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수리남>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2000년대 중반, 국정원과 속칭 K 씨가 공조해 한국인 남미 마약상 조봉행을 체포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실화는 그것을 각색해 플롯의 구조물로 삼았다는 것 이상의 의미와 효과가 있다.

<수리남>은 실화를 인용하는 이중 구조로 연출돼 있다. 하나는 드라마 바깥에 존재하는 K 씨의 실제 사건이 극화로 각색된 연출 구조이고, 하나는 드라마 안 편에서 K 씨 역을 맡은 강인구가 수리남에서의 경험담을 회고하며 내레이션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구조다. 즉,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이야기 내부의 ‘실화’로 소개하는 것인데 내레이션은 “믿기 힘들겠지만 이 이야기는 다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다.”라는 강조로 끝난다. 이것은 이야기 자체가 허구로 연출되는 일반적 극화에서는 불필요한 방백이다. 이 강조는 드라마 공개와 함께 널리 알려진 K 씨 실화를 암묵적으로 가리키고 시청자에게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은연중에 그 실화를 염두에 둔 채로 드라마를 보도록 두 개의 실화를 중첩시킨다.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 포스터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 포스터

<수리남>이 실화를 각색한 다른 극화들, 실화를 알릴 목적으로 제작되는 사회적 드라마 등과 다른 점은 실화를 통해 온전한 장르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실화는 윤종빈 감독의 표현을 빌리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을 만큼” 장르물의 플롯을 이미 가지고 있다. 윤종빈은 지금껏 몇 편의 흥미로운 장르물을 만들어 왔고, 공간과 현실적 기호의 연출을 통해 장르를 다루는 재질을 발휘했다. 그의 장르물에서 공간은 영화의 장르성을 구체화하거나 장르의 이식과 혼성을 가능케 하는 토대였다. 거기에 장르 바깥의 현실적인 캐릭터가 진입하며 장르가 변주되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 논평이 이뤄지거나 시대상이 마련될 수 있었다.

<범죄와의 전쟁>에선 부산 지역색을 걸친 마초 건달들 사이로 허세 덩어리에 남성적으로 열등한 최익현이 끼어들었다. 장르적으로 엉뚱한 인물을 통해 그 시대 가부장 상을 풍자하는 효과를 줄 수 있었다. <군도>에선 지리산이란 공간에서 웨스턴 장르를 재현하며 무협 장르와 혼성했고 의적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민란’이란 시대상을 표방했다. 다만, 이 경우는 지배 계급 대 민중 세력의 대립 구도가 요식적이라 장르 이식을 성립시키기 위한 환경으로서의 시대상에 머물렀다.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 〈군도: 민란의 시대〉 포스터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 〈군도: 민란의 시대〉 포스터

<수리남>은 <범죄와의 전쟁>에 비해 현실에 대한 비평 의식은 후퇴하고 온전한 장르물이 되었다. 한국적 누아르 물과 첩보 영화, 수사물, 언더커버 등 실로 다양한 구성이 뒤섞이는 트로피컬한 혼성 장르물이지만, <군도>처럼 장르 이미지가 과잉되는 이물감은 없다. 연출 기술이 준수한 덕도 있겠지만, 수리남이란 공간이 지리산에 비해 훨씬 장르적으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인구 60만의 먼 남아메리카 다문화 국가, 이곳이라면 국내에선 실정과 맞물리지 않아 제작되기 힘든 국제 마약 수사물을 재현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장소이기에 각종 장르적 도상을 원형 그대로 조립할 수 있는 상상력의 휴양지가 됐다. 그 결과 황정민으로 계열화되는 ‘한국 남자 영화’와 장첸으로 표상되는 홍콩 누아르의 이미지가 조금의 훼손도 없이 만나 대결하고, ‘미드’에서나 볼 법한 미국 마약 수사국이 개입하는 진귀한 광경이 어색하지 않게 나온 것이다. 한편 “국민의 40프로가 마약 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한다는 내레이션은 수리남에 대한 지식을 콘텍스트로 제공하고, 거기서 실제로 벌어진 조봉행 ‘실화’가 보는 이의 의심을 차단하는 방어 기제가 된다.

