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언론재단ⓒ미디어스
하루하루가 ‘디데이’다. KBS 사장이 경찰의 호위를 받은 정권 파견 참주들에 의해 해임되고, 그 사장은 이튿날 검찰에 체포되고, 검찰이 주역풀이 같은 기소장으로 그를 ‘파렴치범’으로 기소하던 날, 법원은 종교재판 하듯 상상의 법리로 ‘해임 집행정지 신청’을 기각하고, 다시 참주들은 이미 내정된 후임 사장을 놓고 공개모집하는 시늉이라도 한답시고 철없는 네티즌이나 하는 ‘번개팅’도 마다지 않고, MBC 경영진은 구성원들의 절규에 외눈감은 채, 싫다는 시청자들에게 부득부득 사과받기를 강요하고…. 언론인의 실존의 무게가 중력가속도로 자유낙하하는 나날이다.

오늘도 디데이다. 본디 재난은 예고되지 않고, 예고되더라도 닥치기 전엔 대비되지 않는다. 몇날 며칠 퍼붓던 빗줄기가 세상을 집어삼킨 뒤 잠시 잦아든 날 불현듯 작은 축대가 무너지듯, 예고됐으나 대비되지 않은 후폭풍의 재난은 언제고 예고대로 닥칠지 모른다. 작은 축대 하나 더 무너진다고 사태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지만, 무너진 축대는 다른 모든 폐허 위에서도, 무너지기 전과 무너진 후를 심리적으로 가파르게 경계 짓는다. 작은 축대가 무너지면 힘겹게 버티던 희망과 결기도 흔들린다. 2008년 8월22일, 오늘은 어쩌면 그런 날이 될지 모른다.

한국언론재단에게 오늘은 예고된 디데이다. 이사장 박래부가 전국언론노동조합 언론재단지부에게 자신과 임원들의 거취를 밝히기로 한 날이다. 그가 ‘사퇴’의 뜻을 밝히는 상황을 떠올릴 때, 내 머리 속엔 조선 임금 인조가 세자를 데리고 청 태종 앞에 나아가 흙 위에 피나도록 머리를 짓찧으며 삼전도 의식을 치르는 삽화가 겹친다. 역사를 가까스로 횡단하는 내 가난한 연상은 최근 일련의 재난의 서사에 기대고 있다. 임직원 138명. 언론재단은 작다. 임원 몇 명 들고나는 게 치욕의 집단적 기억을 대물림해온 역사와 견줄 일인가 하겠지만, 최명길이 인조에게 ‘주화’를 청할 무렵 남한산성 행궁 살림은 지금 언론재단보다 훨씬 헐겁고 남루했다.

언론노조 언론재단지부가 얼마 전 조합원 설문 조사를 실시했는데, ‘임원 퇴진 요구’가 압도적으로 높게 나왔다고 들었다. 정확한 통계 수치를 알려면 알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설문지를 구해 읽었다. 설문 조사에서 문항과 구성이 가치배제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언론재단이라면 여론조사 방법론에 밝은 조합원이 한둘이 아닐 텐데도, 설문 문항과 구성은 기본 요건에서 한참 멀었다. 답은 물음 안에 이미 내장되어 있었다. 조사주체에게 통계 수치는 처음부터 관심사가 아니었고, 그저 집단화된 언어가 필요했던 것 같다. 내가 굳이 통계 수치를 알려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잘잘못을 따지려는 게 아니다. 감추거나 꾸밀 겨를도 없는 공포와 위기의식이 행간에 선연하다는 걸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요즘 언론재단 사람들을 만나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사원은 “정권으로부터 처음 퇴진 압박이 왔을 때만 해도 공포탄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실탄이 빗발치고 있다”고 했다. 박 이사장은 “여러 차례 문화부 장관 면담을 신청해도 반응이 없다”고 하고, 한 간부는 “친분이 있는 문화부 실무자들조차 만나주지 않는다. 우린 구름에 갇혔다”고 하소연한다. 그 와중에 국정원 관계자들이 언론재단의 정부광고대행권을 박탈할 것이라는 정보를 재단 쪽에 흘렸다. 공포는 ‘사실’로부터 격절된 ‘풍문’에 의해 극대화된다.

