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월드컵 16강 진출을 했다지만 최근의 한국 사회는 모든 게 혼란의 도가니에 빠진 듯한 분위기다. 국정을 책임지는 윤석열 대통령의 대응이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건 유감스럽다. 대통령실과 정치권에서 나오는 말들을 보면서 절망을 느끼는 하루 하루다.

이 말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분별해보기 위해 임의의 세 가지 범주를 설정해보자. 세상사에는 해서는 안 되는 것, 해도 되는 것, 하는 게 좋은 것이 있다. 하면 안 되는 것과 해도 되는 것 사이를 가르는 것은 법이다. 해도 되는 것과 하는 게 좋은 것 사이에는 윤리 판단이 있다. 사회적 논의는 이 두 기준을 달리해 진행하는 게 좋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정치는 이 두 기준을 의도적으로 뒤섞는다. 

화물연대 파업 대응 관계장관회의 주재하는 윤석열 대통령(연합뉴스 자료 사진)
화물연대 파업 대응 관계장관회의 주재하는 윤석열 대통령(연합뉴스 자료 사진)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윤석열 정권의 대응을 보라. 윤석열 대통령이 했다는 말을 보면 온통 불법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선언뿐이다. 화물연대의 파업은 불법, 그러니까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현행법상 노동자의 파업은 근로조건 결정과 관련된 것이고 절차적 문제가 없으며 수단이 합법이라면 정당성을 가진 걸로 판단한다. 화물연대는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에 속한 조직이고 안전운임제와 관련한 요구사항을 내걸고 있다. 이 점을 보면 불법이라고 할 여지는 없다.

화물노동자는 특수고용노동자이고 법적으로는 자영업자와 비슷한 위치이므로 화물연대의 파업은 엄밀히 말해 파업이 아니고 ‘운송거부’라는 게 정부의 입장일 거다. 그렇다면 불법 여부는 더더욱 논할 문제가 아니게 된다. 자영업자가 이문이 없어 장사를 안 하겠다는 게 어떻게 불법인가? 화물노동자가 노동자든 아니든, 화물연대가 노조든 아니든 이번 파업을 불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이 이 난제를 돌파하기 위해 꺼내든 건 두 가지다. 첫째는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한 후 업무에 복귀를 거부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일부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비조합원을 공격한 사례를 ‘조직적 폭력’으로 규정하고 ‘불법’을 선언하는 거다. 첫째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것이지만 둘째는 일어난 상황을 해석하기 위한 추가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개별 조합원이 너무 화가 나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지도부가 협상력 확보를 위해 구체적인 작전을 짠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수사기관이 아니라 공정거래위가 화물연대 사무실에 진입하려 한 것은 ‘노동자성’이나 ‘파업의 정당성’의 쟁점으로 가지 않으면서도 ‘불법’의 근거를 갖추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종합하면 윤석열 정권은 ‘해도 되는 것’일 수 있는 화물연대 파업을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굳이 규정하고 강경 대응을 하고 있는 셈이다. 꼭 이래야 하는 이유는 뭘까? 선택의 첫째 근거는 정권의 이념적 정체성이다. 화물노동자들이 특수고용노동자가 된 것은 자본이 비용을 줄이려는 의도로 정치권력과 손을 잡고 움직여 온 역사적 맥락과 관련돼 있다. 노동자성 인정과 안전운임제 전면적 도입 요구는 자본의 의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때문에 자본에 기울어진 정체성을 갖고 있는 윤석열 정권은 이를 용인할 수 없고, 따라서 화물연대 파업은 ‘불법’이어야만 한다.

둘째 근거는 현재 윤석열 정권이 놓인 정치적 위기의 해소라는 특수한 요인이다. 여론조사상 윤석열 정권의 지지율은 대선 당시 얻었던 득표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에 형성돼 있다.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에게 투표한 유권자의 상당수는 이념적으로 보수적 지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들의 정치적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해왔던 것은 김건희 여사와 관련된 의혹, 전임 정권 탓, 비속어 논란과 MBC에 대한 대응 등의 사건이 ‘지도자답지 않다’고 하는 평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노총 산하 노동조합의 파업은 진보와 보수 유권자층의 판단이 정확히 갈리는 이슈이다. 파업이 합법이고 정당하더라도, 즉 ‘해도 되는 것’이더라도 그게 ‘바람직한 것’인지 여부에 대한 가치판단은 각자 다른 것이다. 가령 보수적 유권자들은 전세계적 인플레이션 국면 조성으로 경제 전반이 어려운 상황에서 파업은 자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길 것이다. 반면 진보적 성향의 유권자라면 고통이 약자들에게 전가되기 쉬운 이런 때야말로 오히려 화물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정권은 보수적 유권자층의 요구에 응하면서 스스로 대응을 ‘원칙주의적인 단호함’으로 포장해 ‘지도자다운’ 모습을 연출하는 걸로 유실된 보수적 유권자층의 지지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불법’이라는 개념은 그러한 정파적 시도에 동원되는 셈인데,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접근은 일부 효력을 거둘 것이다.

