북(TK)권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구성하는 계층이다. 대권을 노리는 김무성 대표로서는 일단 이들의 흔들리지 않는 지지를 획득하고 중원으로 나가 승부를 걸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정원 해킹 의혹에 대한 처신과 노동개혁 문제에 있어서의 성과가 중요한 국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2일 고위 당정청 회동의 분위기와 이후 이어지는 상황들은 바로 이 점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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