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래간만에 '대전'이란 수식이 붙었다. '대전'하면 지체 없이 <적벽대전>이 생각난다. 아마, <적벽대전>은 한국인이 사랑한 '대전'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 아닐까 싶다. 그 <적벽대전>의 패장 오나라의 주유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세상과 정신을 모두 놓은 듯 절망만으로 낮게 읊조리며, 강한 탄식으로 혀를 여러 번 들리게 찬다.) "하늘이 무심하도다. 이 주유를 태어나게 했으며 왜 또 제갈량을 같이 태어나게 했단 말인가 말이다."

초복, 중복, 말복 그리고 서울 수복(9월28일)까지 더위가 이어지고 있는 이 하수상한 가을에 '드라마 대전'은 막이 올랐다. '에덴의 동쪽'(mbc), '바람의 나라'(kbs2), '타짜'(sbs)가 밤 10시에 맹렬히 전파를 태우고 있다. 누군가는 '제갈량'이 되고, 반드시 또 다른 누군가 '주유'가 되어야 한다. 아직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전망은 예측불허요 승부는 점입가경이 될 것이고 끝끝내 승리하는 자 명불허전이 되리라는 것 뿐이다.

▲ KBS2 드라마 '바람의 나라'ⓒKBS

(이하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며, 지극히 개인적인 사심과 얻어 들은 몇 가지 풍문에 의한 평가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삘 돗자리 까는 것이 마땅한 천기누설의 스타일로 단언하건대, 전망은 불투명하겠지만, 승부는 박빙일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이긴다면 승자는 '에덴의 동쪽'이지 않을까 싶다.(결과적으로, 아니면 그냥 마는 거다.)

우선, '바람의 나라'는 워낙 영웅적 서사, 민족적 내러티브를 좋아들 한다는 시청률 획득의 법칙에 충실하다. 더구나 파격적인 프롤로그 방송 등 감각적인 초반 연출은 시선을 잡는 데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구조 역시 탄탄하다. 내공이 검증된 탄탄한 배우들(정진영, 박건형, 이종원, 김상호, 박상욱, 한진희, 손병호, 김규철, 정성모, 김병기 등)의 연기는 보는 이를 흐믓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참기 힘든 불편함은 바로 캐스팅 미스(miss)이다. 실패는 주인공 무휼을 송일국이 맡았다는 점이다. 도저히 몰입이 안 된다. 직전까지 주몽이었는데, 난데없이 3대를 점프하여 무휼을 연기하니 그야말로 연기일 뿐 어색하다. '주몽'에선 유리왕(고구려)이 송일국의 아들이었는데, 그리고 대소왕(부여)은 숙적이었는데, 전 국민이 그걸 아는데. 그 기억의 강렬함이 너무 밭은데. 이제 주몽이었던 어제의 송일국은 잊고, 그 송일국은 오늘부터 주몽의 손자인 무휼입니다 하는 것이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이 대목에서 속으로 소심하게 '그렇게 배우가 없니, 없어'를 외쳐본다.) 아무리 겉의 때깔이 좋더라도, 주인공에 몰입이 안 되니 일단 '바람의 나라'는 패스(pass)다.

▲ SBS 드라마 '타짜'ⓒSBS

솔직히, '타짜'는 아직 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곱상한 조승우보다는 윤곽이 뚜렷한 장혁이 '고니'에 잘 어울려 보여 기대 많이 했었다. 그런데 어느 블로거의 한 문장이 보기를 머뭇거리게 한다. "허영만의 원작을 사서 '올인2'를 찍었네.ㅎㅎ"

소문난 잔치 막상 별로 먹을 게 없더라는 속담처럼 별로 선택의 여지가 남지 않은 나의 닥본사(닥치고 본방 사수의 준말)는 '에덴의 동쪽'이다. 불어라, 제갈량의 동남풍아~!(송승헌이 살고 있는 에덴의 동쪽은 공교롭게도 동남쪽 아시아다.)

