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8일 영국 전 총리 마거릿 대처가 사망했다. 그녀가 십년하고도 한 해나 더 영국 총리로 있었고 그 세월 동안 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세계가 시장지상주의(지금은 ‘신자유주의’라 불리지만 사실 대처는 레이건과 함께 ‘신보수주의’ 쪽을 더 선호했다)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이제 현대사의 상식이 되어 있다.

영국 현지뿐만 아니라 국내 언론들까지도 그녀의 죽음을 대서특필하고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그 일생을 회고하는 글들을 실었다. 예의를 갖춘 추모사들 중에는 이른바 ‘진보’ 쪽 명망가들의 것도 더러 있었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동방예의지국의 전통은 참으로 유구하기도 하다.

예절로 따지면 영국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나라인데, 막상 대처의 고국에서는 분위기가 훨씬 더 화끈했다. 런던의 브릭스턴이나 스코틀랜드 곳곳에서는 ‘철의 여인’이 드디어 이 행성에서 사라진 것을 축하하며 거리에서 흥겨운 술판이 벌어졌다. 이중에는 당연히 80년대 어느 거리에서 매기(마거릿의 애칭)에게 쌍욕을 내뱉으며 경찰 기동대와 한 판 붙었던 세대도 있었지만, 그녀가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 태어난 젊은이들도 많았다.

▲ 영국의 전 총리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 (사진출처 : http://www.huffingtonpost.co.uk )

대처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는 노동자나 좌파 성향 시민들이야 당연히 원한이 사무쳤을 테지만, 젊은 세대는 또 그들 나름대로 2008년 이후 나락으로 치닫는 영국 현실이 대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녀의 죽음을 축하할 이유가 충분했다. 나 역시 지구 한 바퀴의 거리만 아니라면 어줍지 않은 예의 일랑 잊고 이 자리에 끼어 모처럼 신나는 술자리에 함께 하고 싶은 심정이다.

인류 역사에 길이 기억될 파괴자

마거릿 대처 여사는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녀는 인류 역사에 길이 기억될 파괴자였다. 어떤 장벽에 마주친 한 시대를 자신이 대변하고자 하는 세력의 입장에서 철저히 파괴한 사람이었다. 1979년 집권하자마자 그녀가 한 일은 철도 같은 필수 공공 설비와 거대 공기업들을 ‘민영화’라는 구호 아래 자본시장 매물로 내놓은 것이었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식코(Sicko)>에서 토니 벤(대처의 호적수 중 한 명이었던 노동당 좌파 정치가)이 증언한 대로, “혁명이라도 일어날까봐” 무상공공의료(국민보건서비스, NHS)까지 없애지는 못했지만 재정 투자를 줄여 점차 고사시키는 장기 포위전에 돌입했다.

1984년에는 1년간 광산노조(NUM)와 거의 내전을 방불케 하는 대결을 벌인 끝에 영국 노동계급의 역사적 거점들 중 하나인 광산 지대를 실업자 집단 거주지로 만들어놓았다. 탄광촌의 운명은 곧바로 북부 잉글랜드의 모든 공업 지대로 확산되었고, 대신 대처는 런던의 시티(금융가)에 무한한 자유를 선사했다. 광역 지방자치단체가 자신에게 맞서는 좌파의 온상 역할을 하자 1986년에는 아예 광역 지자체 자체를 없애 버렸다. 베네수엘라의 고 차베스 대통령이 이런 짓을 했더라면 분명 미국의 침공 명분이 됐을 것이다. 집권 말기에는 현실사회주의권도 망해가는 김에 아주 기고만장해져 인두세를 걷겠다고 나서다가 결국 거리 폭동을 불러일으켰고, 그래서 불안을 느낀 보수당 동료들이 나서 거의 강제로 총리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 대처 집권 시기 광산폐쇄정책에 맞서 파업을 했다가 진압당하는 광부들. (사진 출처 : http://www.bloomberg.com )

