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는 기술적으로 빼어난 카체이싱(car-chasing; 자동차 추격) 영화다. 포스트-아포칼립스(인류 문명이 몰락 뒤 세계를 배경으로 삼는 장르)라는, 하나의 하위장르를 정립시킨 전설적인 장인이 다시 나타나 “카체이싱 영화는 이렇게 만드는거야!”하고 가르쳐주는 듯 하다. 게다가 이 영화는 영화 속 기호들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 설명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굳이 엔딩에서의 비장한 자막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가 동시대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를 지닌 텍스트임을 강조하고 싶을 것이다.

이는 능히 예측할 수 있는 반응이다. <분노의 도로>는 세계의 파멸 이후를 다뤄온 ‘매드맥스 시리즈’ 네 편 중 가장 현실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다. 더구나 그것은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분담하고 있는 세 개의 캐릭터(퓨리오사, 맥스, 눅스)를 통해 분열증적인 자아를 다루고, 정신분석의 도식에 따라 설명하기에도 부적절하지 않다. 게다가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토픽은 이 영화가 결여를 지닌 주체들의 해방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임모탄(휴 키스-번)이라는 독재자에 의해 지배 받는 남성우월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에 맞선 대안으로 ‘모계사회’를 제시하기도 한다. 영화 속의 갖가지 기호들과 매력적인 캐릭터, 빼어난 플롯 구성과 전무후무한 만듦새의 폭발적인 이미지 운동과 영화 내내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리드미컬한 음악까지. 어디 하나 흠 잡기 어렵다는 점에서 믿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분노의 도로>의 여러 상징들이 흥미롭고, 설명충이 되고픈 욕구를 불러일으킴에도 불구하고, 그 기호들의 의미를 하나하나 열거하는 것은 이 영화를 한 5퍼센트 정도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 이 영화의 진정한 미덕은 영화 자신의 ‘운동’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노의 도로>를 보며 우리는 여러 영화들을 떠올려볼 수 있는데, 스타일적 측면에서 본다면 <데스프루프>(쿠엔틴 타란티노)는 좋은 비교거리가 될 수 있을 게다. 쉴 틈 없이 폭주하는 카체이싱 영화이자, 마지막에는 여성들이 이기는 영화. 그러나 타란티노의 카메라는 어딘가 불편하다. 마지막에 무의식적으로 증폭시키는 아드레날린적 요소 역시 불쾌하기 짝이 없다. 만듦새는 훌륭하지만 시점 자체에 동의하기 어렵기때문이다.

포스트-아포칼립스

알다시피 ‘매드맥스 시리즈’의 출발은 호주의 카체이싱 액션 B급 영화이다. 멜 깁슨을 일약 스타덤에 올릴 정도로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했었고, MBC <주말의 명화> 오프닝에도 삽입되어 있을 정도로 국내에도 인기를 구가했다. 세계가 무정부주의적인 혼돈을 겪기 시작했을 때 맥스라는, 고속도로 경찰 출신의 고독하고 싸움 잘 하는 남성 히어로가 나타나 악당들에 맞서 싸우며 끝없이 방황하는 이야기. 60년대 이후 B무비의 사랑받는 소재인 카체이싱을 종말적인 상황에 버무리니 흥미로운 영화가 탄생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시리즈는 무명배우 멜 깁슨을 헐리우드 스타로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애초에 매드맥스 시리즈가 그랬듯 <분노의 도로>에서도 우리는 서부극의 전형을 엿볼 수 있다. 고독한 방랑자가 악한들에 의해 운영되는 도시에 도달하고, 그곳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만난 방랑자가 사막에서의 격렬한 추격 끝에 악당들을 물리치고 도시를 되찾지만 다시 먼 방랑의 길을 떠난다는 이야기. <분노의 도로>는 정확히 이런 플롯을 뒤따르고 있다.

