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자 조선일보 4면 기사

조선일보가 퇴임을 앞둔 이명박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를 내보냈다. 어쨌든 지난 5년 동안 국가 중대사에 대한 보고를 꾸준히 받은 사람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엔 그렇지 않았더라도 지금 상황에선 장삼이사보다 훨씬 고민이 심도 깊고 구체적일 수밖에 없다. 지난 대선 당시 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부끄럽지만 참여정부가 끝날 즈음에야 국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처럼 역대 대통령들도 ‘국정을 좀 알게 될 무렵’이 되어서야 권좌에서 내려오곤 했다.

물론 여전히 4대강 사업이 합리성이 있다고 믿는 등 핵심적인 오류에 대한 ‘고집’은 여전하다. “진짜 측근은 사면하지 않았다”라는 발언을 들으면 그가 퇴임을 앞두고 누리꾼들과 본격 ‘개드립’ 경쟁을 하려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나머지 영역에서 대통령의 인터뷰는 의외(?)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의 발언은 진보진영의 보수정권 비판의 비일관성과 비합리성을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그러하다.

"확전하지 말라고 얘기 안 했다. '공군 뒀다 뭐하냐'고 했다. 당시 (국가위기관리센터 긴급회의에) 배석했던 한 인사가 청와대 대변인한테 개인적인 의견을 전한 거다. 그 후 나도 책임 추궁을 했다. 군 출신들은 확전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공군 지원에 대해 말하니 당시) 군 고위관계자가 교전 규칙을 얘기하면서 '확전하면 안 된다. 미군과 협의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 길로 합참과 국방부를 찾아가서 '교전 규칙은 지켜야겠지만 이건 우리 영토를 침범당한 사건이다. 국토를 지키는 건 교전 규칙과 관계없다'고 명령했다. 나중에 보니 교전 규칙에도 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못하게 했으니 그랬던 거다. 공군한테 때리라고 하니까 우리 군이 놀라더라. 그때 이후 (북 도발 시) 현장에서 적극 대응하고, 보고는 나중에 하라고 했다. 우리 영토를 공격받으면 발원지와 지원 세력까지 육·해·공으로 공격하라고 했다. (천안함·연평도 사건 이후) 군이 많이 변화했다고 본다."

연평도 사건 당시 진보언론과 민주당 지지자들도 정부의 대처를 집중성토했다. "확전하지 말라"는 발언은 보수언론 뿐만 아니라 한겨레나 경향신문도 크게 보도하면서 대중의 비판을 유도했다. 물론 진보언론은 그 발언 자체는 옳다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는 '말바꾸기'를 주로 문제삼았다. 대중은 이명박 정부의 ‘안보무능’에 대해 ‘이명박=군면제=겁쟁이=안보무능’의 도식으로 이해하기를 즐긴다. 그리고 이 도식은 사실 진보언론이 받아 안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진보언론은 이러한 보수적 편견을 극복하기보다 이 도식 사이에 슬쩍 ‘햇볕정책 반대’를 끼워넣는 길을 택한다. "군면제자가 무슨 안보냐"라는 편견에 저항하는 걸 거부하고 그 편견 속에 슬쩍 "햇볕정책 반대해서 안보위기 왔다"는 주장을 끼얹으려고 하는 것이다.

▲ 2010년 11월 25일 한겨레 사설. "확전말라" 발언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그후의 '말바꾸기'와 강경대응책을 총체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교전수칙 등에 대한 얘기는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볼 때 결과적으로 '촘촘하지 못한' 이야기가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최악’이었을 수도 있고 그 임기 동안 발생한 많은 일에 대해 ‘책임’이 있겠으나 그 평가나 책임을 묻는 방식이 어떠한지는 또 다른 문제다. 햇볕정책의 지지자가 이명박 정부의 연평도 사건 대처가 ‘강경’하지 못했다고 비웃는 것은 어딘가 이상한 일이다. 만일 그가 그 상황에서의 강경책을 지지한다면 민주정부의 햇볕정책부터 비판해야 할 것이고, 강경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이명박 대통령의 대처를 비웃을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사람들은 그것이 이상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비난을 활용하려는 ‘유혹’이 나타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당장 입에 달다고 대중의 보수적 편견에 기댄 관성적 비난을 반복한다면 나중에 대통령이 “사실 연평도 사건 대처의 문제는 ‘민주정부 10년’ 동안 만들어진 관성의 문제였다”고 사실을 밝혔을 때 되돌아오는 부메랑을 피해갈 수 없다. 이는 새누리당이 ‘민주정부 10년’ 동안 민주화 세력의 무기인 ‘도덕성’을 철저하게 파헤치기 위해 도입한 청문회가 지금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에 대응된다.

