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경제민주화 추진 의지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17일 박근혜 대통령이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경제민주화 관련정책이나 입법은 의지를 갖고 꾸준히 잘 추진해 기업들이 건전하고 투명하게 기업을 이끌어가고 상생하는 경제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데 앞장서도록 하면서도 기업들을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과도하게 왜곡되거나 변질돼서는 안 된다”고 발언한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야당은 즉각적인 반발 목소리를 냈다. 전병헌 원내대표는 18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새누리당은 기다렸다는듯 속도조절을 외치며 브레이크를 걸고 나섰다. 갑을이 아니라 갑을병정이 다 중요하다며 너스레를 떨고 있다”며 “지금 조절해야 할 것은 속도가 아니다. 불공정한 갑을관계의 조정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장병완 정책위의장도 어떤 법안이 경제를 죽이는 법안인지 정부와 여당이 밝혀야 한다고 밝혔다.

▲ 현오석 부총리가 18일 서울 렉싱턴호텔에서 열린 공정거래위원장 및 국세ㆍ관세청장과의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하지만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경제민주화 입법에 대한 정부의 견해는 대체로 부정적인 분위기라는 점이 반복해서 확인된다. 18일 오전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여의도의 한 호텔에서 노대래 공정거래위원장, 김덕중 국세청장, 백운찬 관세청장과 조찬 회동을 하면서 “정책 목표가 바람직하더라도 추진과정에서 기업의 위축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면서 “기업 활동이 잘돼야 경기 회복도 빠르고 저성장 흐름도 끊을 수 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당·정·청 일사불란

이러한 상황은 그간 어느 정도 예견돼 오던 것이다. 지난 13일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은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국회에서 경제민주화 관련 입법 논의가 과도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을 위한 부당 단가 근절대책’에 대한 브리핑을 하던 중에 나온 발언이다.

▲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 (뉴스1)
조원동 경제수석은 “이 문제에 대해 행정부가 어떤 솔루션을 갖고 있느냐를 확실히 보여드리는 것이 여야 간 갑을문화를 바꾸기 위한 경쟁적인 입법을 조금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으냐 하는 생각에서, 정부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느냐를 보여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발표하게 된 것”이라며 취지를 설명했다.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경제민주화 입법에 대한 가이드라인 성격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 역시 비슷한 인식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최경환 원내대표는 18일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일부 언론에서 ‘경제민주화 속도조절론’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라면서 “과잉입법과 부실입법을 방지하겠다는 의미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발언했다.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 입법에 대한 부실한 의지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셈이다.

김용태 새누리당 의원은 18일 YTN라디오 <전원책의 출발 새아침>에 출연해 경제민주화 입법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드러냈다. 김용태 의원은 현재 입법 논의 중인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 중 부당내부거래 금지를 담은 공정거래법 개정안, 금융사의 비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을 담은 공정거래법 개정안,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담은 금융회사 지배구조법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며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재계도 일제히 발 벗고 나서

정부 여당의 이러한 경제민주화 입법에 대한 문제제기에 재계도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더하는 형국이다. 주요경제단체들은 최근 경제민주화와 관련된 법안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연구 및 설문조사를 잇따라 발표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17일 ‘오바마 정부의 기업 살리기 정책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는 “우호적인 기업환경 조성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오바마 정부의 정책 핵심”이며 “그 성과로 1기 출범 당시 10%까지 올랐던 실업률을 최근 7%대 중반으로 끌어내렸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을 살리는 데 집중해야 실업률도 줄고 정부에 대한 인기도 증가할 것이라는 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도 대기업 161곳, 중소기업 147곳 등 308개사의 인사담당 부서장을 대상으로 ‘6월 임시국회 쟁점 노동법안에 대한 기업 의견’을 조사한 결과 87.1%가 ‘경영부담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답했다는 조사결과를 17일 공개했다. 이 조사에서 52,3%의 기업들이 가장 부담이 되는 노동관련 법안으로 휴일근로를 연장근로시간 한도에 포함하는 ‘근로시간 단축 법안’을 꼽았다. 이러한 조사 결과에 대해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노동 규제를 강화할 경우 새로운 일자리창출을 통한 고용률 70% 달성이 어려워지고 기존 일자리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것” 이라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시적인 성과 있어야 지방선거 승리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경제민주화 관련 이슈를 선점해 재미를 봤던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민주화와 관련 일사불란한 후퇴를 감행하고 있는 것에는 이러한 재계의 반발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재계는 그간 경제민주화 관련 논의의 당위는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인 부분에서 갖가지 이유를 들며 경제민주화 관련 입법의 부당함을 주장하기 위한 여러 노력을 해왔다. 이러한 여론이 대통령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주요한 계기가 됐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 새누리당 최경환 원내대표가 김기현 정책위의장, 김재원 전략기획본부장과 1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하지만 정부와 여당이 좀 더 큰 틀에서 정치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정치권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내년 지방선거에 앞서 경제 관련한 지표가 실제로 개선이 돼야 여당이 선거에서 유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과 일본의 양적완화를 둘러싼 국제경제의 불확실성 등이 국내 경기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황이 계속 이어질 경우 내년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주장인 셈이다.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17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정부가 벤처지원대책·일자리로드맵·창조경제실천계획 등 경제 활성화 대책으로 가라앉은 경제 분위기를 되살리면 하반기엔 3%대 성장도 가능할 것”이라며 “올해 연간으로 보면 2% 중반의 성장을 예상하고 있고, 내년에는 4%대 성장이 가능하다”는 전망을 밝힌 바 있다. 최근의 흐름으로 보면 상당한 수치를 내놓은 셈이다. 이 계획이 실현될 수 있다면 정부의 입장에서는 내년에 “외부로부터 가해진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할 말이 생기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경제민주화 입법 논의는 일정 부분 유실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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