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석발언권’이 화제에 올랐다. 13일 국회 기재위에서 열린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서병수 새누리당 의원의 ‘한국은행의 독립성 강화’에 대한 질문에 현오석 내정자가 “긍정적인 측면에서 열석 발언의 의도는 재정당국인 정부와 통화당국간 정보교환의 장이라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 인사청문회에서 질의에 답변하고 있는 현오석 경제부총리 내정자. ⓒ뉴스1

일각에서는 이 발언을 그간 논란이 되어온 열석발언권이 새 정부에서도 효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신호로 해석하기도 하나 또 일부에서는 열석발언권을 융통성 있게 활용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이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현오석 내정자가 “긍정적인 측면에서 양 기관의 신뢰 문제다”라면서 “신뢰를 형성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볼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말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열석발언권이란?

열석발언권이란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 기획재정부 차관과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해 정부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한국은행법 제91조에 의해 이러한 권한이 보장돼있다. 단, 기획재정부 차관과 금융위 부위원장이 금통위 성원이 아니기 때문에 의사결정에는 참여할 수 없다.

▲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 경제기획원 시절부터 '일벌레'로 유명했다는 후문이다. ⓒ뉴스1
금융통화위원회는 한국은행 산하에 설치된 위원회로 한국은행의 통화·신용정책에 대한 주요사항을 의결한다. 쉽게 말하면 화폐량, 금리 등을 조정하는 통화정책의 방향이 여기서 다 정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은행이 무자본특수법인이기 때문에 정부조직으로 분류되지는 않으나 사실상 국가의 통화정책을 좌지우지해야 하는 임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성격에 대한 논란이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

경제관료 중 재무부 출신은 통화정책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경우가 많다. 강만수 산은지주 회장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강만수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환율은 주권”이라며 통화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기획재정부 장관을 하던 시기에는 소위 ‘고환율 정책’으로 원성을 듣기도 했다.

반대로 경제기획원 출신들은 통화정책에 대한 개입에 소극적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굳이 손을 대야 한다면 환율, 금리를 통해 경기를 조절하는 통화정책보다 조세나 정부지출을 통하는 재정정책의 사용을 더 선호한다. 경제기획원 출신인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이 수차례나 ‘재정의 역할’을 강조한 것도 이러한 맥락을 반영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경제기획원 출신들이 대거 기용된 박근혜 정부에서 열석발언권을 행사할지 여부는 이후 정책 방향을 가늠해볼 기준일 수 있었던 것이다. 열석발언권은 1999년 이후 정부가 행사하지 않아 왔는데 2010년 이명박 정부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이유로 정부가 다시 행사해오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한국은행 측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어쩌다 일정 등의 문제로 정부 측이 금통위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면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다는 뒷말이 있을 정도다.

▲ 신제윤 금융위원회 위원장 후보자가 참석하지 못한 금통위 분위기를 전한 이데일리의 14일자 기사.

모피아와 한국은행의 끈질긴 악연

통화정책 전반을 한국은행이 독점해서 관장해야 한다는 게 한국은행의 전통적 입장이다. 따라서 한국은행은 재무부 출신 관료들과는 아주 사이가 좋지 않다. 한국은행의 제1목표는 물가 안정을 통해 경제성장에 이바지 하는 것인데 정부가 여기에 개입하면 한국은행의 목표와는 상충되는 방식으로 경기부양을 도모해 인플레이션 압력이 증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까지 이어진 정부주도의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물가상승률 등의 목표를 행정부가 설정했기 때문에 한국은행은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라는 치욕적인 별명을 얻으며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이 크게 일어나면서 한국은행도 중앙은행 독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성과는 1997년 한은법 개정이 통과되면서 겨우 얻어졌다. 한국은행의 무자본특수법인이라는 법인격, 중립성, 공공성, 투명성 등의 조항이 삽입됐기 때문이다.