대처는 이런 사람이었다. 위의 묘사가 너무 편향되게 느껴진다면, <가디언(The Guardian)>의 경제 담당 칼럼니스트 레리 엘리엇이 훨씬 차분한 어투로 정리한 평가(“Did Margaret Thatcher transform Britain's economy for better or worse?”, 4월 8일자)를 보자. 그에 따르면, 그녀의 경제 정책의 유산은, 첫째 완전 고용이 아니라 물가 통제를 거시경제정책의 중심에 놓은 것이고, 둘째 노자 관계를 자본가 쪽으로 확 구부린 것이며, 셋째 산업 정책을 모두 폐기한 것이고, 넷째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부를 몰아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조업은 사라져 과거보다 외려 더 많은 이들이 복지 수당에 의존해 살아가고 나라 전체는 오직 시티 한 곳만을 바라보는 현재의 영국 사회가 등장했다.

신자유주의의 세계사적 나팔수

이 정도 정리만으로도 대처가 얼마나 타고난 파괴자인지 확인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녀는 흔히 ‘케인스주의’라 불리는 전후 합의를 돌이킬 수 없이 해체해버렸다. 정말 아무 미련 없이 짓밟아 버렸다. 오죽 하면 노동당의 정적들뿐만 아니라 보수당 전임 총리 에드워드 히스까지도 죽을 때까지 그녀를 그토록 미워했겠는가.

물론 대처 혼자 신자유주의 시대를 열어젖힌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과장이다. 그녀가 집권할 무렵의 영국은 이미 그럴 수 있는 세계사의 무대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의 본산은 역시 아메리카 제국이고, 영국은 이제 그 한 제후국일 뿐이다. 이 점에서, 영국의 좌파 논객 스튜어트 홀이 대처를 헤겔적 의미의 “세계사적 개인”이라 칭한 바 있지만, 진정한 ‘세계사적 개인’은 역시 로널드 레이건이나 빌 클린턴이다.

▲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40대 미국 대통령. 감세와 복지축소를 핵심으로 하는 '레이거노믹스'를 밀어붙이고 강경한 대외정책을 펴 보수적 대통령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 됐다. (사진 출처 : http://npr.org )

하지만 그렇다고 이후의 세계사 전개에 대한 대처의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비록 영국이 더 이상 제국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지구 자본주의 중심부의 일원이기는 하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사람들 목숨 값으로 벌이는 실험은 전두환 같은 자들에게 동지애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세상의 규범(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 자리를 넘볼 수는 없다. 반면 영국에서 대처가 파업 광부들을 철저히 짓밟는 행위의 위상은 전혀 다르다. 이것은 전 지구적인 계급 세력 관계가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알리는 장엄한 나팔 소리가 된다. 대처는 그 ‘세계사적 나팔수’(‘조타수’는 아니더라도)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처에 대한 적대자의 추모(?)문이 그냥 이렇게 끝날 수만은 없다. 이를 갈면서 마감하는 것만으로는 이 몹쓸 넋을 이승에서 완전히 떠나보내기에 미흡하다. 자칫 유령이 되어 돌아올 틈을 열어줄 수 있다. 무엇보다, 그녀를 파괴자로만 기억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녀는 파괴자이면서 동시에 건설자였다. 새로운 질서의 설계자였다.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단순히 전후 케인스주의의 해체만이 아니라 이를 대체할 새 질서를 건설하려던 시도였던 것처럼 말이다.

새로운 시대, 우파적 질서의 건설자

이 대목에서 환기해볼만한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나오미 클라인의 저작 <쇼크 독트린>(김소희 옮김, 살림Biz, 2008)이 전하는 일화다. 대처의 정신적 스승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1982년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를 방문하고 나서 열에 들떠 영국 총리에게 편지를 보냈다. 영국에서도 피노체트처럼 화끈하게 밀어붙이라는 것이었다.

▲ 존 메이너드 케인즈와 격렬한 대립을 보이며 밀턴 프리드먼으로 대표되는 통화주의의 기초를 쌓은 것으로 알려진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한데 대처의 답은 싸늘했다. 한 마디로 이런 얘기였다. “선생님, 영국은 칠레가 아니랍니다.” 보수당 동료들에게 하이에크의 책 <노예로의 길(The Road to Serfdom)>을 흔들어대며 이게 우리 성전이라고 외치던 대처였지만, 대중 정치가로서 그녀의 마키아벨리적 이성은 노망든 경제학 교수의 광기보다 윗길이었던 것이다.