드라마를 논하기에 앞서 '에덴의 동쪽'이란 제목은 논해 줄 만한 가치로 충만한 매력적인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어떤 텍스트도 다른 텍스트들과의 관계에서 떼어놓고 읽기는 불가능하며, 하나의 텍스트는 내용과 형식 모두에 대해 일정한 예상을 지니게 만들어 이 상호 관계망에서는 어떤 텍스트도, 독자도 빠져나갈 수 없음을 일컫는 용어)을 지녔다.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에덴의 아름다운 동산을 만드시고 첫 사람 아담을 흙으로 빚고 그의 갈비뼈를 빼서 첫 여자 이브(하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아담과 이브가 잠자리를 갖고, 그 일이 발각되어 신의 진노를 사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다. 말하자면, 지옥행이다.

그 지옥에서 인간은 쳇 섹스의 역사적 결과물로 첫 아들 카인을 낳게 된다. 그리고 곧 주체할 수 없는 활력으로 동생 아벨도 낳는다. 그리하여 대대손손 살게 된다. 이렇게 인생은 태생적으로 비극인 것을. 게다가 부모의 헌신적인 열정에 자식이 복무하는 경우 봤는가? 어찌어찌한 사소한 질투심으로 형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여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버린다. 절절한 운명이여, 아로 새겨진 원망이여, 눈물의 씨앗이 되는 질투여.

각설하고, 인간의 모든 비극적 사랑 이야기가 '로미오와 줄리엣'에 빚을 지고 있다면, 인간의 모든 원한에 의한 복수 이야기는 '신vs아담/이브' 그리고 '신vs카인/아벨' 이야기에 빚을 지고 있음이다. '에덴의 동쪽'은 돌이킬 수 없는 운명, 극복할 수 없는 분노, 헤어날 수 없는 사랑이 3단 콤보로 장렬하며 '지옥'을 대리 체험하게 하는 불굴의 활자이다.

이 완벽하리만큼 잔인하고, 끽소리도 못 낼 만큼 재미난 이야기는 너무도 당연하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패스티쉬(pastiche, 패스티쉬란 개념은 패러디에 보이는 바와 같은 희극적인 불일치의 느낌은 수반하지 않고 다양한 스타일로 모방하는 것을 가리킨다.)됐다.

'분노의 포도'로 잘 알려진 미국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이 1952년 쓴 '에덴의 동쪽'이라는 소설을 시작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제임스 딘이 나왔던 '에덴의 동쪽'이란 영화도 있었다.

▲ MBC 드라마 '에덴의 동쪽'ⓒMBC

(우리에겐 제임스 딘만 너무 유명하지만, 이 영화를 만든 엘리아 카잔 감독도 제임스 딘만큼 굉장한 사람이다. 그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열차 A Streetcar Named Desire>, <초원의 빛 Splendor in the Grass> 등의 걸출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러나 정작 그의 악명은 1950년대 미국을 광기로 물들였던 매카시 선풍 당시의 빨갱이 사냥에서 획득됐다. 의회 증언을 피해 유럽으로 떠난 찰리 채플린 등과는 정반대로 그는 <뉴욕타임스>에 "할리우드에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라"는 글을 쓰고, 자신이 알고 있는 영화계 공산당원들의 이름을 의회에 불었다. 그런 그였기에 1999년 아카데미에서 특별 공로상을 받을 때, 파격적으로 많은 배우들이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공갈 박수 치는 에너지조차 아꼈다.)

국내에서도 '카인과 아벨'이란 제목의 이현세 만화가 있었다.(얼마 전에는 이를 소지섭, 정려원 주연으로 드라마화 한다는 뉴스도 있었다.) 이 외에도 '에덴의 동쪽'과 '카인과 아벨'을 검색하면 숱한 창작물들이 도사린다.

계속 장황해지는데, 어찌되었건 '에덴의 동쪽'이란 이야기의 포스가 너무도 강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 그랬다. 시공을 초월하여 멀티 유스 될 만큼 너무 왕킹짱한 원 소스란 말이다.

(무릎 팍 도사처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드라마로 돌아가서, '에덴의 동쪽'에는 '바람의 나라'에 필적하는 내공의 배우들(이미숙, 조민기, 유동근, 김성겸, 전미선, 윤동환, 정혜영, 박찬환 등)과 무섭게 떠오르는 신선한 배우들(김범, 이다혜, 한지혜, 이연희, 데니스오)의 물량이 쏟아진다. 게다가 배경마저 이국적이니 일단, 눈요기는 확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람의 나라'와 구별되는 미덕은 '카인과 아벨' 격인 두 주인공(송승헌, 연정훈)이다. 최적의 조합이라고 할 순 없을지 모르겠으나, 몰입을 방해하는 수준은 확실히 아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가 본좌급이 될 것이냐? 문제는 누구나 갖출 수 있는 좋은 조건이 아니라 모든 걸 지배할 수 있는 압도적 1%의 남다름을 갖추었느냐의 승부일 것이다.

