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의 놀라운 한 수가 나왔다.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갑작스럽게 참여정부 시기 남북정상회담의 대화록 일부를 발췌해 공개한 것이다. 이 문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의 포기를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 핵심으로 지난 대선에서도 보수층 결집 등을 노린 새누리당 측이 이슈화시킨 일이 있다.

서상기 위원장 등 새누리당 소속 국회 정보위 의원 5명은 20일 국회 정론관에서 “지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열람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하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을 확인했다”며 “만약 야당이 계속해서 책임회피로 일관할 경우 대화록 전문을 국민 앞에 공개하도록 추진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사실 갑작스러운 일이다. NLL 관련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굳이 새누리당 측이 NLL 포기 발언을 문제 삼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다.

핵심은 국정원 사건에 대한 새누리당의 입장이다. 새누리당은 반복해서 인터넷 게시판에 국정원 직원이 덧글을 단 것은 종북 세력에 대한 대북심리전의 차원이며 그것이 국정원 고유의 업무라는 점을 강조해왔다.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이 “종북세력의 제도권 진입을 막아야 한다”, “종북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 안 된다”고 발언한 것은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일반론을 거론한 것일 뿐이라는 것 또한 새누리당 측의 일관된 입장이다. 새누리당 측 인사들은 이러한 주장을 각종 언론을 통해 수차례 거듭해왔다.

NLL대화록을 둘러싼 공방

이런 측면에서 보면 새누리당 측이 갑작스레 소위 NLL 대화록을 들고 나온 이유도 이해가 된다. 종북세력의 위세가 이렇게나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최근 국정원 측이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하하는 글을 SNS에 대량으로 올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SNS에서 활약하는 한 보수인사는 국정원 초청강연에서 종북 개념을 넓게 잡으면 박원순 시장도 종북주의자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전임 대통령도 종북, 서울시장도 종북, 세상이 종북 천지인데 국정원이 인터넷 게시판에 댓글을 달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임무 아닌가? 즉, 전형적인 색깔론 공세를 펼치겠다는 것이 새누리당의 전략적 판단일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전병헌 원내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 및 의원·당직자들이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린 '국정원 국기문란 국정조사 촉구 결의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국정원 수사 결과 발표 후 첫 옥외집회를 연 김 대표는 이 자리에서 "국가권력기관의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국민 분노가 여의도를 넘어서고 있다"며 "NLL 대화록이 아니라 세상 어느것을 가져와도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에 대한 국정조사를 막을 수는 없다"고 밝혔다. (뉴스1)

민주당 측은 NLL 대화록 공개가 위법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국회 정보위원회 간사인 정청래 민주당 의원은 20일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원이 새누리당 의원들에게만 발췌록을 보여준 것은 대통령기록물관리법과 국정원법 위반”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국회 정보위원장인 서상기 새누리당 의원 측은 “공공기록물의 경우는 그것을 관할하는 기관의 장이 허락하면 된다”며 “국정원장이 정보위원으로서 볼 권리가 있다고 판단해 우리의 확실한 기본 권리를 인정하고 보여준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다만 공공기록물이라 하더라도 해당 기록은 ‘비밀기록물’에 해당하기 때문에 내용을 공표했을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남재준 국정원장과 서상기 정보위원장, 새누리당 소속 정보위원들은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정보공개법)’을 위반한 것이 될 가능성이 생긴다. 때문에 민주당 측은 남재준 국정원장을 대통령기록물법과 공공기록물관리법, 국정원법 위반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20일 오후 서상기 정보위원장이 최경환 원내대표실을 방문한 사실을 두고도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일부 민주당 측은 서상기 정보위원장의 기자회견이 당 지도부와 사실상의 교감을 가진 상태에서 진행됐다고 주장하기도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사건에 청와대의 의중이 개입된 것이 아니냐는 결론에 이르는 것도 가능한 일이 된다.

보수의 위기?

결국 6월 임시국회에서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이 마무리 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국은 얼어붙고 야당은 강경 투쟁을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대학생들의 시국선언 등으로 사회적 논란은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2008년 촛불시위의 양상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성급한 지적을 내놓는 목소리도 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박근혜 대통령은 관리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타협도 하고 소통도 하지만 일단 용납할 수 없는 문제가 되면 어떤 타협도 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특징을 갖고 있다”며 “2008년 수준의 저항이 일어나게 되면 강경진압을 실시하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강경진압의 결과로 민심이 이반되면 또 다시 국론이 분열되는 등의 일대 혼란이 벌어져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는 게 이 관계자의 주장이다.

즉, 국정원 사건을 둘러싼 논란이 상황에 따라서는 ‘보수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통찰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에 대해 깔끔한 정리를 했어야 했는데 이미 이 주제는 ‘타협할 수 없는’ 문제로 인식된 것 같다는 게 일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고, 그러면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뼈아픈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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