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얘기 하나. 고등학교를 다닐 때 나는 학생자치와 관련된 청소년모임에서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선배를 따라 어떤 청소년 단체에 얼떨결에 가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입시공부만이 허락되고, 학생회 활동은 회의 결과는 물론 안건조차 하나하나 미리 학교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현실. 학생자치는 권장, 보호되어야 한다는 법적 규정은 단지 말 뿐이었다. 모임에 참여하면서 학교를 상대로 느꼈던 답답함과 고민들을 다른 학교 친구들과 같이 나누고, 그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소박한 활동들을 함께 고민했었다.

답답한 현실에 대해 나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위안과 더불어 변화에 대한 희망이 생겨났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커졌다. 이런 활동을 학교가 분명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 어려서부터 배워오고 몸에 새겨진, 학교의 말을 듣지 않고 학교의 질서를 어지럽히면 그 대가를 묻는다는 냉혹한 현실. 다른 친구들이 학생도 인간이라며 인권을 지켜달라 요구했을 때 학교에서 징계를 내리는 것으로 응답하는 일은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공포가 현실이 되는 순간들이었다. 모임에 참여한 이후 종종 나는 학교를 가는 것이 내심 두려웠다.

▲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조합원들이 10월 2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해직조합원 배제 명령에 대한 헌법소원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부당 해직조합원을 빌미로 전교조 설립취소를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서 고용노동부는 해직교사를 조합원으로 인정하는 전교조 규약을 개정하지 않으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시행령'에 따라 노조설립을 취소하기로 했다.(뉴스1)

그러던 중 기어코 일이 터졌다. 당시 우리 모임을 지원해 주는 청소년 단체는 내신경쟁이 강화되는 교육정책에 항의하고 자살한 학생들을 추모하자는 작은 거리 캠페인 규모의 거리추모제를 열고자 했다. 그런데 당시 도입된 교육정책에 불만이 컸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추모제에 참석하자는 문자가 돌리는 일이 일어났고, 이어 추모제는 정부의 교육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청소년 시위로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정부는 당황했다. 집회와 학생들이 돌리는 문자의 배후를 찾아내겠다는 엄포를 두었다. 그런데 어쩌다 그 추모제와 관련해 우리 모임의 이름이 공개되는 일이 일어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한낱 기우였지만,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머리를 싸매며 대책을 고민했다. 결론은? 각자의 학교에 믿을만한 교사를 만나 미리 사정을 구하고 이후에 있을 일에 도움을 요청하는 거였다. 다음 날 나는 학생들에게 ‘전교조’로 소문이 자자했던 교사를 찾아갔다.

나는 왜 수많은 교사 중 전교조 교사를 찾아갔을까. 종종 학교에서 강제로 야자를 추진하자고 하다가 무산되었을 때 전교조 교사들이 그걸 막았다는 얘기가 학생들 사이에 돌았다. 학년이 바뀌고 교사들이 전근을 왔을 때 선배 하나는 내게 이번에 온 교사 중 하나가 전교조 때문에 해직도 당하고 활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이라며, 찾아가서 학생회 활동에 대해 도움을 달라고 얘기를 해보는 게 어떨까란 얘기를 건네기도 했었다.

내게 전교조 교사는 이런 존재였다. 학교는 학생이 주인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학생들이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건 학교가 내려주는 지시를 받고 따르는 것밖에 없는, 교과서에서는 인간은 인권을 가진 존재라고 얘기하지만 정작 교사가 학생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내가 가진 고민과 불만에 대해 유일하게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교사. 그렇기에 학교에 붙들려 갔을 때 내가 기댈 수 있고, 나를 대변해줄 수 있는 사람들로 나는 유일하게 전교조 교사를 생각했고 또 찾아갔다.