▲ MBC 드라마 '에덴의 동쪽'ⓒMBC

대작 영화와 드라마가 구사하는 대박의 문법은 '현대사의 아픔과 굴곡'을 얼마나 유기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에덴의 동쪽'도 이 문법에서 출발한다. '에덴의 동쪽'의 배경은 탄광촌이다. 감히 말해보건대, 탄광은 한국 현대사의 '생성'과 '소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흥망성쇠의 교과서이다. 강원도의 힘은 탄광의 부흥에 있었고, 한때 그 부흥의 에너지가 한국사회 전체의 에네르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학출의 탄광 노조위원장(이종원)과 그의 억척스런 그녀(이미숙)와 영글어가는 아들들(김범, 박건태) 그리고 쥐처럼 표독한 현장 소장(조민기)의 엇갈린 가정사 조합은 조건반사적 감동을 유발시켰고, 근래 보기 드물었던 호연까지 겹쳐지면서 설상가상의 하모니를 이뤘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것은 얼핏 우리 모두 잊고 지내던 현대사라는 과거를 소박하게나마 더듬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물론, 대놓고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있는 이 드라마의 디테일과 미장센들이 역설적이게도 굉장히 엉성하고 허구적이란 지적도 있다. 현실을 왜곡하는 환상적 리얼리즘은 수준이 어떠냐에 따라 굉장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 까발려진 '에덴의 동쪽'의 핵심적 한계는 우선, 그 설정이 지나치게 촌스럽고 또 낡은 수법이라는 지적이다. 뒤바뀐 운명, 장남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성과 너무 짙은 아버지의 그림자, 복수만으로 점철된 개인들 등등은 한국 축구의 문전 처리 미숙처럼 한국 드라마의 오래된 저열함이다.

그리고 더 구체적인 것들도 있는데, 역사적으로 50년대 말에는 학출이 있을 수는 없었고 전두환 정권에서나 도입된 탄광 온수 샤워가 등장한 장면은 역사적 고증 부재를 여실히 드러낸다는 지적, 가난한 광부의 아내가 산부인과에서 애를 낳고 더군다나 그 애가 80년대 이후 등장했던 신생아실에서 바뀌는 점은 계급적 각성의 부실함이라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은 <뉴스메이커, 김원, ‘에덴의 동쪽’은 이명박을 위한 드라마?>를 참고하시면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에덴의 동쪽'을 쓴 나연숙 작가의 정치적 지향성도 문제시되고 있다. 나연숙 작가는 굉장히 오래 묵은 작가이다. 단순히 오래 묵었다는 것 자체가 흠결이 될 수는 없지만, 그녀가 명박을 일약 영웅으로 만들었던 '야망의 세월'을 썼던 작가라는 점은 좀 걸린다. 그 드라마의 의도 전체를 이명박 띄우기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드라마는 시대와 어용한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아가 그녀의 전작들을 보면 그녀가 구조적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현실을 외면하고, 성공한 자를 영웅시하는 걸을 당연히 여기고, 성공하지 못한 자들의 비루한 삶을 미화 혹은 복수로 극단화시키는 허위였다는 지적도 수긍이 간다. 다만, 이번 드라마가 '야망의 세월'의 연장선인지, 또 그녀가 이번에도 그런 정치적 지향성을 노골화 할 것인지 단언하기에는 아직 좀 이른 것 같다. 이제 겨우 일곱 번을 했을 뿐이다. 좀 더 지켜보자.

대개의 장광설이 그렇듯 시작은 창대했는데 끝이 심히 미약하다는 느낌에 남세스럽지만, 여기까지다. 참고로, 글을 쓰다 보니 '에덴의 동쪽'에 대한 지능적 안티를 한 것인지, 노골적 지지를 한 것인지조차 헷갈린다. 어찌되었건, tv를 점령하고자 안달이 난 이들로 고단한 나날들이다. tv에 입은 상처가 모쪼록 tv로 치유되길 바라는 충정으로 이해해주길 부탁드린다. 그럼,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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