평론가들과 선거컨설턴트들은 이러한 시도의 기술적 측면을 평가할 것이다. 윤석열 정권으로서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꺼내들 수 있는 카드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더욱 진지하게 다뤄야 하는 것은 과연 이런 식의 통치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가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한 것이다. 

11월 25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총파업 선포 기자회견에서 조합원들이 안전운임제 계속되는 연기에 항의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11월 25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총파업 선포 기자회견에서 조합원들이 안전운임제 계속되는 연기에 항의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윤석열 정권의 ‘원칙주의적 단호함’은 화물노동자 입장에선 ‘현상유지’를 받아들이라는 강요다. 그러나 화물노동자 입장에서 ‘현상유지’란 부당한 노동조건과 그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혼자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을 뜻한다. 화물노동자는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데다 일관된 기준에 따른 임금을 약속받는 처지에 있지 않다. 목적지가 어디든 기름값이 얼마가 들든 주는 돈은 화주 마음대로다. 이 돈 받고 못하겠으면 다른 차 쓰면 된다는 식이다. 화물노동자들의 처지는 제각기 다르기에, 누구는 감당 못할 수준의 운임도 또 다른 누군가는 기꺼이 감당할 수 있기 마련이다. 운임은 시장원리에 따라 노사가 알아서 결정하면 된다는 자본의 논리는 이런 과정을 거쳐 화물노동자의 제 살 깎기 경쟁에 따른 저임금화로 귀결되어 왔다.

이 때문에 생존권을 위협받는 경우가 발생하니 운임 지급과 관련한 최소한의 일관된 기준을 정부 차원에서 마련해달라는 게 그간 화물노동자들의 요구였으나 정부는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다며 거부해왔다. ‘안전운임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 역할의 당위를 구성하려는 시도이다. 임금 수준을 결정할 협상력을 전혀 갖지 못한 화물노동자로서는 생계 유지를 위해 과로·과속·과적을 기꺼이 감수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게 사회 전반에 미치는 악영향이 상당하므로 시장원리에 맡기는 게 아니라 정부가 나설 필요가 있다는 논리다.

우리 사회는 어떤 판단을 해야 할까? 화물노동자들은 정규직도 아니고 고임금을 받지도 않으면서 국가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다른 시민의 안전에도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는 점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정부의 역할은 필요한 걸로 보인다. ‘안전운임제’가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어디까지 적용해야 할지에 대해 논쟁을 벌일 수는 있겠지만 그냥 지금 이대로 살아도 충분하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답이 아니다. 즉, 이 대목에서는 ‘해도 되는 것’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게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있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를 말하지만, 저임금 장시간 노동도 상관없으니 시켜만 달라는 사람의 자유를 보장하자는 것은 ‘부정식품을 먹을 자유’와 비슷한 얘기다. 그런 ‘자유’를 우리 사회가 납득할 수 있는가? 화물연대 파업이 불법인지를 가리는 것보다 이 논쟁을 하는 일이 더 중요한데, 정치권은 민주노총의 ‘불순한 의도’와 야당과의 연계 여부, 심지어는 체제전복 음모 같은 것을 거론하고 그걸 타박하는 것에 헛힘을 쓰고 있다.

상대편이 하는 건 뭐든지 ‘하면 안 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바람직한 것’을 논하는 것에 대해선 손을 놔버리는 게 표준적 문법이 돼버린 현대 정치에서 이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서두에 언급했듯 ‘해도 되는 것’과 ‘하는 게 좋은 것’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것은 윤리 판단에 속한다. 통치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치가 이 과제를 포기하고 있다는 건 비윤리적인 일이다. 불법이 아니라 이런 비윤리의 상태를 하루 빨리 청산할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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