한 마디로, <수리남>이 장비한 서사적 무기는 이런 것이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어?” “왜 안 돼?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 <수리남>은 서사 개연성의 많은 부분을 서사 바깥에 존재하는 실화가 대체하는 드라마다. 앞서 말한 이중의 실화 구조에서 알 수 있듯 이는 감독이 보는 이에게 요청하는 관람의 태도다. 실제로 윤종빈은 드라마 발표 후 인터뷰마다 실화를 언급하고 있고 언론 매체를 통해 K 씨 이야기가 다시금 알려지고 있다. 문제는 이 상황을 이용하는 창작자의 태도다. <수리남>은 사실은 K 씨 실화에서 많은 부분이 각색된 이야기다. 목사로 뒤바뀐 조봉행, 창작된 장첸 조직의 존재, 강인구가 직접 전요환을 추격하는 결말 등 인물 설정과 플롯 전개 같은 큰 틀은 물론 디테일까지 각색돼 ‘실화를 가져왔다’는 말로 합리화될 수 없는 대목이 너무나 많다.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 스틸 이미지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 스틸 이미지

<수리남>에서 가장 지루한 인물을 꼽자면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 강인구다. 그는 내 집 마련과 가족의 존속을 위해 분투하는 가장으로서 최익현처럼 장르적 세계에 흘러 들어간 현실적 인물이다. 즉, 한국 가장이 수리남이란 다문화/장르물 월드에서 벌이는 모험이 이 이야기의 줄거리다. 부제는 ‘이세계로 간 K-아저씨’ 정도일까? 하지만, 최익현의 경우 장르적으로 무능한 인물이 겪는 수난과 불협화음이 서사와 주제의식에 입체감을 주었다면, 강인구는 장르적으로 맞지 않는 인물이 너무나 유능하게 모든 국면을 헤쳐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강인구에게 공감이 잘 가지 않고 그의 존재가 장르적 긴장감을 해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 지점에는 동세대 ‘한국 남자’에 대한 창작자의 자의식이 투영돼 있는 것 같다. 강인구의 무기는 ‘헬조선’에서 단련된 남성 주체로서의 처세술이며 ‘사회생활’의 흐름을 읽는 감각이다. 그러면서 마피아들을 쓰러트릴 만큼 싸움을 잘하고 무장 가드들과 총격전을 벌여 승리한다. 이렇듯 과잉된 인물 설정은 다른 인물들에 비해 명백히 작위적이고, 그래서 실제로 유사한 일을 겪은 실존인물 K 씨의 존재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설정이다. 뒤집으면 ‘실화’를 빌미 삼아 마음껏 부풀린 인물 설정인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을 연출한 윤종빈 감독.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을 연출한 윤종빈 감독. [넷플릭스 제공]

<범죄와의 전쟁>에서 자신의 아버지 세대를 거침없이 풍자하던 윤종빈은 10년 후 강인구와 같은 나이를 먹고 역시 ‘아버지’가 된 후에는 자신의 세대를 가부장 판타지로 묘사하고 있다. 윤종빈은 강인구가 전화 면접으로 아내를 뽑는 장면의 개연성에 대한 질문에 ‘K 씨의 실화’라고 설명했지만, 실화는 그것을 취사선택으로 재구성한 극화와 같을 수도 없고 극화를 대체할 수도 없다. 창작자가 보여줘야 하는 건 실화를 참조하지 않고도 드라마 자체로서 납득될 수 있는 자기 완결적 이야기 구성이다. 6부작이나 되는 드라마지만 이후에도 강인구가 아내는 물론 자식들과 제대로 교감을 나누는 에피소드는 나오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투쟁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난무하지만, 가족의 존재는 가장의 자의식을 표현하기 위한 소도구로 진열될 따름이다.

한편으론 수리남 정부에서 제기한 항의 - 수리남을 마약의 온상지로 묘사한 것에 대한 항의 -에 대한 윤종빈의 대응도 마찬가지다. 한 인터뷰에서 배경을 수리남 대신 가상의 국가로 바꿀 생각은 없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기에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말했는데, 그렇게까지 바꾸는 것이 합리적이냐를 떠나 이 드라마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이 허구로 각색되었는지 떠올린다면 이는 일관성 있는 태도가 아니다.

<수리남>에서 어떤 퇴행을 찾을 수 있다면 남자들만 등장한다거나 집단 섹스 장면을 집어넣었다는 따위의 이유가 아니다. 실화와 극화를 편의적으로 오가며 창작자의 책임을 방기하고 합리화하는 기회주의와 사회의식적 노화현상에 빠진 한 젊은 창작자의 자화상이 거기 물씬거리기 때문이다. <수리남>은 장르를 재현하는 기술적인 부분에서 우수한 드라마지만, 실화란 명분으로 도피하는 적지 않은 순간들이 실소와 실망감을 자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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