그래도 고위공직자에 대한 검증기준이 높아지는 것은 공익에 부합하는 일이나 대통령이 군면제자에 벙커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비웃는 감성은 공익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언젠가는 징병제가 사라질지도 모르고 징병제가 계속 존속한다해도 여성이 대통령이 될 수도 있으며 근대국가의 수반은 최전선에 서지 않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 이런 자명한 사실들을 비웃음의 근거로 삼는 건 “쟤는 그냥 싫어”를 좀 길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편견에 의해 관성적으로 정권수반에게 돌리는 방식이야말로 ‘집권의 가능성을 생각하기 힘든’ 만년 야당의 투쟁방식이다. 야권지지자들은 여권지지자들이 독재정권 때의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새누리당을 지지한다고 비웃지만 사실은 그들 역시 ‘독재정권 때의 야당지지자의 심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진보담론이 스스로의 세계관을 정립하지 못하고 자꾸 보수담론의 기준에서 ‘유능함’과 ‘무능함’, ‘도덕성’과 ‘사리탐욕’을 구별하려 든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새누리당을 ‘무능하고 부패한 이’로 매도하고 싶어 하지만 그로 인해 돌아오는 대답은 “너희들도 무능하고 부패했다”라는 것일 뿐이다.

‘도덕성’이나 ‘청렴함’은 야인이 권력자와 자신을 구별하는 잣대일 뿐 권력을 경쟁하는 이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에게 붙일 수 있는 딱지는 아니다. 말하자면 여전히 ‘민주화 운동가’의 심성으로 권력을 달라고 하는 것인데, 그게 대중에게 얼마나 오만하게 비칠지도 고려를 해야 한다. 사람들이 민주당에게만 훨씬 높은 도덕성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일이지만 일정 부분 민주당이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정당인 민주당보다 ‘유능하고 청렴한 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안철수 개인’에게 사람들이 더 매력을 느끼는 것도 민주당이 그간 구사해온 ‘도덕성에 대한 비교우위 과시 전략’의 부산효과에 기인한다.

▲ 대선 투표를 마치고 미국으로 출국하는 안철수 후보의 모습. 그가 가졌던 파괴력은 역설적으로 민주당이 새누리당을 이기기 위해 택했던 전략들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독재자의 딸을 이길 수 있는 유능하고 청렴한 개인"으로 안철수를 선택했다. ⓒ뉴스1

지난 십오년을 돌이켜 볼 때 민주당은 ‘우클릭’을 할 때는 새누리당을 카피했고 ‘좌클릭’을 할 때는 민주노동당을 카피했다. 카피하는 것도 좋지만 카피한 걸 소화할 만한 담론체력도 없으니 제주해군기지나 한미FTA 등의 사안에 대해 ‘말을 바꾼다’는 새누리당의 공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상황이 반복된다.

물론 도덕성이나 무능함에 대한 ‘뻔한 비판’을 반복하는 이유는 보수언론이 보수의 기준에 입각한 최소한의 비판도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는 있다. 이동흡과 같은 뻔뻔한 수준의 위인에 대해서도 보수언론이 ‘여론의 간’을 보는 상황에서 진보언론은 포괄적 기준에서 비판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포괄적 비판을 한다 해도 자신의 포지션은 있어야 한다. 가령 보수언론이 이동흡의 부동산과 통장에만 관심을 기울일 때 진보언론은 그의 헌재판관으로서의 자질을 추가로 문제삼는 정도의 ‘차이’는 보여줘야 한다. 진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유권자 입장에서는 ‘진짜’가 아닌 ‘짝퉁’을 선택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진보언론이 대북강경책이나 엄벌주의에 맞서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대중의 편견에 부화뇌동하는 한 한국 사회의 ‘진보’는 기대하기 어렵다. 보수진영의 혁신은, 다른 보수언론과는 구별되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동아일보가 지금의 한겨레 경향신문 정도의 포지션으로 오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진영의 혁신은 진보언론이 동아일보나 해야 할 소리를 벗어나는 것일 것이다. 진보언론이 ‘90년대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내의 좌파 송희영 논설주간’의 수준 정도는 넘어서야 미래를 고민할 수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