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빅토르 안'이 국제빙상연맹(ISU) 쇼트트랙 월드컵 남자 5000m 계주 결승전에서 러시아의 금메달을 견인했다. 방송화면 캡쳐 사진.

안현수가 돌아왔다. '역사상 최고의 쇼트트랙 선수'라는 평을 들었던 그가, 한국팬들에게는 낯선 이름일 수밖에 없는 ‘빅토르 안’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지난 3일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국제빙상연맹(ISU) 쇼트트랙 월드컵 남자 5000m 계주 결승전에서 마지막 주자로 나선 그는 전성기의 그 코너링을 보여주며 그의 새로운 조국 ‘러시아’에 금메달을 안겼다.

‘안현수의 귀화’는 이미 스포츠팬들에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국제대회에서 높은 성과를 거두면 거둘수록 이 ‘사건적 사건’은 일반인들에게도 더욱 널리 알려질 것이다. 안현수의 ‘선전’은 규정을 바꿔가며 그를 국가대표에서 제외한 대한빙상연맹의 ‘선택’이 오류라는 심정적 근거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 ‘선전’의 극점에 내년에 열리는 ‘소치 동계올림픽’이 있다는 사실 역시 명백하다. 국가주의적 열망에 기반한 한국의 엘리트스포츠의 정점에 존재하는 것이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지상목표다. 세계선수권에서 메달을 쓸어담거나 세계신기록을 수립한 선수라도 ‘올림픽 금메달’을 따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의 스포츠 문화다. 물론 러시아에서 안현수에게 구애를 한 이유 역시 자국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두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안현수가 한국 선수들을 ‘제치고’ 올림픽 금메달을 하나라도 따는 순간이 누리꾼들의 입장에서는 ‘대한빙상연맹 멸망의 날’이 될 거라는 거다. 그날이 오면 누리꾼들은 대한빙상연맹 홈페이지를 ‘털’ 것이고 적당한 구실로 숫자를 맞춰 ‘세븐갤’도 털 것이다.

하지만 더 심각한 시나리오도 존재한다. 대한빙상연맹이 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기 위해 한국 선수들을 동원해 ‘안현수 금메달 저지’를 눈에 띄게 실천할 경우다. 한국 선수가 안현수와 엉켜 함께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한국 여론만이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망신거리가 된다. 그런 날이 온다면 누리꾼들은 대한빙상연맹 홈페이지와 ‘세븐갤’만 터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으로 튀어나와 시위를 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렇듯 이 현상은 ‘뭘 잘 모르고 안현수를 매국노라 욕하는 누리꾼’과 ‘스포츠에 약간 관심이 있어서 대한빙상연맹에게 배척당한 안현수를 옹호하는 누리꾼’의 대립구도 위에 서 있다. 물론 스포츠라는 판타지를 소비하는 낭만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안현수라는 개인은 옹호되어야 한다. 그는 파벌싸움과 승부조작에 물든 ‘대한민국 쇼트트랙계의 질서’의 희생자임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차원의 문제도 존재한다. 도대체 왜 ‘대한민국 쇼트트랙계의 질서’는 이따위로 생겨먹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말이다. 우리는 ‘88둥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20대 초반의 어린 선수들이 활약했던 ‘벤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여전히 미국 대표 선수로 안톤 오노가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난 2002년 부시 정부의 선전장이 된 저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김동성의 금메달을 ‘박탈’했던 그 오노다.

▲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안톤 오노는 '헐리우드 액션'으로 김동성의 금메달을 뺏었지만 김동성과 안현수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2010년 벤쿠버 동계올림픽에도 출전했다.

말하자면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금메달을 박탈당하며 그해 ‘월드컵 4강 신화’를 쓴 태극전사들과 함께 노무현 당선에 기여했던 그 김동성은 은퇴를 했지만, 오노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이다. 안현수는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의 영웅이었다.

김동성과 안현수가 오노보다 기량이 일찍 떨어져서 은퇴하거나 대표팀에서 쫓겨났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김동성의 전성기적 기량은 오노를 압도했고 안현수는 김동성 이상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문제의 핵심은 한국의 비인기 스포츠가 유지되는 방식이다. 말하자면 관중도 리그도 없는 스포츠라도 ‘올림픽 메달’ 수를 위해 선수를 ‘상비군’처럼 훈련시키는 방식이다.