문화부 쪽은 “언론재단의 정부광고대행권을 제3의 기관에 넘길 계획이 없다”고 하지만, 영혼 없는 정부 부처 공무원의 발언 ‘사실’이 정권 의중 속의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만이, 지금까지의 정확한 ‘사실’이다. 문화부의 ‘약속’을 믿을 수 없듯, 문화부가 약속하지 않았던들 떠도는 풍문을 곧이곧대로 믿을 일도 아니다. 그래서다. 현 상황을 실탄으로 비유한 이의 상황인식은 빗나갔다. 폭음의 데시벨만 커졌을 뿐, 여전히 공포탄이다. 가시화된 것은 공포 그 자체뿐이다.

▲ 전국언론노동조합 언론재단지부가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 설문지 일부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 정신분석학적 연구대상도 인간이지만, 공포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욕망을 ‘이성적 선택’으로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종(種)도 바로 인간이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라. 나날이 이어지는 재난에 맞서는 무리들이 도처에 실재한다. KBS 본관 앞과 민주광장 안에, MBC 로비 안에, YTN 본사 앞과 사장실 앞에, 그리고 무한한 사이버 공간 안에도 그들은 있다. 그들은 공포 인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공포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서로를 다독이고 부추기며 이성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언론재단지부가 조합원 설문에서 “현 임원들이 지난 7개월간 보여준 경영자로서의 능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만 묻는 것에 공감할 수 없다. 집안 곳곳에 딱지를 붙이고 있는 악덕 사채업자 앞에서 가장의 무능만 탓하고 있는 것과 뭐가 다른지 알 수 없다. 이 물음에 선행해야 하는 물음은 마땅히 “정권이 정부광고대행권을 빼앗으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다. 같은 이유로, 지부 집행부가 청와대는 아닐망정 문화부 앞에서라도 팻말 들고 1인 시위 한 번 하지 않은 채 경영진 퇴진 투쟁을 벌이려는 것에 도무지 공감하지 못한다.

언론재단의 한 사원은 “그들은 가치를 걸고 싸우지만 우리는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맞받는다. 맞다. 당장 정부광고대행권을 빼앗기면 생존의 문제가 들이닥친다. 그이는 “KBS MBS도 무너지고 넘어가는데 문화부 젊은 서기관 말 한마디에도 움찔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어떻게 싸워서 이길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그렇다. 언론재단은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하지만, 그들이 걸고 싸우는 가치 역시 ‘생존의 방식’을 묻는 것이며, 생존의 방식은 생존 자체와 분리되지 않는다. 기륭전자와 KTX 여성 노동자들의 목숨 건 생존권 투쟁은 곧 생존 방식의 투쟁이다. KBS와 MBC가 무너진 것도 아니다. 거꾸로, 저항하지 않았으면 벌써 무너졌을 것이다.

나는 언론재단이 공포의 실체와 대면할 용기조차 없는 공포 상태를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언론재단의 공포는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공포이기 전에 내면화된 공포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조직 변경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됐던 집단적 기억에서 비롯되는 공포다. 그렇더라도 공포의 실체(구조)와 대면하지 않고 희생 번제만 치러서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풍문과 전설로 떠도는 괴물을 달랬다는 일시적인 자기암시 말고, 지금은 번제의 효과조차 알 수 없는 상태다. 오히려 공포의 재생산과 자기증식에 자양분만 보탤 뿐이다. 공포는 더욱 깊게 내면화할 것이고, 언제든 되살아날 것이다.

언론재단지부에게 시급한 것은 당장 연대의 장으로 나오는 일이다. 지금의 방향으로 계속 간다면 언론운동 진영과 노동계로부터 고립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노조가 정권과 스크럼을 짤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은 공포의 실체에 투항해 더 큰 공포에 영구히 예속되는 것일 뿐이다. 언론운동·노동계와 손을 잡고, 작지만 무너져서는 안 되는 축대를 함께 지켜내야 한다. 축대가 무너지고 나면 손을 내밀고 싶어도 내밀 수 없고, 나날이 재난과 힘겹게 맞서는 그들에게도 적잖은 충격이 될 것이다. 그들과 함께 싸우는 과정에서 언론재단의 독립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 투쟁의 연대 공간을 기획해보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걸 방해하는 경영진이라면 마땅히 맞서 싸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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