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구미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내게만 놀라운 일이다. 한 협동조합에서 ‘시민기자학교’를 운영중인데 강사가 나라는 것이다. 2주에 한 번 <미디어스>에 쓰는 칼럼도 버거운데, 학교 다닐 적 자치언론에 몸 담은 것을 빼면 기자 경력이 한미한 내가 남에게 무려 기사쓰기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8주간 일정 중 절반이 이미 지나버렸다. 녹색당 경북지역에서는 사무처장으로, 전국당에서는 언론홍보기획단장으로 언론을 상대하는 처지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언론인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잘 되지도 않는 분신술에 도전중이다.

2013년 7월 구미에서 최초의 지역언론 협동조합인 ‘뉴스풀 협동조합’이 출범했다. 처음에는 발기인 다섯 명의 조촐한 규모였다. 이 다섯 명 중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당시 공직에 있었기 때문에 ‘언론과 권력간의 긴장’을 위해 다소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지인 여럿이 관여하고 있었고 나도 평조합원으로서는 초창기부터 참여했다.

나는 구미 지역 시민운동이 부진한 중대한 이유로 풀뿌리 언론의 부재를 꼽고 있었다. 대학 시절 만난 한 시민운동가는 나중을 대비하겠다며 <옥천신문> 탐방에도 나섰다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냥 모 지역신문과 합작하는 듯한 길을 택했다. 다른 시민운동가들도 지역언론 창간에는 전혀 의지가 없었다. 2011년 초 시민단체 연석모임격인 구미풀뿌리희망연대에 ‘미디어 행동이 필요하다’고 건의했으나 아주 가볍게 묵살당했다.

구미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지만 이 도시 사람들은 구미가 ‘IT도시’라고 생각한다(물론 내 이웃의, 원룸 사는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의문이지만). 그러나 이 도시의 공론장을 보면 전혀 IT도시 같지 않다. 단수사태, 불산사태에서 익히 경험했듯 유언비어에 매우 취약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고, ‘담론’은 실종이고 ‘카더라’만 난무하고 있다. 그에 따라 발생한 매우 넓은 주변부는, 주류세력에게는 ‘제한적인 안정성’을 제공해준다. 외지 출신 대다수에 30세 초중반 평균 연령을 지닌 이 도시를 토박이 출신 보수적 지역 유지들이 지배하는 데 그만한 호조건이 어디 있겠는가.

지난 5년간 마주한 지역 언론 현실도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기자들 개인의 역량이 문제는 아니다. 양심적이고 일말의 비판 정신을 갖춘 기자도 여럿 만났다. 그러나 그들이 끼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지식깨나 있고 글깨나 있다는 이들은 기회주의의 극치를 보여주기도 했다. 많은 곳에서 그러하겠지만 관청과 자본에 잡아먹힌 언론에서 풀뿌리는 크지 못한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으면 없는대로 품앗이하며 컨텐츠를 공급하는 언론이 절실했다.

2013년 새해가 밝으며 나를 비롯한 30대 시민 몇 사람이 모여서 지역사회의 새로운 움직임을 준비했다. 정치인인 내가 정작 이 모임이 과도하게 정치색을 갖고 흘러가는 것을 경계했다. 일단은 문호를 최대한 열고 여러 방면과 직종에 몸담은 사람을 모아보자는 취지였다. 시민운동가, 파워 블로거, 의사, 직장인, 소설가 지망생, 시의원, 교사, 학원 강사 등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동상이몽’이었다. 내가 설파하는 모임 진로에 연신 끄덕이던 몇몇 사람은,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신의 목적이 순전히 2012년 대선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것임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 이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도시를 바꾸지 못한다는 이치를.

논의 끝에 지역언론의 창간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언론 제호를 결정하게 되었다. 연이어 아이디어를 내놓던 어느 분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않는 그 시점에 갑자기 ‘정체성’ 문제를 거론하면서 모임을 뒤틀기 시작했다. 별로 진보적이지도 않고 사상도 깊지 않은 분이 입만 열면 ‘정체성’을 거론하니 지켜보기만 해도 넌더리가 났다. 그러면서도 협동조합 방식의 창간에도 반대했다. 그는 철저히 정파적 노선을 대변하는 ‘기관지’를 원하는 모양이었고, 동시에 자신이 내놓을 자본을 고리로 언론을 움직이려고 했다. 모임은 쪼개졌고 그 와중에 탄생한 것이 ‘뉴스풀 협동조합’이었다.

