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났다! 모든 것이 끝났다! 역사가 말해준다.

1987년 6·10 민중항쟁이 그랬고, 2002년 FIFA 한일월드컵 때 ‘붉은 악마’들이 그랬고, 월드컵 경기를 꼭 보고 싶어 했다던 효순이, 미선이 추모 촛불집회가 그랬고, 노무현 탄핵 반대 집회가 그랬다.

서울서만 1백만명 참석한 듯

1백만명이 모이면 역사가 바뀐다. 1987년 6·10 민중항쟁 21주년에 벌어진 촛불시위는 과거 어떤 시위와 집회보다 위대했다. ‘혁명’이란 단어는 이럴 때 사용하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 10일 저녁 세종로 네거리에서부터 시청 앞 태평로, 남대문 넘어까지 시민이 함께 촛불을 들었다. ⓒ서정은
서울에서만 1백만명 가량이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1천명과 2천명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단위가 1백만명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6·10촛불혁명' 참석자 계산법

‘미디어스의 늙은 기자’는 어제 행진이 시작되기 전 '6.10 촛불혁명' 현장을 서대문 방향에서 광화문, 시청 및 삼성본관과 프레스센터 뒷길까지 두어번 돌아봤다. 태평로에 있는 모든 건물의 앞마당과 주차장 등이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꽉 차 있었다.

행진은 정확하게 밤 9시 20분에 시작되었다. 방향은 3곳이었다. 우선 새문안교회를 지나 서대문과 여의도 방향 도로를 가득 메워 행진하기 시작했다.

두번째 방향은 반대방향인 종로 쪽이었다. 세번째는 청계천이었다. 청계천 방향 행진은 다른 두 방향처럼 사람이 많지 않았다. 도로가 좁기 때문인 듯 했다.

기자는 끝간 데 없이 이어지는 행렬을 조선시대 임금이나 정승 등 고관대작들이 행차할 때 사람들이 마차를 피했다는 피맛(避馬)골 앞 도로에서 1시간 반 이상 지켜봤다. 8차선 도로(폭 약 26미터)를 가득 메운 촛불행렬이 2시간 이상 이어졌다.

그러고도 광화문, 종로, 시청광장과 태평로 일대는 난장을 벌이는 무수한 사람들로 넘쳐났다. 행진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이 30% 이상은 돼 보였다. 행사 도중에, 혹은 행진이 시작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많았다.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올라왔는지 기자에게 종각역이 어디 있는지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참석자 숫자를 얼추 계산해 보았다.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 동안 방해를 받지 않고 평지를 걸으면 4km는 걷는다. 행렬이 이어진 거리만 16km 정도는 돼 보였다. [4 (km) X 2(시간) X 2 (서대문과 종로방향) = 16킬로미터]

기자 옆에 있던 지인이 건설회사를 경영하는데 8차선도로의 폭이 대략 26미터 정도 된다고 귀띔해 준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행진하는 동안 들어찬 면적은 416,000m² 정도가 된다. (26m X 16,000m = 416,000m²)

1제곱미터 당 1명씩 잡으면 41만6천명, 2명씩으로 잡으면 83만명이 된다. 여기다 청계천 방향으로 행진한 사람들과 행진에 참여하지 않고 온갖 형태의 난장에 참여한 사람을 더하면 1백만명을 넘었으면 넘었지 못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공식집회에 참석만 하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제외한 계산이다.

왜, 참석한 숫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1천명과 2천명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숫자가 1백만명이 되면 차원이 달라진다. 1백만명이 모인 현장에 나와 본 사람들은 안다.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1백만명! 그 자체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이명박 대통령 말이 맞다. ‘주사파와 북쪽에 연계된 사람들’이 배후에서 조종하지 않고 1백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