나만 그랬을까. 억압적인 학교를 바꾸기 위해 고민했던 수많은 학생들이 기대고 함께할 수 있던 건 전교조 교사였다. 2002년, 용화여고의 한 학생이 서울시교육청 민원게시판에 강제 자율학습과 청소용역비 징수 문제, 교감의 불필요한 신체접촉 등을 고발하는 글을 올리자 학교는 그 학생을 검찰에 고발하고 또 학교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시켰다. 학생의 입을 막기 위한 부당한 징계를 철회하기 위해 나섰던 건 같은 학교 학생들과 지역의 단체들, 무엇보다 전교조 교사들이었다. 일련의 과정에서 용화여고 전교조 분회의 교사 한 명은 재단에 의해 파면을 당하고 복직까지 긴 고초를 겪기도 했다. 8~90년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주화의 이행 과정에서 학생회를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만들기 위한, 혹은 사학재단의 비리를 고발하고 알리는 투쟁들 속에서 학생들은 전교협과 전교조로 이어지는 교사들의 운동과 함께했다. 지금과는 다른 더 나은 학교를 꿈꾼 학생들이 전교조 교사들과 함께하고 또 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교조 역시 모순적인 교육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하고 지금과는 다른 학교를 만들기 위해 싸워온 그 과정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전교조의 출발 이유. 미국의 교육학자, 존 듀이가 <나는 왜 교원노조에 가입하였는가>라는 연설에서 교원노조의 존재 의의와 역할을 ‘학교를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적, 경제적 이해세력에 의해 교육이 지식의 기계적 전달 행위로 전락할 것을 막는 것’으로 둔 것처럼, 전교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전교조 교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애들을 독재체제에 적합한 인물로, 말단 병사나 노예처럼 압박하는…. 그런 현실에 대한 안티감이 (참교육 운동은) 굉장히 강했다. …학교는 애들 성장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군대교육이나 일부 교장의 사리사욕이나 기업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깐. 그런 것들이 아팠다. 완전 비교육자들이었고 비교육적인 분위기였다. 이건 교육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창립과 대규모 해직. 복직과 합법화. 다시 법외노조의 통보를 받은 현재까지. 전교조는 인간화 교육, 참교육을 외치며 등장했고 지금까지 싸워왔다. 또 적지 않은 성과도 거두었지만, 이 과정에서 해고를 겪고 아직 학교로 돌아오지 못한 교사들도 있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전교조가 비판을 받을 부분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나 역시도 학교를 졸업한 이후, 전교조와의 연대사업을 하면서 실망스러운 부분들을 자주 보았다. 다만 그건 교원평가를 수용하지 않는 등의 소위 강성투쟁 일변도라는 문제가 아니었다. 외려, 어마어마하게 조직은 커졌지만, 이전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갈수록 처음 꺼내 들었던 참교육이란 가치를 정착하기 위한 싸움이 관성화되고 일반 조합원들까지 내려가지 못하는 현실, 그리하여 학교 현장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비전교조와 전교조 교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현실 등이었다.

다시 돌아와서, 내가 전교조 교사를 찾아갔을 때 그 교사는 나의 얘기를 묵묵히 들어주었고, 알겠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를 건네주었다. 이 억압적인 학교에서 다른 존재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나에게 위안이었다. 분명 전교조는 미약했지만, 학생의 인권을 억압하고 경쟁만을 요구하는 이 현실, 그리고 계속되는 학생들의 죽음들을 막기 위한 학교와 교육을 바꾸려는 시도이자 가능성의 존재 그 자체였다.

최근 박근혜 정부는 전교조에 대해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 인정을 둔 규약을 문제 삼아 법외노조 위협 통보를 내리고, 이에 함께 보수언론과 보수교육단체들은 차라리 해산시키라거나 존재 자체가 악이라는 섬뜩한 언사들을 내뱉고 있다. 노동조합에게 있어 해고자의 의미는 이미 많은 글들이 지적하고 있고 나 역시도 동의한다.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을 트집 잡아 전교조를 법외노조화하는 시도는 전교조에 대한 명백한 탄압일뿐더러, 보수진영의 태도는 지금의 잘못된 교육을 바꾸려는 그동안의 시도들과 존재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여 고통받고 있는 학생들이 기댈 수 있는 버팀목 하나를 없애려는 의도와 다름없다. 우리 사회의 교육이 조금은 교육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없애려는 보수진영들. 이들이 있는 사회에 과연 교육의 미래는 있을까. 아니 지금의 문제 많은 교육이 계속되는 사회의 미래는 어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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