뉴스풀 협동조합의 탄생은 프레시안 협동조합을 포함해 곳곳에서 나타나던 협동조합 언론의 등장과 연관이 있다. 시민주인 언론이 반드시 협동조합의 형식을 취할 이유는 없었다. 시민들을 상대로 회원을 모집하여 회비를 걷고 그들이 기사쓰기와 조직 결정에 참여한다면 협동조합이 지향하는 자립과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 그럼에도 협동조합의 길을 택한 것은 첫째, ‘후원회원’이 아닌 ‘조합원’들에게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협동조합의 일원으로서 지역 사회적경제 생태계에 뛰어드려는 또다른 차원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단체는 여전히 미지근했다. “왜 발기인을 모집하지 않느냐”는 반문도 있었다. 발기인 모집에 힘을 뺐다가 정작 조합원으로 불참하는 사례가 우려되었다. 그래서 안팍으로 진지하게 전략을 고민한 결과가 우선 합의된 소수라도 모여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창립총회를 연 발기인 다섯 분은 참여연대나 YMCA 등에 적을 두고 있는 시민단체 활동자이거나 여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임원이 되었다. 나서는 사람은 뭐고 재는 사람은 또 무엇인가.

발기인을 모집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이 ‘사람들을 배제하고 가면 어떡하느냐’는 항변이 아님은 금세 드러났다. 그것은 그냥 끝없는 관망 혹은 타산이었고, 역시나 사이사이 ‘자신은 무슨 의미인지 아는지 궁금한 (그놈의) 정체성 운운’이 있었다. 조합 출범 이후 내가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에게 들은 말은 다음과 같다. “정체성이 뭐냐? (‘풀뿌리’죠 뭐.) 그래도 진보와 보수에서 어디쯤인지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느냐.” (웃겼던 게, 이 사람도 시간이 지나니 뉴스풀 협동조합을 어느새 ‘진보적 협동조합’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그런 언론이 시민에게 필요한가?” (본인은 그러면 시민언론의 부재가 아쉬웠던 적은 없는가?)

다음 과정은 더 험난했다. 40만 인구 도시에 글을 쓰는 사람을 왜 이리 찾기 드문가. 술 한잔 하고 저마가 시사평론가 비슷하게 폼을 쟀던 사람들이 멍석을 깔았더니 싸그리 침묵을 지켰다. “조합이 잘 돼요?” “안 되죠 뭐.” “왜?” “글을 쓰는 사람이 없어요.” 이런 대화 속에서 자신이 운동가랍시고 글 한편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돌아보는 사람도 없다. 사실 심각한 것은 언론이라기보다 시민운동이다. 나는 아직도 이 도시에 성명서, 논평 하나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몇인지, ‘적’이 사고를 치기 전에 자신이 사건을 만들어낼 역량을 가진 이가 얼마나 되는지, 절망적으로 가늠하고 있다.

2014년 7월, 드디어(!) 공직에서 내려온 다음, 고의적으로 거리를 둘 이유가 상당히 사라진 덕분에 조합에 본격적으로 가세하게 되었다. 조합이 발행하는 인터넷신문 ‘뉴스풀e'에서 주로 스트레이트 기사를 쓰고, 의견과 주관이 실린 기사는 내 이름으로 쓴다. 올해 초부터 당직을 더 맡게 된 이후로는 이마저 여의치 않지만, 난산 끝에 태어나 아직도 기고 있는 이 언론이 어떻게든 걸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4월부터 이사진이 2년 가까이 ‘온다, 온다’하던 시민기자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유감이라면 새로운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내가 강사로 나서게 되었다는 게 유감이다. 그동안 조합은 상근자 1명도 채용할 수 없는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고, 아주 느린 조합 확장마저도 철저히 사적 인맥에 기대고 있었다. 그러니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사람을 모시기 어렵고, 일을 할 만한 사람조차 행사와 뒷풀이 위주의 조합 활동에 끌려가고 있었다. 난 이렇게는 더 버티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왔다. ‘시민기자학교’를 벼랑끝의 기회라고 보고 있다.

정말 벼랑끝은 벼랑끝인가 보다. 징후가 너무 뚜렷하다. 분명히 ‘임원들부터 솔선해서 참가하라’고 조건을 걸었는데 몇몇은 초창기부터 나타나지 않았고 지난주 수업에는 임원들 모두가 결석했다. 이러다간 오래 못 간다. 다만 죽으려면 잘 죽어야 한다는 걸 명심할 뿐이다. 죽어도 씨는 뿌려야지. 기자학교들을 거친 시민들이 어디에선가는 미디어행동을 펼칠 수 있도록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할 수밖에.

김수민 / 경북녹색당 사무처장
안티조선운동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돼 개혁당과 민주노동당에서 정당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 말 민주노동당이 분리된 후 진보신당에 몸을 담았다가 2009년 탈당해 출마를 결심하고 고향인 구미로 내려가 무소속으로 기초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시의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대형폐기물 민간위탁을 막는 조례를 재개정하고 구미 단수 사태에 대해 시민단체들과 수자원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부분 승소하는 등 모범적 활동으로 주목받았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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