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밤 11시 경, ‘메디나충’이라는 낯선 벌레 이름이 포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영화 개봉으로 존재감을 알린 ‘연가시’는 2위에 올랐다. 이들은 모두 22일부터 첫 방송을 시작한 EBS <다큐프라임> ‘기생’에 등장한 주인공들이다.

참신한 소재 선정과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 덕분에 이미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하나의 ‘브랜드’를 만든 EBS <다큐프라임>.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상을 비롯해 각종 상을 휩쓸며 존재감을 인정받고 있지만, 방송 직후 실시간 검색어 1, 2위를 차지한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다. 첫 회부터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존재감으로 다가선 <다큐프라임> ‘기생’. <미디어스>는 26일 ‘기생’을 제작한 박성웅 PD를 만나 생생한 제작후기를 들어 보았다.

“기생충과 숙주의 공존 다루고 싶었다”

22일부터 25일까지 4부작으로 방송된 <다큐프라임> ‘기생’은 기생동물과 숙주가 서로 끝없이 경쟁하며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박성웅 PD는 2004년 우연히 보게 된 칼 짐머의 <기생충 제국>을 보고 ‘기생’ 제작의 영감을 얻었다고 전했다.

“그동안 우리는 ‘진화’를 얘기할 때 사람을 중심으로, ‘그럴듯한’ 대상을 가지고만 얘기를 했다. 그러다 우연히 ‘기생충은 인간이 의존하며 살아가는 생태계를 구성하고 인간을 포함한 숙주의 유전자를 수십 억 년 동안 조각해 왔다’는 <기생충 제국>을 보고 나서 기생충을 가지고도 진화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아직 잘 모르고 있는 내용이라 방송으로 다루기 매력적인 아이템이라는 점도 한 몫 했다. 책을 처음 본 것은 2004년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초보 PD라 일단 기획을 묵혀 두었다. 관련 책이 나오면 살펴보는 등 관심은 꾸준히 두고 있다가, 기회가 닿아 2011년부터 기획안을 쓰고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됐다”

▲ 박성웅 EBS '다큐프라임-기생' PD (사진=박성웅 PD 제공)
‘기생’ 첫 회에서는 숙주의 몸속으로 들어갔다가 새로운 ‘한 살이’(기생충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새롭게 의존할 숙주로 옮겨가기 위해 기존 숙주의 몸 속에서 빠져나온다)를 위해 나갈 때쯤, 숙주를 물속으로 이끄는 기생충인 메디나충과 연가시가 등장했다. 사람의 다리에서 꿈틀거리며 기어 나오는 메디나충과, 숙주를 조종해 투신시키는 것도 모자라 숙주의 알 대신 자신을 낳게 만드는 연가시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징그럽다’, ‘소름 돋는다’, ‘내 몸에도 저런 기생충이 있을까봐 겁이 난다’는 시청소감이 주를 이뤘던 까닭이다.

하지만 박성웅 PD는 단지 신기하고 충격적인 기생충을 부각시키기 위해 ‘기생’을 제작한 것은 아니다. 박성웅 PD는 “첫 회를 보고 사람들이 굉장히 쇼킹하다고 생각한 것 같고, 그래서 반응이 온 게 아닐까 싶다”면서도 “기생충 자체보다는 기생충과 숙주의 공존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기생’은 숙주를 조종하는 놀라운 기생충을 부각시키는 데만 그치지 않고, 기생충에 대처하는 숙주의 자세, 인간과 기생충의 관계를 두루 훑는다. 또한 그간의 제작후기와 촬영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포함된 마지막 편에서는, 기생충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옮겨 ‘소외 열대 질병’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외 열대 질병이란 빈곤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발생해 환자를 고통스럽게 하고 심할 경우 장애까지 겪게 하는 병이다. 주로 제3세계에서 일어나며 아프리카에서는 전체 사망률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위력이 대단하다.

“소외 열대 질병은 촬영하면서 처음 알게 된 것이다. 방송에서는 그나마 가장 강도가 약한 것을 넣은 거고, 강도가 높은 것은 나조차도 보기가 어렵더라. 문제는, 이런 병들은 저개발 국가, 소위 ‘돈 없는 지역’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거대 제약회사들이 약을 만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 사실 메디나충의 경우에도 상수도만 있으면 절대 발병할 수가 없는 병이다. 목욕하는 물과 먹는 물을 분리만 해 주면 연결고리가 끊어지는데 그런 인프라조차 없다는 애기다. 자연 다큐이기 때문에 깊이 접근하지는 못했지만 (시청자들에게) 이런 현실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 아프리카에서는 소외 열대 질병의 발병률이 높고, 소외 열대 질병 때문에 사망하는 비율도 약 70%에 이른다. (화면 캡처)

촬영도, 실험도 ‘최초’… 무모했던 도전들

본격적으로 기생충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없었기에 ‘기생’에서는 새로운 시도들이 많이 이루어졌다. 체체파리가 알을 낳는 장면이나, 체체파리가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장면, 사마귀가 연가시를 낳는 장면 등 많은 부분이 국내 최초로 촬영된 것들이다. 대부분 전파를 타기 전까지 숱한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장면이었고, 촬영이 실패로 돌아간 경우도 왕왕 있었다.

