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침묵’의 정치인이었다. 그가 발언을 했던 곳은 주로 ‘복도’였다. ‘여당 속의 야당’이라는 박 후보의 이미지는 일정 부분 사실일 수 있지만 그보다 그는 역대 가장 강력한 ‘2인자’로 더 오래 지냈다.

공적인 공간과 역할에 있어 박 후보는 거의 완벽하게 이명박 정부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2인자의 행보였다. 그런 박 후보가 ‘여당 속의 야당’으로 행세하던 곳은 대체로 ‘복도’이거나 혹은 이해당사자들이 모인 사적 장소였다. 이런 이중생활은 정권 친화적인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이명박 정부가 취임 후 곧 바닥의 인기로 5년을 버텨오는 동안 ‘2인자’ 박근혜는 철저하게 ‘여당 속의 야당’으로 포장돼 전시됐다.

▲ 언론악법 처리 당시 박근혜 의원은 복도에서 “언론법에 반대할 것”이라고 얘기했다.하지만 그 말을 하고 불과 사흘 만에 한나라당은 '언론악법’을 날치기 처리했다. 박 의원은 물론 동조했고, 적극적으로 찬성 표결까지 했다. 당시, 박 의원의 무원칙한 입장 변화를 보도했던 MBC '뉴스후' 화면 캡처.

박 후보의 이런 이중성이 가장 잘 드러났을 때는, 이명박 정부의 최대 실정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른바 ‘언론악법’ 날치기 국면이었다. 여야가 첨예한 대립을 이어가고, 시민사회가 완강한 저항을 하던 당시 박 후보는 복도에서 “언론법에 반대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이는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명박 정부가 사할을 걸고 추진하는 사안에 박 후보가 사실상 처음 제 목소리를 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말을 하고 불과 사흘 만에 한나라당은 ‘언론악법’을 날치기 처리했다. 박 의원은 물론 동조했고, 적극적으로 찬성 표결까지 했다.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이란 박 후보의 이미지 메이킹은 그래서 사실상 철저하게 만들어진 허구의 소산이고, 부풀려진 측면이 크다. 박 후보는 ‘원칙’을 내세울 만큼 뚜렷하게 뭔가를 보여준 적이 많지 않다. 그의 ‘원칙’은 거의 사후적인 것이었고, 대체적으론 ‘수동적’인 것이었다. 예컨대, 충청권 공략에 있어 박 후보 측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세종시 사수’만 하더라도 그렇다. 박 후보는 “세종시는 본인이 정치생명을 걸고 지켜낸 도시”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은 많이 다르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의 박근혜 후보는 2004년 10월 27일 국회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 “수도 이전을 강행해서 엄청난 예산낭비와…국가자원을 낭비하면서 국론분열을 야기하고 국력을 소비했다”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맹비난했다. ‘노무현이 만들고, 박근혜가 지킨 세종시’라는 레토릭은 박근혜 의원의 무원칙을 되려 세련되게 포장해주기 위해 보수언론이 만들어낸 수사에 불과하다. 실제로 박 후보는 입으로는 세종시와 본인의 정치적 생명을 등치시키며 ’충청 지역주의‘ 정서를 자극하면서도 ’세종시 지원을 위한 특별법‘ 같은 문제는 새누리당 당론 반대로 좌초시켰다.

박 후보의 무원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원칙은 대체로 대통령이 되기 위환 과정에서 조변석개하는데, 비교적 최근 김종인 국민행복위원장을 내친 것이 대표적이다. 지난 총선 전, 박근혜 후보는 당명까지 교체하며 ‘정치 쇄신’과 ‘경제민주화’ 담론을 띄었다. 보수정당의 정체성보다도 권력 획득을 위해 시대정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선 고려한 화려한 ‘플레이’였다.

하지만 상대 후보가 과거의 구도에서 ‘제압’ 가능한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과감하게 회귀했다. 새누리당 개혁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며, 재계에서 ‘진짜, 새누리당이 변하는 것이냐’는 설왕설래를 불러왔던 김종인 위원장은 대선 선거 운동 기간 중에 ‘토사구팽’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는 지금 이명박 인수위 수준의 ‘비지니스 프랜들리’로 후퇴했지만, 이 대목을 짚는 언론은 거의 없다.

