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선민 칼럼] 나, 너, 우리. 과거 의무교육을 받으며 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단어 중 하나는 ‘우리’였다. ‘우리’를 배우면서 자란 세대지만, 언제부터인가 글을 쓰거나 읽으면서 ‘우리’라는 단어의 사용이 줄어들었음을 느꼈고, 집이라는 공간 밖에서 우리로 표상되는 공동체의 감각을 느낄 일은 많지 않다.

1인 가구수가 가족의 원형이었던 4인 가구수를 넘어선 상황에서 우리는 물리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집에서도 성립조차 못하게 됐다. 철저한 계약관계에 기반을 둔 회사에서 우리를 찾는 것은 애초 무리이지만 비정규직 증가 등 고용형태가 악화하면서 일말의 소속감을 느낄 여지마저 사라지고 있다. 어린이라고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집 밖을 벗어나면 배제와 차별을 공식화하는 공간과 암묵적인 시선을 언제 어디서 마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만 겪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과거에 비해 노래 가사에서 우리 같은 대명사보다 ‘나’가 더 많이 등장했다는 조사(걸그룹의 ‘나타령’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일이다)가 나왔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공동체를 강조해온 중국에서도 나와 관련된 단어의 사용이 현저히 증가하고, 우리와 관련된 단어(우리를, 우리의) 사용은 줄어들었다는 연구가 있다.

실체와 언어 모두에서 ‘우리’를 경험하기 힘든 시대에 도서관, 마을미디어, 공원, 놀이터, 각종 커뮤니티 센터 같은 공공 공간과 서비스는 느슨한 우리, 공동체의 소속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들 공공 서비스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고, 수많은 ‘나’들을 느슨하게 우리로 연결해주고, 때론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최소한의 장치이다.

화성 만세작은도서관 [경기도 제공]
화성 만세작은도서관 [경기도 제공]

동네 도서관은 시민들의 문화공간이자 모두에게 평등한 지식과 배움을 지향하는 최고의 미디어 리터러시 기관일 뿐만 아니라 육아·돌봄 등 사람간의 만남과 교류를 돕는 쉼터 같은 역할을 해왔다. 마을 미디어는 주민 자치 공간, 더 나은 의견이 개진되는 공론의 장 역할 이외에도 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지역, 사회 등 수많은 관계망 속에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하게 깨닫게 해준다.

그런 면에서 작년 말부터 서울시와 마포구, 동대문구 등 일부 지자체에서 도서관을 폐관하고, 마을미디어 사업을 중단하는 움직임은 너무나 우려스럽다. 지자체 단위의 작은도서관(작은도서관은 주민의 참여와 자치를 기반으로 지역사회의 생활친화적 도서관 문화의 향상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은 2012년 ‘작은도서관 진흥법’이 시행되면서 지난 20여 년 동안 전국 7394곳(민간운영 포함)까지 늘었던 상태이다.

서울시는 작은도서관 지원 예산을 전액 삭감하며 지원 사업을 전면 폐기하려 했다가 비판이 일자 다른 방안으로 지원을 재개하겠다고 밝혔고, 마포구는 도서관 예산의 30% 삭감을 시도했으며, 동대문구는 10곳을 운영해오던 청소년 독서실의 절반을 폐관했다. 서울시의회는 2019년 제정된 ‘서울시 마을공동체 활성화 지원조례’를 폐지하기 위해 조례안을 발의·통과시켰고, 예산이 전액 삭감돼 서울시의 마을미디어지원 사업은 2023년 4월부로 중단된 상태다(한겨레신문, 미디어오늘 참고).

‘우리’를 가능하게 했던 공간의 상실은 지난 3월 20일​ ‘세계 행복의 날’ 발표된 ‘세계 행복 보고서’가 제안한 개인과 사회가 행복해지기 위한 해법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세계 행복 보고서는 140여 개국을 대상으로 어떤 개인이 행복한지, 어떤 국가나 사회가 국민을 더 행복하게 하는지에 대해 10년간 조사했는데 그 결과는 한결같았다. 소득과 건강이 좋고, 삶의 중요한 결정을 자율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것. 여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었다. 타인을 믿을 수 있고, 관대하며, 돕고 사는지가 개인의 행복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이런 개인들이 많을수록 행복한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며 국가와 사회가 국민들이 이러한 친사회적 특성을 갖출 수 있도록 제도나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미지 출처=Pixabay.com
이미지 출처=Pixabay.com

‘외로움과 고립’에 대해 연구해온 노리나 허츠 교수는 ‘행복 보고서’가 말한 제도와 조건에 대한 하나의 사례를 제시한다. 허츠는 외로움과 고립감을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닌 무한경쟁을 부추기고 공공영역의 축소를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극우 포퓰리즘의 득세 등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했다. 허츠는 외로움과 고립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으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교류하고 유대를 맺을 수 있는 물리적 공유 공간인 ‘공동체 기반 시설’의 확충을 강조한다(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동안 가장 많은 고통을 받은 사람은 이런 공동체를 이용할 수 없었던 사회적 약자들이다). 공동체 기반 시설은 단순히 함께하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할 방법을 배우는 장소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우리를 하나로 모으는 공간이 없다면 우리는 갈수록 더 흩어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게 시민성과 포용적 민주주의를 연습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말로 한다고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트럼프와 같은 정치인들은 고립의 틈새를 파고들어 ‘우리’에 호소하는 전략으로 혐오표현과 극우 선동을 설파하며 외로운 사람들을 규합한다). 동네에서 마주한 ‘우리 곁에 언제나 다이소’라는 홍보 문구처럼 우리라고 불릴 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일 때여서만은 안 된다. 우리는 다이소 소비자로서만 살아갈 수 없으니까.

*  이선민 시청자미디어재단 선임연구원 칼럼은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언론인권통신' 제 1003호에 게재됐으며 동의를 구해 미디어스에 싣습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