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시민 전 의원의 트위터 캡쳐

진보정의당 소속 유시민 전 의원이 오늘 오전 트위터를 통해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그만둘 것을 선언했다. 흔히 쓰는 ‘정계은퇴’라는 말이 아니라 ‘직업으로서의 정치’라고 말을 조심스레 고른 것으로 보아 탈당선언으로 시사되는 것을 경계한 듯하다. 즉 그는 다른 정치적 의도없이 순수하게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내가 원하는 삶을 찾고 싶어서” 이런 선언을 하게 된 거라고 생각된다.

유시민의 인생에는 학생운동권, 저술가, 사회평론가, 정치인 등 여러 측면이 있었다. 그는 이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평을 들어야 할 만큼 늙지 않았고, 나머지 부분들 중에선 현재진행형인 것들도 있다. 따라서 그의 선언에서 우리가 돌이켜봐야 할 것은 그가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했던 십 년의 활동일 것이다. ‘짧지만 굵었던’ 그의 활동을 시기별로 정리해 보았다.

심판이 아닌 선수로 뛰겠다 선언

▲ 당시의 인터뷰하는 유시민의 모습 ⓒ오마이뉴스
그의 정계입문은 일종의 ‘절필선언’으로부터 이루어졌다. 당시는 민주당 국민참여경선으로 탄생한 노무현 후보가 지방선거의 패배 이후 민주당 내부에서 비판받고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민주당 의원 중 상당수가 후보 사퇴와 신당 창당을 원했다. 이에 2002년 7월 유시민은 ‘심판’질을 그만두고 직접 ‘선수’로 뛰겠다며 “화염병을 들고 바리케이드로 뛰어드는 심정으로” 절필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 ‘절필’은 ‘활동을 그만두기 위한 절필이 아니라 다른 활동을 하기 위한 절필이었다. (당시 오마이뉴스 인터뷰 링크)

실제로 직접 링 위로 올라온 유시민이 한 최초의 활동은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의 출간이었다. 유시민은 8월 15일 광복절에 이 책의 서문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2002년 대선을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싸움으로 규정’하고, 이 싸움이 상식과 몰상식의 싸움, 미래를 지향하는 개혁 세력과 과거로 퇴행하는 수구 기득권의 싸움이라고 강변했다.

개혁당 창당

이어서 같은 해 8월 28일, 그는 신속하게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했다. 개혁당은 ‘반부패, 국민통합, 참여민주주의, 인터넷 정당’이란 가치를 내 건 당원 민주주의 정당이었다. 유시민은 이 정당의 컨셉에 대해 “민주당의 강령에 민주노동당의 시스템을 결합한 것”이라 설명하기도 했다.

개혁당 창당은 당시 정국에서 노무현 후보를 수호해내려는 시민들의 분위기에 불을 질렀다. 개혁당은 창당되자마자 수 만명의 당원을 모집했다. 개혁당은 한때 6만명의 당원을 모았고, 이중 당권자는 2만명 정도였다. 이는 당시 이미 몇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민주노동당에 거의 필적하는 규모였다.

개혁당 행사에선 ‘문성근의 노무현 지지연설’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있었고, 노무현 후보는 당선인이 된 후 처음으로 개혁당을 방문하기도 했다.

▲ 약 9분에 걸친 문성근의 연설은 지금도 유튜프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원내 입성 및 열린우리당 창당

▲ 노회찬 전 의원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항의하는 진보정의당의 노회찬 전 의원과 심상정 의원. 노회찬 의원은 민주노동당 시절 유시민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을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라 부르는 등 갈등을 겪었으나 훗날 함께 정당을 하게 된다. ⓒ뉴스1
하지만 유시민은 곧 개혁당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민주당의 개혁을 주도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고, ‘미니정당’인 개혁당은 대통령을 돕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유시민은 개혁당이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하지 않을 거라 천명했고 “우리가 당선될 수는 없어도 민주당을 떨어뜨릴 수는 있다”는 말로 민주당을 향한 압박을 지속했다.

그러나 유시민은 2003년 4월, 고양 덕양구갑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서 민주당과 개혁당의 연합 공천 후보로 당선됐다. 유시민은 당선되자마자 ‘개혁신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개혁당을 ‘100년 가는 정당’으로 만들겠다고 했었지만 이제는 개혁당의 구성원들과 함께 이 정당의 외연을 넓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역주의를 벗어나고 당원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정당이 집권 여당이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의 기획은 개혁당의 해산과 민주당의 분당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당 측과 개혁당 측의 협상이 시작되었고, 신당 측에선 협상대표로 이해찬이 그리고 개혁당 측 협상대표로 유시민이 나왔다. 유시민은 과거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을 지내기도 했다. 이 협상의 결과 당대당 통합은 좌절되고 ‘해산 후 개별입당’으로 방침이 정리된다.