비근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반값 등록금’ 같은 경우 지난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핵심 공약이기도 했다. 이를 추진하지 않은 1차적 책임은 MB에게 있겠지만,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박 후보가 ‘의지’를 가졌더라면 얼마든지 추진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박 후보는 18대 국회 임기 내 반값 등록금의 문제를 한 번도 제기한 바 없다. 그리곤 갑자기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반값 등록금을 하겠다’고 공약하고 나섰다. 이렇게 덧붙인다. ‘의회를 갖고 있는 새누리당이 더 잘 추진할 수 있다’고. 글쎄? 지금 새누리당이 공약화 한 상당수의 문제들이 지난 18대 국회에서 이미 계류 중이거나, 논의됐던 내용들이었다.

▲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정치 생명을 걸고 세종시를 지켰다'고 말하고 있지만, 한나라당 대표 시절이던 2004년 10월 27일 국회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수도이전을 강행해서 엄청난 예산낭비와 국가자원을 낭비하면서 국론분열을 야기하고 국력을 소비했다”고 참여정부의 수도 이전을 강도높게 성토한바 있다. 당시 박 대표의 국회 연설을 보도한 MBC뉴스 화면 캡처.

박 후보의 말과 행동이 결정적으로 갈라선 예는 최근 보름 사이에도 몇 번 있었다. 박 후보와 새누리당은 ‘골목상권을 살리겠다’는 말을 유세하며 하루에도 열 두 번씩은 하고 다니고 있다. 박 후보는 지난 11월 14일 “대형마트 때문에 전통시장이 힘들어 하는데 규제를 철저히 하겠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하지만 말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인 11월 21일 박 후보의 새누리당은 ‘대형마트 규제법’이라고 불리던 유통법 재개정안을 무산시켰다.

이런 사례는 또 있다. 박 후보는 공약을 발표하며 “최저임금을 물가상승률과 경제성장률을 합한 숫자 이상으로 인상시킬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를 위해선 최저임금법을 개정하면 된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최저임금법 개정을 위한 원포인트 국회를 열자는 민주당의 요구에 철저히 불응하고 있다.

그 밖에도 무수한데, 2008년 해양수산부 폐지에 앞장서며 폐지 법안을 공동 발의했다가 이번 대선에선 해수부 부활 공약을 했다. 4대강 예산 날치기 역시 언론악법 처리 때와 마찬가지로 계보 의원들을 동원해 적극 협조했으면서 “강바닥을 파고 토목공사를 일으킨다고 해서 경제 살아나지 않는다”고 얘기하고 있다.

대선이 끝나고 인수위가 꾸려지면 당선자의 공약이 책자 형태로 만들어져 각 정부 부처에 전달된다. 그럼, 관료들은 당선자의 공약을 ‘당장 실현 가능한 것’, ‘임기 내 실현 가능한 것’, ‘임기 내 실현 불가능한 장기 과제’로 재분류해 인수위에 보고한다. ‘관료들에게 휘둘린다’는 건 이런 과정에서 당선자가 어떤 비전과 뚝심으로 보수적 관료들의 ‘장난’을 제압하느냐에 달려있다. 실제, 정권의 승패는 여기서 좌우되기도 한다.

장기 과제로 분류된 공약들이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는 건 당연하다. 임기 내내 타당성 검토라는 이름으로 부처를 떠돌다 미아가 되는 핵심 공약들도 부지기수다. 아마도 박 후보가 당선자가 된다면 공약 가운데 상당수가 이렇게 분류되어 자동 폐기될 것이다. 사흘 전의 약속도 뒤집는 박 후보이며 선거 운동 기간 중에 ‘경제민주화’를 포기하는 새누리당이다.

공약을 뒤집은들 누구도 책임을 따지지 않을 것이다. 선거를 위한 이미지 메이킹 노선을 버리고 이명박 정부 계승의 노선으로 가더라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 후보는 ‘침묵’의 정치인을 ‘원칙’의 정치인이라 부르고, ‘2인자’를 ‘사실상 야당’으로 호명하는 기괴한 언론의 시대가 낳은 ‘괴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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