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이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 관계자들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하면서 정국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이에 따라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직접 노숙농성을 시작해 장외투쟁을 강화하는 민주당과 5자회담 등을 고리로 국회등원을 압박하는 새누리당, 청와대 간의 그간 교착돼있던 대치 정국에도 일정한 변화가 불가피하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엇보다도 국정원이 직접 나서서 압수수색에 관여한 이유가 무엇이며 어떤 효과를 노리고 있는지를 판단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여·야가 각자 입장을 제출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따라 향후의 정국도 영향을 받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황과 각 정치세력의 입장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악순환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국정원 개혁안 무력화?

1차적으로 국정원의 의도를 파악해보자면 국정원의 선거개입 의혹에 대한 국정조사 이후 논의되고 있는 국정원 개혁안에 대한 일정한 고려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떠올릴 수가 있다. 국정원 측은 자신들의 ‘댓글 활동’이 대북심리전의 일환이며 인터넷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침투한 ‘종북 논리’에 대해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민주당은 이러한 논리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국정원 개혁을 위해서는 국정원 수사권에 대한 제한과 국내정치파트의 폐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해왔다. 박영선 의원이 주도해 제출된 민주당 측의 국정원 개혁안에도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

▲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내란예비음모 등 혐의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주거지 등 10곳에 대해 전격 압수수색을 실시한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이석기 의원 사무실에서 국정원 직원들과 통합진보당 관계자들이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뉴스1)

하지만 대내 정보에 대한 업무 권한과 수사권은 국정원의 조직논리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팔다리와 같은 중요한 것이다. 이를 통해 국정원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조직을 보위할 수 있으며 다급한 때에 민감한 사안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존재감을 드높일 수 있다. 따라서 국정원 입장에서 보면 국내정치파트와 수사권만은 반드시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민주당 측 국정원 개혁안은 수족을 자르는 것에 비유할 만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민주당 측 개혁안의 무력화를 위해서는 실제 국내 정치에 국정원이 개입할 만한 당위성이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각될 필요가 있다. 통합진보당 관계자들에 대한 압수수색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안성맞춤인 소재이다. 2012년 통합진보당 내 비례대표 부정선거 논란 시기에 소위 ‘경기동부’로 표현되는 북한에 친화적인 정파의 속살이 보수언론 등에 의해 낱낱이 해부된 바 있으므로 이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것만으로도 국정원은 충분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종북주의자들이 원내진출까지 했다”는 보수세력의 위기감을 다시 한 번 자극하면 되는 것이다.

만일 압수수색에서 자극적인 표현이 동원된 문건이나 국가보안법상의 이적표현물 등이 등장하면 이들의 이른바 ‘종북활동’에 대한 실체적인 증거까지 드러나는 것이므로 국정원은 쉽게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를 통해 자신들의 ‘댓글 활동’까지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나름의 입장에서는 ‘회심의 한 수’로 볼 수 있는 셈이다.

색깔론 정국으로 야권 코너에 모는 효과도

국정원의 압수수색은 국정원 개혁안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이후 정국에도 심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앞서의 상황에 이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그렇다면 여기에 민주당, 특히 박영선 의원 측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다. 박영선 의원 측은 그간 국정원에 대한 국정조사와 개혁 방안 등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펼쳐왔다. 그러나 국정원의 압수수색으로 일정한 딜레마에 봉착하게 됐다. 정국을 돌파하자고 할 수도, 후퇴를 하자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 서울광장 '노숙투쟁 '에 들어간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27일 저녁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시청 앞 광장 국민운동본부 천막 옆에 마련한 별도 천막 내 침대 위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김 대표는 이 천막 안에 노트북과 프린터가 구비된 책상과 야전침대를 마련했고 숙식을 하며 지낼 계획이다.(민주당 제공/뉴스1)

