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고브릭 실눈뜨기]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이하 <콘크리트>)는 KBS 모던코리아 팀에서 제작한 ‘한국 아파트의 역사’가 요약된 짧은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시작한다. 영상이 끝나면 방에서 잠이 깬 민성(박서준)이 창가로 걸어가 폐허가 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그에 대비되어 홀로 서 있는 황궁아파트의 전경이 부감으로 펼쳐진다. 이 오프닝은 <콘크리트>가 일반적인 재난물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것을 암시한다.

평범한 재난물을 생각해 보자. 오프닝에서는 앞으로 닥칠 재난을 모르는 주인공의 일상이 그려진다. 이후 재난을 경고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나오지만 의견이 묵살된다. 본격적으로 재난이 발생하면 엄청난 파괴가 시작되고 그 후폭풍으로 다채로운 군상극이 펼쳐지며 혼란에 빠진다. 이때 갑자기 등장한 (주로 오프닝에서 평범한 삶을 살던) 주인공의 영웅적인 행동 덕분에 위기를 극복한다.

<콘크리트>의 오프닝에서 일상도, 재난도 없이 아파트만 부각되는 건 영화에서 일상과 재난이 없다는 게 아니라 한국인에게는 아파트가 일상이자 재난이라는 의미다. 전용면적 34평(84㎡) 아파트는 아예 국민평수라고 불린다. 주인공의 삶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아파트의 등장만으로 한국인이 그리는 평범한 삶이 관객의 머릿속에 그려진다. 아파트 거주를 준비하는 순간부터 생존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니 지표면이 뒤집어지는 대지진은 짧은 스케치만으로 충분하다. (* 이하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 이미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 이미지

아파트의 입주자격과 공동체의 스펙트럼 

부녀회장 금애(김선영)는 ‘이제 목사나 살인자나 같은 세상이다’고 말은 하지만 황궁아파트에 머무르는 조건은 권리증서다. 대지진이 일어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지나가는 구조헬기 한 대 보이지 않고, 화폐경제가 마비되어 물물교환으로 돌아간 시점에 열린 입주자회의에서는 이제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는 부동산등기를 생존의 필수조건으로 결정한다. 아파트를 20년간 돌봐온 경비인력이 쫓겨나고 생존에 도움이 될 만한 외부의 전기/화학/생물 기술자보다 입주 자격을 갖춘 일반 행정 공무원의 의견이 중시된다.

생존의 기준점이 엉뚱한 곳에 그어지니 영화도 의도적으로 생존에 집중하지 않는다. 아파트 영탁의 대표선임 후 진행되는 재건 과정은 흡사 아파트 CF처럼 행복이 과장되고 유머러스하게 표현된다. 영하 20도의 혹한이 몰아치지만, 부녀회장 집에서는 티타임이 열리고 새해맞이 잔치가 열릴 정도다. 식량 부족, 연료 부족, 수도 동파 등의 위협은 비교적 사소하거나 최소한으로 표현된다.

생존의 처절함에서 시선을 거두니 자연히 색출의 긴장감에 연출에 힘이 실린다. <콘크리트>에서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면은 크게 두 번 등장한다. ‘바퀴벌레’로 칭하는 외부인을 색출하기 위한 영탁의 탐색과 혜원(박지후)에게 가짜 영탁(=모세범)이라는 진실을 전해 듣고 진짜 영탁을 찾기 위한 명화(박보영)의 수사 과정이다. 특히 명화의 수사 과정은 민성이 대형마트에서 몇 달 치의 식량을 찾아내는 장면과 교차편집된다. <콘크리트>에서 입주 자격은 먹고사는 문제와 정확히 동격이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 이미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 이미지

‘아파트는 주민의 것’은 곧 ‘주민이 아니면 아파트에 거주할 수 없다’는 말로 치환할 수 있다. 외부인을 숨겨줘도 아파트에서 쫓겨나는 게 아니라 “잘못했습니다” 200번 외치는 것으로 죄가 탕감된다. 반면 모세범(이병헌)이 궁지에 몰리는 건 혜원을 절벽으로 집어 던져서가 아니라 가짜 신분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잔금을 치렀어도, 손에 피를 묻혀가며 주민들을 위해 노력했어도 등기가 되어있지 않다면 입주 자격은 박탈된다.

영화를 가로지르는 ‘입주 자격’이라는 키워드는 주요 등장인물인 영탁-민성-명화-도균에 대한 분석에도 적용할 수 있다. <콘크리트>에는 파렴치해서 공분을 사는 악인도, 눈부시게 빛나는 선인도 없다. 각자의 방식으로 적당히 시시하고 이기적인 ‘평범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등장인물의 행동에 도덕을 대입한 선악의 리트머스는 다소 표면적이고 단편적인 접근이다. 공동체의 경계를 구분하는 스펙트럼으로 보아야 조금 더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영탁은 본인의 진짜 가족을 잃고 집만 남았다. 대표가 된 뒤에는 주민들을 가족처럼 여기고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 치매를 앓는 진짜 영탁의 모친도 돌본다. 민성은 집도 있고 가족도 있다. 명화는 집과 주몽의 가족까지 챙기고, 도균은 다른 가족까지 받아들인다. 영화는 질문을 던진다. 생존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어디까지 공동체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각자의 대답을 준비해야 한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 이미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 이미지

같이 어울리는 정과 바둑의 생존조건 

최근 신축된 한 아파트의 물놀이장을 두고 발생한 주민 갈등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주민만 사용하도록 등본을 떼와야 해서 등본상 거주자가 아니면 아이의 조부모도 이용이 불가능하다. 자녀가 없는 집에서는 관리비가 물놀이 비용으로 소모된다고 불만을 제기해 이용료를 천 원씩 걷는다. ‘같이 어울리는 정이란 가진 게 없는 사람만 바라는 거 아니냐’는 어떤 의견에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신축 아파트의 물놀이장 갈등은 바둑알을 이용해 외부자 퇴출에 찬반투표를 했던 황궁아파트 주민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황궁아파트 주민투표에서 외부인들을 내쫓자는 백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없는 사람만 어울리는 정을 바란다고 하기에는 평소 황궁아파트를 무시하던 고급멘션 드림팰리스 주민들이 더부살이했음에도 다 함께 살자며 흑돌을 던진 사람도 분명히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외부인들은 바리케이드를 허물고 황궁아파트를 점령한다. 폭탄을 맞은 영탁은 본인의 집에서 숨지고, 칼에 찔린 민성은 명화와 아파트에서 탈출하지만 역시 숨을 거둔다. 홀로 남은 명화는 다른 생존자들에게 발견되어 그들이 머무는 장소로 향한다. 고급 아파트가 가로로 누워버린 곳에서 생존자들은 마당에 큰 솥을 걸고 갓 지은 쌀밥을 나누어 먹는다.

황궁아파트의 주민들은 본인의 집 한 채, 자신들의 아파트 한 동을 위해 바리케이드를 높게 치고 밤낮없이 경비를 섰지만 끝내 생존에는 실패했다. 바둑은 집을 많이 지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그러나 이는 승리를 위한 것이고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는 더도 덜도 없이 2개의 집이면 충분하다. 모두가 무너진 서울에서 황궁아파트만은 수직으로 우뚝 섰지만, 바둑돌을 위로 쌓아 올려서는 단 하나의 집도 지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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