왜 수작인가

모름지기 자동차 추격씬은 상업영화의 백미 중의 백미다. 관객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사로잡으며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분노의 도로>는 서부극 요소와 현대적인 액션 영화의 요소를 화려하게 결합함으로써 운동-이미지의 동역학만으로 직조해낸 걸출한 카체이싱 영화다. 이런 점은 대중들과 평론가들의 열광을 동시에 거머쥐게 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이 동역학은 스크린의 수평 구조와 영화 속에서 가장 계급적인 공간인 ‘시타델’의 수직 구조를 탁월하게 활용하고 있다. 지배자는 위에, 물에 굶주린 군중은 저 아래 메마른 땅에 머무르며 위에서 떨어질 물을 갈구하는 수직 구조로 된 시타델에서의 탈출이 실패하고 ‘피주머니’ 신세로 전락한 맥스(톰 하디)는 광범위하게 펼쳐진 수평의 사막을 쉴 틈 없이 달린다. 영화의 상당 시간은 여기에서 할애되고 피 튀기는 전투가 끝나자 사람들은 다시 시타델 위로 올라가고 축적해놨던 물을 방출함으로써 세상의 전복을 이루는 구조다. 이와 같은 수평과 수직의 운동을 복합적인 직조는 영화의 운동을 입체적으로 만들어내는 효과를 발휘한다. 게다가 기존 질서의 전복이라는 이야기를 펼치기에는 무엇보다 훌륭한 세팅이 아닐 수 없다.

<분노의 도로>의 인물들은 모두 반쯤은 미쳐있다. 지옥도와 같은 모래폭풍을 눈 앞에 두고도 “What a lovely day!”라고 소리치며 독재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 광신도 눅스(니콜라스 홀트)는 실은 지독한 외로움과 불치병에 걸린 미성숙한 소년이고, 사건의 발단이자 영화의 주요한 축인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는 ‘녹색의 땅’이라는 상상 속의 이상향을 쫓으면서도 그곳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영화 초반 내레이션에서 드러나듯 맥스는 심각한 죄의식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희망’을 갖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하는 염세주의자다. 정신병의 총집합인 셈이다. 그러나 이야기 상에서 주요한 결정을 이루는 주체 역시 바로 이들이다.

페미니즘 영화?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인지, 아니면 그저 잘 만들어진 카체이싱 영화인지에 대해 규명하는 일이 뭐가 그리 중요한 문제인지 모르겠다. 여러 평론가들은 샤를리즈 테론의 인터뷰를 근거로 도발적으로(?) “<분노의 도로>는 페미니즘 영화다!”라며 선언했지만, 이런 선언이 이 영화에 대한 진지한 이해를 돕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영화나 페미니즘이라는 ‘핫이슈’를 궁핍하게 만들 뿐이다. (물론 영화 속 기호들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교양을 돕는 것이 목적이라면 성과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이 영화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어쩌면 여성주의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공론장의 움직임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이들은 모종의 박탈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카체이싱 장르 자체가 지극히 남성중심적인 컬트 무비로서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30년만에 다시 <매드맥스>의 세계관을 들고 나온 노장 조지 밀러는 장르적 규범에 대한 대중들의 통념을 영리하게 뛰어넘었다

그러나 영화 속 주요한 결정은 주로 맥스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규정하는데 주저하게 된다. 퓨리오사는 무뚝뚝하고 왼팔은 기계로 이루어진, 헐리우드의 전형성을 뛰어넘는 기괴한 전사이지만 막연한 희망을 버리지 않기 위해 무리와 함께 소금 사막을 건너다가도 ‘다시 돌아가서 시타델을 전복하자’는 맥스의 제안을 따르는 다소 수동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나중에 여성 억압을 퇴치하는 위대한 ‘영웅’이 되지만 다분히 맥스에 의해 전개되는 이야기의 소모품이기도 하다. 위기 탈출도, 소금사막에서의 회군도, 사령관 퓨리오사를 구하는 헌혈도 모두 맥스의 몫이다. 더구나 마지막에 그는 고독한 방랑자처럼 다시 어디론가 떠나는데, 통상 서부극에서 사건이 해결되고나면 주인공이 어디론가 홀연히 떠났던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임모탄의 부인들, 모계사회인 부발리니족의 마지막 남은 할머니 등 다른 여성 캐릭터들 역시 전쟁의 주역들이지만 그리 주체적이진 않다. 그나마 케이퍼블(빨간 머리; 라일리 코프) 정도가 눅스가 자신의 고독을 벗고 함께 싸울 수 있도록 설득한다는 점에서 키플레이어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다.