열린우리당은 2003년 11월에 창당되었다. 이 정당의 창당에 유시민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민주당 분당 및 열린우리당 창당이 정치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이라는 좌절

열린우리당에서 당내 민주주의의 실험은 순항하지 못했다. 열린우리당으로 흘러들어간 당원은 7천명 정도였는데, 이 정도 당원이 열린우리당 규모를 통제하는 것은 무리였다. 기간당원제란 이름의 진성당원제도는 현역 의원이 150명이 넘는 열린우리당 내에서 어정쩡한 위치였다.

결국 열린우리당의 기간당원제는 논란 끝에 2007년 1월 기초당원제란 이름으로 변경되며 유야무야되었다. 또 임기말 참여정부의 인기가 바닥을 기면서 많은 의원들은 열린우리당을 탈출하여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열린우리당 탈당파와 한나라당 경선 결과를 승복하지 못한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와 시민사회세력이 합류하여 2007년 8월 대통합민주신당이 탄생한다. 그리고 열린우리당 역시 곧 이 정당에 통합하여 사라지고 만다. 유시민은 열린우리당을 포기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대통령의 만류로 결국 이 정당에 합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의 정치적 상황들은 거대정당에 진성당원제를 결합하려 했던 유시민의 시도가 실패로 끝났음을 보여준다. 그는 정권이 바뀐 후의 저술에서 자신과 함께 ‘실험’을 했던 당원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노무현 서거 이후의 국민참여당

▲ 참여당의 고민이 시작되었을 때, 당시엔 '민주노동당원'도 아니었던 이석기 현 통합진보당 의원이 경기동부연합 내에서 하나의 의견을 내놓았다. ⓒ뉴스1
하지만 유시민은 나름대로 진성당원제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고, 훗날 국민참여당으로 구체화된 정당에 대한 기획을 유지했던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에게 “정치를 하지 마라”고 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오히려 참여당을 준비하던 열린우리당 출신들의 선택을 재촉했다. 2008년 이후 창당이 추진되던 참여당은 2010년 1월 창당 선언을 한다.

유시민은 참여당의 존속과 성장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그가 박근혜에 이어 지지율 2위의 대선후보가 된 상황을 당의 역량강화로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2008년 대구 수성에서 총선 출마하면서 했던 지역에서 오래 정치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2010년 지방선거를 맞아 수도권으로 다시 올라갔다. 서울시장 출마를 타진하다 민주당이 한명숙 후보 카드를 내자 경기도지사 출마를 타진했고 민주당 김진표 후보와 단일화 경선을 이끌어냈으나 김문수 후보와의 본선에선 석패했다. 이 와중에 진보신당 심상정 후보도 당의 방침과 상관없이 사퇴 선언을 했다.

결과적으로 참여당은 야권 단일후보로 몇 번 나섰지만 본선에선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지방선거에서 성과가 어느 정도 나오기는 했으나 그 구성원들을 만족시키기엔 부족했다.

통합진보당의 실험, 그 이후

이후 유시민은 진보세력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가 노무현을 옹위한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표를 ‘죽은 표’로 비난하며 민주노동당으로 가는 표를 적극적으로 차단했던 것을 생각하면 역설적인 일이었다. 참여당 사람들은 참여계의 대중성과 민주노동당의 조직력을 결합하면 민주당에 대항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민주노동당 측에선 당시엔 그 당의 당원도 아니던 이석기 의원이 ‘통합진보당 실험’의 가능성을 보았다. 유시민과 이정희 두 당대표가 만나면서 협상이 시작된다.

노동계의 유시민에 대한 반발이 가장 큰 장애였지만, 유시민은 참여정부 당시의 경제정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민주노총의 역할을 인정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러나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 핵심정치인도 이탈했지만 진보신당은 합류를 거부했다. 2011년 12월 마침내 통합진보당이 창당되었다.

▲ 지난 대선 광화문 유세에서 문재인 민주당 후보와 포옹하는 유시민 전 의원의 모습 ⓒ뉴스1
총선 과정에서 이정희의 관악을 경선 부정 의혹이 있었으나 통합진보당은 13석을 얻었고 원내 제3당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당내 경선에서 계파 간에 많은 잡음이 발생한 상태였고 총선 이후 진상조사 과정에서 이 갈등이 폭발한다. 당권파인 경기동부연합은 이 정당을 유지할 수 있는 종류의 협상을 거부했다. 결국 당은 ‘셀프 제명’이란 웃지 못할 과정을 거쳐 쪼개지고 참여계는 노회찬, 심상정, 조준호 등과 함께 진보정의당으로 흘러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유시민 전 의원은 주욱 다른 참여계와 의견을 함께 했지만 별다른 리더십을 보이지 못했다. 더 이상 정치적 야심을 가지기 보다는, 자신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만 하자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통합진보당이 창당되고 14개월이 지나기 전, 그는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나겠다고 선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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