▲ 기생충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없었던 탓에, EBS '다큐프라임-기생'에서는 최초로 시도된 촬영이 많았다. 위는 체체파리의 출산과정, 아래는 체체파리의 흡혈 장면 (화면 캡처)

중남미 동물들은 체체파리가 옮기는 기생충 ‘트리파노소마’에 취약한데 유독 얼룩말만은 이 위험에서 벗어나 있다. 이때 한 학자가 얼룩말의 얼룩이 체체파리의 시선을 교란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박성웅 PD는 이 부분에 흥미를 느끼고 체체파리가 있는 아프리카 현지에서 공인된 논문 내용을 실험을 통해 검증하고자 했다.

“현지 사람에게 자리를 잘 잡아달라고 부탁했는데, 체체파리를 모여들게 하는 데 실패했다. 장소 선택이 잘못된 것이다. 말 모형을 만들어 끈끈이를 부착하고, 체체파리를 유도하려고 말 오줌까지 갖다놨지만 딱 한 마리만 왔다. 말 모형에 체체파리가 까맣게 붙어있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기대가 커서인지 매우 허탈했다. 방송 장면에는 나오지 않지만, 무척 화가 나서 장소 안내해 준 사람을 노려보는 컷이 있다(웃음) 다시 촬영하기 힘들어서 접었고, 논문을 재인용하는 선에 그쳐 아쉬웠다”

작은 크기의 기생충을 촬영하기 위해 특별히 신경 쓴 부분도 있다. 박성웅 PD는 시청자들에게 기생충의 모습을 더 선명하고 뚜렷하게 전달하고 싶었기에 ‘클로즈업’을 대폭 활용했다.

“ENG 카메라에는 접사가 없어서 DSLR에서 쓰는 접사렌즈를 마운트를 만들어 끼워서 썼다. 2mm 짜리인 기생벌이 화면이 그 정도 크기로 나올 수 있었던 건 접사렌즈 덕이다. 또, 이노비전이라는 렌즈도 썼다. 이 렌즈는 코끼리 코처럼 길고 반사경이 있어 각도를 조절할 수 있다. 사마귀가 연가시를 낳는 장면을 촬영했는데 원근감을 강하게 표현하는 이노비전의 극대화 효과가 잘 나타난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 다루는 <다큐프라임>의 힘… 차기작은 ‘독성 생물’

<다큐프라임>은 어느덧 EBS가 가진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될 만큼 성장했다. 29일 발표된 제40회 한국방송대상에서도 <다큐프라임>은 4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올해만 해도 ‘파더 쇼크’, ‘퍼펙트 베이비’ 등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박성웅 PD는 <다큐프라임>의 힘이 ‘제작 자율성’에서 나온다고 밝혔다. “6개월에 한 번씩 <다큐프라임> 선정위원회를 열고 1, 2차 심사를 거쳐 선정한 후, 편성 쪽과 제작비를 협의해 (제작을) 시작한다. ‘이런 아이템을 내면 남들이 좋아하겠지?’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낸다. 이렇게 처음부터 하고 싶은 아이템을 갖고 들어간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부장은 제작자와 협의는 하지만 ‘이런 건 하지 마라’ 이런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 거의 전권을 준다. 제작 자율성을 100% 보장하되, 평가는 프로그램으로 받는다는 주의다”

▲ 22일부터 25일까지 방송된 EBS 다큐프라임 '기생' (화면 캡처)

하지만 올해 들어 <다큐프라임>은 많은 부침을 겪기도 했다. 지난 4월 ‘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 편이 돌연 제작 중단됐고, 해당 아이템을 맡았던 김진혁 PD는 6월 말 EBS를 떠났다. 신용섭 사장 역시 <다큐프라임> 제작 중단 사태에 항의하는 PD들과 노조원들에게 “계속 시위하면 <다큐프라임> 폐지 확률 90%”라고 말했고, 이경재 방송통신위원장도 EBS 방문 자리에서 다큐멘터리 제작보다 학습 콘텐츠 제작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박성웅 PD는 “EBS는 TV과외방송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지식채널 e>, <다큐프라임>, <스페이스 공감>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안팎의 평가가 크게 달라졌다”며 “단적인 예로 <다큐프라임> 촬영 때문에 협조를 부탁한다고 하면 이제 다 알아보고 받아준다. <다큐프라임>은 EBS 브랜드 가치 제고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이어, “지상파 방송 3사가 드라마로 맞붙는 시간대에 3% 시청률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회사든 외부든 <다큐프라임> 약화 시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부장급 인사들도 대부분 제작자 출신이고 EBS 다큐멘터리가 지니는 함의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기생’에서 기생충과 숙주의 공존을 이야기한 박성웅 PD의 차기작은 무엇일까. 다음 번에도 ‘생물’과 ‘진화’를 다룰 예정이다.

“다음 아이템은 ‘독성 생물’이다. ‘기생’ 촬영하면서 화살촉 개구리를 알게 됐는데 무척 화려한 독개구리다. 그걸 보고 왜 독을 지닌 것들은 화려한 모습인 걸까? 독을 만드는 데 에너지도 많이 쓰일 텐데 왜 이 생물들은 독을 갖게 된 걸까? 독성 여부가 진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등의 호기심이 생겨 한 번 다뤄보자는 생각을 했다. 아마 관심이 이쪽에 관심이 없었다면 아이템으로 발전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올 11월부터 시작해 내후년 초쯤 방송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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