▲ 강만수 산은지주 회장. 재정경제부 차관 시절 한국은행과의 전면전에서 선봉에 섰다. ⓒ뉴스1
그러나 이 과정에서 모피아와 한국은행은 그야말로 ‘카인과 아벨’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끝없이 대립했다. 한국은행이 지속적으로 주장한 중앙은행 독립에 대해 모피아들은 “더 이상 어떻게 독립하겠다는 거냐”는 냉소적인 반응으로 일관했다. 강만수 산은지주 회장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선진국의 어떤 국가도 통화정책을 포기하지는 않았다면서 한국은행의 주장을 비판했다. 심지어 그는 1950년에 한국은행과 현재 금통위의 법적 위상에 중요한 참고가 된 ‘블룸필드 보고서’를 미국 모 대학 도서관을 뒤져 찾아낸 후 이의 검토를 통해 한국은행의 주장에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강만수 회장의 이 저서는 2005년에 출간됐는데, 2010년에 한국은행은 듀크대학에서 발견된 블룸필드 박사의 유고를 들어 이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 이 원고에는 건국초기헌법과 국회법을 만드는 데 관여했던 프랭켈 박사에게 블룸필드가 ‘금통위는 한국은행 내부 조직이며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구’라는 자문을 받았다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법적 위상이 무엇이든…

외국의 경우 중앙은행의 역할과 위상은 국가마다 제각기 다르다. 중앙은행 자체가 행정기관인 경우도 있고 독립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최근의 흐름은 중앙은행의 법적 지위가 어떻든 정부의 정책에 보조를 맞춰가는 모습이 많이 보여지고 있다.

최근 ‘엔저’를 밀어 붙이고 있는 일본은행이 대표적이다. 아베 신조 총리가 강력한 양적완화의 시행을 주장하자 일본은행은 애초 1%로 정해두고 있었던 물가목표를 2%로 조정했다. 양적완화가 시행되면 인플레이션 압력이 증가하므로 물가가 인상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지난 1월 아베 신조 총리는 양적완화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을 경우 일본은행법을 고쳐서라도 일본은행에 강력한 부양 의무를 지우겠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조지 오스본 영국 재무장관도 지난 6일 ‘재정 보수주의와 통화 행동주의’를 통해 경기부양을 할 수 있도록 영란은행 총재에게 권한을 더 줄 것이라는 발언을 내놓았다. 중앙은행의 권한을 보장하지만 그것을 통해 정부 정책의 시행에 발을 맞춰줄 것을 기대한 것이다. 마크 카니 신임 영란은행 총재도 이러한 논의를 하는 것에 대해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마크 카니 총재는 인플레이션이 아닌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목표를 설정하기도 했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강만수 회장의 주장에 따르면 연방준비제도위원회라고 불러야 한다)의 경우 물가안정과 최대 고용 창출의 두 가지 목표 이행에 대한 의무를 갖고 있다. 한국은행이 물가안정에 대한 의무만을 가지는 것과는 다르다. 물가안정은 중앙은행의 전통적인 정책 목표이지만 최대 고용 창출은 그 이상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의 이행은 정부정책에 대한 고려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의사봉을 내리치는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 그가 하늘색 넥타이를 매고 오면 금리가 동결된다는 속설이 있다. ⓒ뉴스1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글로벌 금융기업인 스위스 UBS의 만수르 모히-우딘 외환전략 담당 이사는 지난 1월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를 통해 물가 안정이라는 단일 목표의 중앙은행 시대는 갔다고 주장했다. 미 연준, 영란은행, 일본은행의 공격적 움직임에 주목한 것이다.

한국은행 김중수 총재도 지난 달 21일 ‘2013 경제학 공동학술대회 제1전체회의’에서 발표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통화정책’을 주제로 한 논문에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하겠다”며 “중앙은행의 독립이 고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다른 정책과의 조화를 배제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다만 명목국내총생산(GDP)목표제 등의 도입에 대해서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혔다. 신축적인 물가안정목표제와 다른 거시건전성정책의 혼합 정도가 현실적 대안이라는 것이다.

김중수 총재의 이러한 입장은 과거 한국은행이 가졌던 입장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내정자가 ‘중앙은행과의 신뢰’를 강조한 것도 이런 측면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법적 위상에 대한 공방 보다는 정책의 방향을 어떻게 공동으로 맞춰갈 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부와 중앙은행의 뿌리깊은 불신과 반목이 새 정부에서 해결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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