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하반기 천만관객을 동원한 영화 '광해'의 포스터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최근 가장 존경하는 조선시대의 왕으로 광해군을 뽑았다고 한다. (링크)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전문 포털 리얼히스토리(www.realhistory.co.kr)가 회원 3015명을 대상으로 일주일간 설문 조사한 결과 ‘광해군’은 세종(30%), 정조(15%), 성종(7%), 태조(5%), 영조(4%) 등을 제치고 32%의 응답률로 1위를 기록했다.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리얼히스토리 측은 “반정에 의해 밀려난 비운의 왕 광해군이 세종을 제치고 1위를 기록한 것은 이색 결과”라고 평하며 “1천만 명이 넘는 관객수를 동원한 영화 <광해>의 인기와 함께, 극심한 불황과 청년실업문제 등 2030세대에게 체감 높은 사회문제들이 대두되면서 개혁 정치를 펼쳤던 광해군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으로 분석했다고 한다.

한국인들에게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세종을 제치고 광해군이 ‘가장 존경하는 조선 시대의 왕’이 된 것은 ‘천만영화’의 힘을 빼고는 해석될 수 없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갈리는 편인데 '명백한 성군'으로 여겨지는 세종보다 위에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의 여러 결을 보여주는 프레시안 대담 기사 링크) 굳이 광해군에 대해 균형잡힌 평가를 한다면 대동법 시행을 그의 공로라 보기엔 본인이 그것의 실시에 소극적이었고 무리한 궁궐 중축 등으로 백성의 원성을 샀지만 실리외교에 대해선 평가할 부분이 있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쫓겨났다고 해서 다른 조선 왕보다 못하다고 평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왕들보다 괜찮았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수준이다.

그런 정도의 군주에 대한 허구적 창작물이 역사인식까지 바꾸는 상황은 무슨 의미인 걸까? 조사 대상자들은 중고등학생도 아니고 주로 공무원 시험 등을 위해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하는 청년들일 것이다. 말하자면 ‘고등교육을 받은 성인 집단’에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일인 것이다.

문화평론가 이택광 교수는 이런 현상을 ‘한국인들 특유의 역사관’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사회는 고등교육 차원에서의 역사교육이 부실하고, 역사에 대한 관점이 지극히 상대주의적이다. 해석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지는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학계의 주류적 역사해석을 신뢰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역사가 제대로 정립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바로 정립해야 한다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정치의식에 비유할 수 있겠는데, 한국 정치가 ‘친일파 청산’을 못했기 때문에 잘못 되었고 언젠가는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는 기득권층의 시선이나 사대주의를 반영할 것이고 언젠가 ‘올바른 관점’으로 뒤집어야 한다는 생각이 만연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과거에는 이러한 인식이 민족주의와 함께 나타났으나, 요즘은 기득권 세력에 대한 박탈감으로 인해 더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그는 “미국에서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경쟁의 논리로 기성세대의 ‘연고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의 청년세대도 우익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경쟁의 논리로 기성세대나 기득권세력의 ‘연고주의’를 비판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우익논리로 기득권을 비판하며 정규직 노동조합도 비판한다든지 하는 상황이 올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역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상대주의적 관점 때문에, ‘역사해석에 대한 투쟁’ 역시 이 투쟁의 일환이 될 수가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사실은 기성세대나 기득권층이 광해군에 대한 해석을 만들어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청년세대는 광해군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 해석을 ‘기득권 논리’로 이해할 수 있다. 단순히 영화와 현실을 혼동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학계의 논리보다 영화 <광해>의 해석을 더 수용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지난 주말 [미디어스 컬트 칼럼;오덕어스]에서 영화 <광해>가 보여주는 정치의식과 그 문제를 면밀하게 분석했더니 ‘재미로 보는 영화를 정치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마라’는 반응이 나왔다. (기사 링크) 하지만 이 설문조사와 이택광 교수의 분석을 따른다면 청년세대는 이미 그 영화를 ‘정치적으로 소비’한 것이라 여겨진다.

즉 <광해>의 흥행과 이 설문조사의 결과는 지난 대선의 세대투표나 대선 이후 <레미제라블>의 흥행과 비슷한 궤의 사건이라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의식은 보수정당의 문법을 의심하고 냉소하는 만큼이나 진보정당의 방식 역시 의심하거나 냉소하는 것이다. ‘앙시엥 레짐’에 대한 환멸이 큰 이 ‘탈정치적인 정치성’을 어떻게 끌어안고 다른 정치성으로 견인할 수 있을지 여부가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모든 한국의 정치세력에게 숙제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광해>는 역사적 인물 ‘광해군’보다 훨씬 정치적인 것이라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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