대처가 탱크 대신 선택한 것은 ‘대중 자본주의(혹은 인민 자본주의)’ 구상이었다. 중산층과 노동계급 상층에게 완전 고용과 보편 복지의 안락함을 빼앗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탈만으로는 지속 불가능하다. ‘새 질서’가 수립되려면 역시 동의가 새롭게 형성되어야 한다. ‘대중 자본주의’ 구상은 금융 세력이 만들어놓은 새 질서 안에서 중산층과 노동계급 일부도 제 몫을 찾게(혹은 ‘찾을 있다고 믿게’) 만들어 그러한 동의를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다수의 대중 역시 자산시장 투자자로 판에 끌어들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처 정부는 공기업을 ‘민영화’하면서도 민간 대자본에게 손쉽게 팔아치우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굳이 국민주로 쪼개어 주식 시장에 내놓았다. 공공 자산을 자본 투자의 매물로 만들면서 동시에 다수의 ‘개미’ 투자자들을 만들어내는 것, 그게 목표였던 것이다.

또 다른 야심찬 정책은 공공임대주택 매각이었다. 대처 정부는 지자체 소유 공공임대주택을 싼 값에 입주자들에게 분양했다. 당장의 경제적 이득만 고려한다면, 남는 게 없는 장사였다. 하지만 길게 보면, 이야기가 달랐다. 대처 집권기를 거치면서 영국에는 거대한 부동산 시장이 형성됐다. 한때 노동당 고정 지지층이었던 과거 공공임대주택 거주자들 중 상당수는 이제 선거 때마다 어느 쪽을 찍어야 집값을 더 올릴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다.

좌파적 방식의 건설자가 필요하다

이후 영국의 집권자들은 철저히 대처가 만들어놓은 질서 안에서만 놀았다. 그 울타리는 이제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자연적’ 한계가 되었다. 이것을 고상하게 표현한 게 신노동당파(New Labour)의 ‘제3의 길’ 노선이었다. 제조업을 되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금융 산업만이 살 길이다, 다만 더 많은 이들이 금융화된 경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후원하기 위해 ‘근로 연계 복지’가 필요하다, 자산 시장은 당연히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 (우주적) 팽창에 한계는 없다, 등등.

▲ 영국노동당 당수로 총리가 돼 '제3의길'을 추진했으나 보수의 후계자라는 악평을 들은 토니 블레어(Tony Blair) (사진 출처 : http://inquirer.net )

이것이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의 신조였다(그리고 또한 김대중, 노무현 정권도). 누가 봐도 이들의 정신적 뿌리는 케어 하디도, 존 메이너드 케인스도 아닌 마거릿 대처였다. 블레어가 노동당에 입양된 대처의 숨겨진 손자라는, 한국의 아침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돌았다. 2008년 금융 위기가 일어날 때쯤이면 이미 대처가 동지 레이건처럼 정신이 오락가락했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녀는 분명 세상사의 흐름에 더없이 만족한 채로 눈을 감았을 것이다.

이렇듯 대처가 파괴자이면서 동시에 건설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단지 적을 추켜 세워주는 쓸데없는 호기를 부리기 위해서는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대처의 죽음에 건배를 드는 것만으로는 좌파가 결코 채울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결코 그 죄 많은 삶을 우리 손으로 끝장내지 못했다는 아쉬움 따위는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지금 좌파에게 자신의 ‘대처’가 없다는 것이다. 낡은 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그것을 미련 없이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의 초석을 놓는 일에 ‘아직’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사자이면서 때로는 여우인 야수 같은 힘으로 운명을 낚아채는 ‘정치’가 지구 자본주의의 한 복판에서 좀처럼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술판은 길지 않을수록 좋고, 어쩌면 약간의 애도도 허물은 아닐지 모르겠다. 이 절박한 부름, 우리 편의 ‘대처’가 있어야겠다는 이 요청을 흘려버리지 않는 것만이 그녀의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영원히 역사 저편으로 묻어 버리는 일임을 안다면 말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