따라서 <분노의 도로>가 여느 카체이싱 영화들의 남성우월주의를 넘어서고 여성 캐릭터를 비전형적으로 그리고 있긴 하지만, 단지 여성들을 억압해서 해방시켜주었다거나 모계 공동체야말로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정신 멀쩡한 공동체였다는 의미에서라면, 지극히 협소하고 제한적인 의미로 페미니즘을 사고할 수밖에 없게 되는 함정에 빠진다. 오히려 페미니즘 영화냐 아니냐는 허구적인 구획에 갇혀 공허한 논쟁을 거듭하기보다 모계사회를 대안인 것처럼 그려내는 이 영화에서조차 왜 주체적인 결정은 맥스에 의해 이뤄지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게 훨씬 바람직하다.

탈주가 아니라 현실 속으로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분노의 도로>의 진정한 미덕은 소금사막에서 이뤄지는 회군에 있다. 맥스는 무한히 펼쳐진 소금사막으로 떠나는 일행을 보다가 다시 한번 트라우마적 형상에 사로잡히고, 무언가 번뜩이는 깨우침을 얻는다. 그것은 바로 문제를 회피하지 않겠다는 다짐일 게다. 워낙에 자신에 대한 설명이 없는, 동물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이때 맥스의 선택은 그 무엇보다 영화를 빛나게 한다.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는 이상향 ‘녹색의 땅(the green world)’을 쫓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상상 속의 ‘녹색의 땅’이란 다름 아닌 우리가 있던 바로 그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를 딛고 뒤집힌 여정. 맥스는 퓨리오사가 믿던 허구적인 신화를 깨고 우리의 과제는 실제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항상 씨앗을 지니며 녹슬고 폐허가 된 땅 위에 하나씩 어렴풋한 희망을 심어왔던 부발리니의 할머니들 역시 맥스의 제안이 좋은 아이디어라는 걸 단숨에 알아차린다. 그곳에는 물도 있고, 기괴할 망정 눅스와 같은, 혹은 기계처럼 젖을 착취 당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의 과제는 망상과 낭만을 품고 이 미친 세상에서 탈주하는 것이 아니다. 시타델로 돌아가 생산관계를 장악하고 모든 사회적인 장치들을 재배치함으로써 모든 사람들과 희망과 더 나은 세상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 저 흔하디 흔한 ‘탈주하는 유목민’이 아니라,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현실, 가장 추잡하고 역겨운 곳으로 돌아가 그곳을 전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여기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분노, 상상적 질서의 형식들로 이루어진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해서 전복의 기제가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분노의 도로>의 이런 메시지는 저마다의 현실적 고민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정세가 환기시키는 당위는 높아지지만 주체들의 가능성과 희망은 역으로 희미해지는 시대,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저 광신도들의 설교처럼 이 미친 세상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다는 희망 자체를 단념하고 유유자적하거나 각자도생하는 삶을 취해야 하는가, 아니면 어딘가에 숨어 우리만의 공동체를 찾아 떠나는 것이어야 하는가.

퓨리오사와 용기 백배한 동료들의 선택은 저 역겨운 도시로 돌아가 싸우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여전히, 그럴 기회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영화가 한창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후속편이 나올 것이라는 얘기들이 들린다. 다음 싸움에서는 ‘선택’ 역시 여성 자신의 것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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