한국인들은 ‘인구대비 메달수’에서 한국이 외국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것을 이 인종이 타고 나기를 스포츠를 잘한다고 야무지게 ‘착각’하지만 사태의 핵심은 이 사회가 ‘단지 메달을 위해’ 투여하는 노력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소 리그를 통해 돈을 벌 수도 없는 이런 비인기종목 선수들이 ‘프로’로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반대급부로 ‘메달을 위한 노력’이 절실해진다.

여기서 대한빙상연맹이나 코치들의 심정을 추론해보자. 그들이 차마 우리에게 얘기하지 못하는 속내는 이런 것일 수 있다. ‘우리가 열심히 훈련시켰기 때문에 누구라도 국가대표 선수로 나가면 금메달까진 아니더라도 은메달이나 동메달은 딸 수 있다. 그 메달이라도 따야 이 선수들은 이 가혹한 노력에 대한 보상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안현수처럼 잘난 녀석이 십 년을 대표팀에서 버티면 메달을 따는 선수의 숫자가 서너명은 줄어든다. 그 서너명의 미래는 어찌할 것인가?’

물론 ‘계파싸움’의 문제까지 감안하면 이들의 의도가 이토록 순수(?)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쇼트트랙처럼 비인기종목임에도 단기간 집중투자로 ‘메달 밭’이 된 스포츠 종목의 국가대표 선발전에 승부조작 논란이 횡행하는 이유는 정확히 이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 한국 쇼트트랙팀이 러시아 소치에서 월드컵 5차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그렇다면 바람직한 해법은 무엇일까? 일단은 ‘엘리트스포츠가 아닌 생활체육’이라는 모범답안처럼 보이는 구호가 존재한다. 하지만 ‘엘리트스포츠’와 ‘생활체육’은 경향성의 문제일 뿐 대립하는 개념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서 그 경기를 실제로 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진다. 4년에 한번 양궁이나 사격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열광은 ‘금’에 대한 집착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스포츠 자체에 대한 열망이다.

또 한국 사회의 메달 집착과 메달 숫자를 국격과 동일시하는 증상이 좀 심하다고는 해도, 월드컵이나 올림픽의 승자들에게 열광하는 것은 지구별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다. 한국 사회에 생활체육이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엘리트스포츠 위주의 스포츠정책 때문이 아니라 과도한 근로시간 등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조건의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오히려 “만일 계속해서 금메달 숫자에 집중한다면, 엘리트스포츠에 더 투자를 해야 한다. 그것도 시설이 아니라 사람에게”라는 말이 답일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 운동선수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 청소년은 14만 명 가량 된다. 이 가운데 운동을 통해 대학에 가는 비율은 10% 정도다. 또 대학에서 사회로 진출하는 비율이 또 10% 가량이다. 운동을 하고 있는 청소년들 가운데 직업 운동선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고작 1%인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학원스포츠’는 일종의 ‘올인’을 요구하기 때문에 학생 선수들은 운동에 입문하면서 ‘학업 탈락’을 경험하게 되고 그렇기에 다른 경험이 없어 운동을 중단할 때는 ‘삶의 탈락’의 위험에 노출된다고 분석된다.

설령 1% 안에 포섭된다 하더라도 길어야 20년인 운동선수의 수명을 생각해봤을 때 미래는 불안정하며, 운동을 끝낸 뒤 할 수 있는 일이라 해봐야 운동 지도자, 영업, 개인 사업 정도다. 세상을 잘 몰라서 사업을 하다 사기를 당하는 일도 잦고 낙오된 이들은 조직 폭력배가 되는 일까지 생긴다.

특히 자생적인 프로리그가 없는 비인기스포츠에 대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계속해서 메달을 요구할 거라면 더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가 그 정도 투자를 감당하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그런 종목의 엘리트스포츠는 해체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대한빙상연맹의 처신과 쇼트트랙계의 내부비리에 대한 비판 역시 이러한 인식과 함께 해야 문제해결의 단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맹목적인 애국주의로 그를 비난하는 이들에 맞서 안현수 선수의 선전을 기원하는 일 역시 중요한 일이다. 스포츠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그가 소치의 시상대에 올라서는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이 뿌듯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 2005년 안현수의 금메달 획득을 알리는 방송 화면. 그가 안톤 오노를 꺾고 금메달을 딸 당시 안톤 오노와 악연이 있는 김동성이 해설을 해서 화제가 되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