민주당 측이 국정원의 압수수색을 일정한 정치적 의도가 있는 움직임으로 규정하고 더욱 강경한 장외투쟁을 통해 난국을 돌파하겠다고 선언하면 통합진보당과 하나의 세력으로 묶여 색깔론의 피해자가 된다. 보수세력은 “종북주의자들을 구하기 위해 민주당이 직접 나서는 것이냐?”고 되물을 것이고 엄혹한 분단의 현실 앞에서 민주당으로서는 답할 말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릴 것이 뻔하다. 이렇게 되면 10월 재보선도, 2014년 지방선거도 도모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민주당 입장에서는 이런 길을 택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정원 개혁안에 대한 후퇴를 감행하면 여당과 청와대에 고지를 내주는 셈이 된다. 여당과 청와대가 국정원과 입을 맞춰 소위 ‘댓글 활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양념으로 색깔론을 덧붙여 야권을 압박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2012년 총선, 대선에서의 ‘야권연대’를 문제 삼는 것으로 이런 효과는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이외에도 새누리당 측이 꺼내들 수 있는 카드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이석기, 김재연 의원에 대한 자격심사 논란에 다시 불을 붙이는 것이다. 자격심사 논란이 벌어질 당시 이와 관련한 두 가지 쟁점을 형성한 주장이 있었다. 하나는 당 내의 부정투표를 통해 비례대표 의원 자격을 획득한 것이므로 자격심사의 대상이 된다는 주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종북주의자들이 원내에 진출하면 안 되기 때문에 자격심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논란에서 후자보다는 전자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졌으나 이제 국정원의 압수수색을 통해 후자에도 포커스가 맞춰질 수 있게 됐다. 즉, 이 문제가 새누리당이 민주당 측에 사상검증을 강요하는 문제로 비화될 소지가 있다는 얘기다.

민주당의 출구전략이 필요한 시점

일단 민주당 입장에서는 상황을 지켜보며 발언을 자제하는 수밖에 없게 됐다. 섣불리 입장을 냈다가 색깔론 정국에 포위되는 입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단은 조용히 대책을 논의하면서 당 내 갈등을 봉합하고 현 정국에 대한 출구전략을 고민하는 게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민주당 입장에서는 이번 사태로 국정원 정국에서 앞으로 전진할 수도 후퇴할 수도 없는 입장이 됐다. 따라서 국면을 전환할만한 기동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될 가능성이 커지게 되고, 그러자면 당 내에서 보다 온건한 해법을 주장해온 측의 목소리에 힘이 실릴 수 있게 된다.

김한길 대표가 애초에 영수회담을 제안했던 것도 국면을 마무리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이게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 내 온건파도 강경파도 장외투쟁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끌려가게 됐던 것이다. 더욱 방어적으로 내몰리고 있는 처지에서는 영수회담 논란에 있어서도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5자회담의 개최 성사 여부에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김한길 대표 본인이 5자회담에 반대해왔기 때문에 이것이 성사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말하면 여당과 청와대에서 명분을 주기만 하면 언제든 실현될 수 있는 문제가 됐다고 말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5자회담이 성사될 경우 국정원 문제에 대한 논의 수위는 낮아질 것이며 이렇게 되면 당연히 당 내에서 반발이 불거지고 계파 갈등도 첨예해지겠지만 이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된다면 어쩔 수 없다는 판단을 이제는 할 필요가 있다.

▲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가 11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100시간 비상행동 선포식 및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오는 14일 당원 총동원령을 내리고 10만 국민촛불 성사를 위해 총력 투쟁 돌입을 선포했다. (뉴스1)

물론 길게 보면서 국정원 정국을 계속 끌고 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그간 촛불시위에 열심히 참여해온 통합진보당 등에 상당 기간 스피커를 빼앗기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국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을 당했으니 이제 이들은 더욱 열심히 장외투쟁에 결합할 것이다. 민주당이 하던 것처럼 통합진보당도 전 당원 동원령을 내릴 수 있다. 민주당 127명의 의원들이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와 이상규 의원 등의 들러리를 서는 듯한 사진이 역사의 한 순간으로 남는 게 어떤 정치적 효과로 귀결될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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